- 윤보인 소설집
윤보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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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는 작가였는데, 소설집이 나왔군요! 궁금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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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A Time for Drunken Hors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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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ime For Drunken Horses, 바흐만 고바디, 2000)

 

먼저 제목에 대한 언급을 하고 들어가자면,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접했었을 때 나는 여기서의 ‘취한 말’은 말(言)일거라고 생각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러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말이 취하다니, 정말 감각적인 제목이군. 주정이나 주사를 의미하는 건가. 혼자 별 생각을 다 했다. 심지어 김경주 시인의 동명 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읽은 후에도 그랬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라는 시구에서는 말(言)을 말(馬)로 치환하는 시인의 놀라운 언어유희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서론이 길어졌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나의 과잉 상상력이다. 사물을 한 번씩 꼬아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자동 기술적 사고가 나를 화들짝 놀래켰다.




영화의 배경은 이란과 이라크의 접경지역이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란 쪽에 살고 있는 쿠르드족 오남매의 이야기다. 막내를 낳다 어머니가 죽은 후 일 나갔던 아버지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지뢰를 밟은 것이다. 재수가 없었을 뿐, 그곳에서는 죽음의 흔한 이유다. 졸지에 가장이 된 아윱은 열두 살의 소년에 불과하지만 형제들을 위해 학교도 그만두고 일을 한다.

아윱에게는 살림을 돌보는 17세 누나 로진과 선천적인 기형을 안고 태어난 15세의 형 마디 그리고 여동생 아마네와 돌이 막 지났을 아기 동생이 있다. 마디의 키는 옹알이를 하는 막내 동생과 비슷하다. 머리와 몸통에 비해 사지는 앙상해서 혼자 서있거나 걷는 게 불안해 보인다. 마디는 실제로도 심한 소아마비를 앓은 게 아닐까 싶은 장애인이다. 지능도 세 살에서 멈춰있다. 그래서 주로 아윱이나 아마네의 품에 안겨 이동한다. 형제들은 이런 마디를 끔찍이도 아낀다. 제 시간에 맞춰 약을 먹이고 수시로 얼굴에 뽀뽀를 해주고 언 손을 비벼서 녹여준다. 가만 보면 마치 엄마가 자식에게 하는 양이다. 어떻게 열 살 안팎의 아이들에게서 저런 사랑이 나올까 싶은데 그건 이 영화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그들의 부모 모습을 추측케 한다.

그런 사랑을 받는 마디가 매일 밤 아프다. 마을의 의사로부터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오고 있지만 모르핀 계통의 진정제인 듯 더 이상 주사를 놓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마디는 한 달 내로 죽는다. 워낙에 불치병이라 수술을 한다 해도 죽음을 약간 유보시키는 것뿐이다. 단, 8개월을 더 살 수 있다.

아윱은 아버지가 했던 밀수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다. 노새에 물건을 실고 이라크로 가서 다른 것으로 바꿔 오는 일이다. 국경 근처라 주위에는 지뢰가 깔려있고 무장강도가 매복하는 등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마디의 수술비를 벌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벌이는 동생 아마네에게 공책 한 권 사주기에도 빠듯하다. 생활비로 모두 소비되는 것이다. 결국 아윱은 두 달이 지나도록 마디의 수술비를 벌지 못한다. 그러자 누나 로진은 마디를 수술시켜 준다는 약속을 받고 이라크로 시집을 간다.

오랜 전쟁을 통해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으로 전락한 이 곳에서 형제들은 마디의 남은 8개월을 위해 모든 걸 건다. 국경 넘어 팔려가듯 시집을 가고 학업도 포기한 채 매일 지뢰의 공포와 혹한 속에 일 한다. 꺼져가는 생명에 자신들의 싱싱한 삶을 수혈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삼투압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카메라의 앵글은 무릎까지 눈이 내린 설원을 지나가는 신부 행렬을 멀리서 롱테이크로 잡는다. 국경 저편의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는 로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란과 이라크라는 나라가 있지만 그런 철조망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눈발을 헤치며 이라크 국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신부일행. 마디는 작은 주머니에 담겨 노새의 등에 매달린 채 혼수처럼 혹은 혹처럼 딸려간다. 그러나 신랑의 어머니는 마디를 거부하고 그 대신 노새 한 마리로 신부 값을 치른다. 자기 자식도 이미 열 명이라는 것이다.

아윱은 마디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이라크로 노새를 팔러 갈 결심을 한다. 그 돈으로 마디를 수술시킬 계획을 세우고 밀수 행렬에 다시 합류한다. 이번엔 마디를 업고서다. 국경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매복하고 있던 무장 강도들의 총소리가 빗발친다. 행렬은 흐트러지고 말고삐를 돌리지만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술을 너무 많이 먹은 말들은 도망가지 못한다. 그야말로 말이 취한 것이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자리에 푹 쓰러져 버린다. 사람들은 말의 머리를 걷어차고 때리고 눈(雪)으로 목을 비벼 주지만 말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쉰다.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말과 짐을 모두 버리고 도망간다. 아윱은 그들, 어른들에게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모두 떠나버린다. 아윱만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누나와 바꾼 노새가 아니던가. 마디의 마지막 8개월이 달린 말이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엔딩 부분은 여러분을 위해 남겨놓겠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날 행운을 빼앗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다른 영화도 만나고 싶어진다. 이런 따듯한 시선을 가진 감독이라면 믿을만하다.

사실,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전문 배우가 아닌 그 동네의 평범한 주민들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픽션보다 다큐에 가깝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영화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이들도 있다. 카메라를 처음보고 총 인줄 알고 놀라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건 그 지역이기에 가능한 반응이다. 그렇게 순수하고 그래서 겁이 많다. 그리고 오랜 시간 전쟁에 노출되어 있었다. 작중 인물 아마네와 마디는 실제로도 남매간이다. 물 없이 알약을 삼켜야 하는 마디에게 이렇게 하라며 삼키는 시범을 보이는 아마네의 모습은 콧등을 찡하게 만든다.

훈련된 직업 배우가 아닌 현지인들과 작품을 만들었다는 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지금도 지구의 어느 한 곳에서는 이러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고 화약고 같은 중동지역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종교와 사상, 민족, 지역 간의 분쟁 이 모든 ‘국경’을 넘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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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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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태초에 ‘칙릿’이 있었다

이 소설은 제 4회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다. 1억 원이라는 국내 최고 상금의 문학상이기에 당선보다는 ‘당첨’의 느낌이 강하지만 1회 당선작 <미실>을 필두로 회를 거듭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운 또한 실력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스타일>은 칙릿 소설이다. 칙릿(chick-lit)이란, 젊은 여성을 뜻하는 속어 ‘chick’에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를 결합한 신조어로 젊은 도시여성들의 일과 연애, 취향 등을 다루는 소설을 말한다. 이에 질세라, 국립국어원에서는 발 빠르게도 대안어로 ‘꽃띠문학’을 제안했다. 꽃띠란, 한창 젊은 여자의 나이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칙릿을 두고 문학에 젊은 피의 수혈이라는 등의 수식이 난무하는 것을 볼 때, 젊은 감각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꽃띠’는 설득력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이미 ‘chick’에서 비하된 뉘앙스가 꽃띠라고 다르진 않아 보인다. 총 1,717명이 투표에 참여해 43%의 지지를 얻었다고 하니 대세를 따라야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꽃뱀’이 연상되는 것은 나뿐인 걸까.

본격적으로 칙릿 소설은 90년대 중반에 나온 <브릿지 존스의 일기>를 시점으로 해서 최근 히트를 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쇼퍼홀릭>, <가십걸> 국내작품으로는 <달콤한 나의 도시>, <걸프렌드>, <쿨하게 한걸음> 등의 작품이 있다. 그리고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평범한 여자와 백마탄 왕자님’이라는 영원한 테마의 전형인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만나게 된다.

몇 년 전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영화 <오만과 편견>을 처음 봤을 때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의 내용이 할러퀸류의 연애소설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8세기의 칙릿이라고 할까. 우리나라의 고전 작품에서도 이러한 구도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몽룡의 신분이 더 높다는 점에서 춘향전 또한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렇다면 칙릿은 90년대 중반도, 18세기도 아닌 태초부터 있어왔던 장르인지도 모른다. 생태학적으로 강한 숫컷을 고르려는 암컷의 유전자가 전승에 전승을 거듭하듯이.

2. 그녀의 스타일

타이의 (주)기도문

랜드마크(홍콩의 거대 쇼핑몰)에 계신 아르마니여,

아버지의 구두가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프라다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쇼핑이 파리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센트럴(홍콩의 거대 쇼핑몰)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저희에게 남편의 비자카드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수수료를 떼어간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바닥난 은행 잔고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미쓰코시 백화점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

윙 온(wing on, 홍콩 최대 여행사)에서 구하소서.

샤넬과 코티에와 베르사체, D&G가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멕스~

-데이비드 에반스《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지》,라이 씨Lai See 칼럼에서

서문처럼 소설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가 이 작품의 내용을 암시한다.  패션지의 에디터로 일했던 작가의 경험이 관록으로 고스란히 묻어나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러한 핍진성은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 수많은 브랜드의 이름이 일사분란하게 열거되지만 허황된 소비문화에 대한 진부한 전언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패션지 기자라는 백조의 발과 같은 직업군에 대한 공허함,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수한 직물성을 무리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을 작가는 포착해 냈다.

‘아침은 커피, 점심도 커피, 저녁은 담배 한 갑 반. 다이어트 강박증에 빠진 도시여자들의 미니멀한 식단’으로 배를 채우는 주인공 이서정의 고향은 압구정동이다. 현대 백화점이 개장하던 날 엄마와 손을 붙잡고 입장했고 맥도날드 1호점이 한국에 상륙하던 날 ‘비장한 얼굴로 언니가 사온 치즈버거를 시식’ 했던 유년을 보냈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현장을 우유를 먹다가 목격한다. 그 다리를 건너던 버스 안에는 쌍둥이 언니 중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그렇게 언니를 잃은 후 그녀는 삶은 언제든 갑자기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재를 뺀다면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따라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원하는 것을 산다. 이것이 그녀 인생의 교리다. 그것은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의 상표고 때로 샤넬이라는 이름의 레테르가 된다.

그런 그녀에겐 또 다른 욕망도 존재한다.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월드비전에 기부금을 내는 일이다. ‘굶주려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무너지고, 새로 나온 마놀로 블라닉을 보면 그게 갖고 싶어서 잠도 안 온다. 이것도 저것도 해야겠고, 이쪽도 저쪽도 놓칠 수 없다.’ 이 두 개의 욕망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이서정은 또 다른 딜레마에도 봉착한다. 나는 레스토랑 체험기 칼럼을 쓰며 멋지게 나온 스테이크의 사진을 담아가야 하는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채식에 관한 책을 읽으며 윤리적이 되기 위해선 스테이크를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문으로 혼란스럽다. 또 박우진을 이토록 미워하면서도 나는 왜 경외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인지.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도의 ‘애증’이라는 감정선이다- ‘프라다에 대한 속물적인 욕망과 제 3세계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은 선량한 욕망은 어떻게 화해’ 해야 할까. 이것은 작가의 고민이자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고민이다. 

3. 통속 앞에 무릎 꿇다

‘텔레비전 전파의 세례를 받은 드라마 키드’ 세대답게 주인공 이서정은 통속의 힘을 믿는다. 통속通俗에는 세상과 통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삶의 고단함을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위안 받고 희망을 품게 하는 힘이다.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만드는 것.’ 어떤 장르가 이런 파급성을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 안톤 체홉이 있다면 우리 엄마에겐 김수현이 있고 새언니에겐 공지영이 있다. 각자의 영웅으로부터 우리는 위로 받는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장르를 분명하게 구분할 것인가.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문학에 있어 가능한 일이고 의미가 있는 일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일본의 경우, 순수문학을 대상으로 한 아쿠타가와상이 있다면 대중문학을 지원하기 위한 나오키상1)도 존재한다.

한 예로 2004년 130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과 나오키상을 수상한 바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은 문학성의 수준과 장르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현재 국내 굴지의 문학상 수상작들로 우후죽순 칙릿류가 쏟아져 나오는 한국문단 현상은 문제가 있다. 올해의 화려한 수상작들을 열거하자면 세계 문학상에 백영옥의 <스타일>이, 오늘의 작가상에 고예나의 <마이 짝퉁 라이프>가, 창비장편소설상에 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이 당선됐다. 그나마 한겨레문학상의 <무중력 증후군>이 살짝 비껴간 셈이다.

칙릿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칙릿이면서 칙릿이 아닌 듯 포장하는 자기부정과 아예 작정하고 썼다라고 딱지가 붙는 자기비하식 발언이 나쁘다. 건강한 장르로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아가씨 문학이라 일컫는 칙릿에는 된장녀와 쇼퍼홀릭이 등장해 재미와 소비만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다. 어디, 고도를 기다리는 베케트의 고상한 고뇌만이 통찰인가. 칙릿 안에는 통속적인 통찰이 존재한다. 그것이 장르 문학이 가진 특성이자 미덕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장점을 키우지 못하는 데는 기존의 문학제도가 가지고 있는 고루한 권위의식이 한 부분을 차지한다. 수상작을 심사하는 심사위원들은 ‘칙릿’의 작가도, 평론가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칙릿을 칙릿으로 보지 않거나 혹은 볼 수 없는 관점을 가졌다. A를 A가 아닌 B`로 해석해서 그 특성과 미덕을 희석시킨다. 여기에는 출판사 및 언론사의 사심도 개입된다. 상업성에서도 흥행하고 문학적 권위에서도 승리하려는 그들의 욕망 또한 프라다와 아프리카 난민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는 이 ‘아가씨’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문학은 분명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칙릿을 두고 자본이 개입한 문학의 한 현상으로 보는 시각도 특정 독서소비층을 타깃으로 양산되었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권위 있는 출판사 및 언론사의 이름을 등에 업고 고액의 상금을 내거는 데에는 그이상의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이러한 전략은 <브릿지 존스의 일기>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영화화되고 국내에선 <달콤한 나의 도시>와 <스타일>이 드라마화 되는 (<스타일>은 올 12월 방영을 앞두고 있다)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어디 이뿐인가. 조선일보가 주최한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의 첫 당선작 <진시황 프로젝트>의 경우 제작비 300억을 투입하는 대작으로 뤽베송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헐리우드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문학과 영상예술이 상생하는 긍정적인 구도다.

다양한 많은 장르들이 제각각 발전 할 때 문학이란 숲은 좀 더 풍요로워 진다. 이렇게 기특한 장르 문학을 위해 ‘꽃띠문학상’을 제정해 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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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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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에 이은 김영하의 장편이다.

빛의 제국 이후 1년만에 나온 것이라고 하니, 연재 소설이었다는 것을 가만하더라도 정말 괴물이 아닐 수 없다.

문단에 김영하 같은 작가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름지기 글쟁이란 이래야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역할모델이 되어 준다.

 

이 소설과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연재소설과 (퀴즈쇼는 조선일보에, 바리데기는 동아일보에 올해 연재되었다.) 일반 장편소설과의 차이점을 느꼈다. 물론 책으로 엮을때 손을 다시 볼 수 있겠으나 그렇게되면 연재소설의 의미도 없어질 뿐더러 작품의 얼개도 무너져 다른 작품이 될 공산이 크고, 무엇보다 작가가 그걸 또 쓰고 싶겠는가 싶다.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처럼 몇십년을 두고 개정판을 찍는다면야 한 십년쯤 흐른 후 좀 고쳐볼까 하겠지만 지금 당장 손을 떠난 작품을 또 주물러야 한다는건 고역일 터. 나같아도 그냥 갈 것 같다.

따라서 연재 소설은 그때그때 써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구성을 조율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

퀴즈쇼도 좀 길다. 4분의 1정도는 줄여도 상관 없다. 서두가 너무 긴데 그부분이 지루하다. 혹, 너무 빨리 끝날까 싶어서 연재하면서 좀 늘인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하다.

 

인생을 하나의 퀴즈쇼로 은유한것과 가장 어려운 퀴즈는 바로 인간이라는 점 등의 아포리즘이 마음에 든다.

88만원 세대라고 불리우는 이 시대의 20대에 대하여 쓰고 싶었다는데 재밌는건 정작 본인이 20대였을 당시에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니 <퀴즈쇼>같은 작품이 나온다. 주인공들이 1인칭의 같은 20대 시점임에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다. 40대의 작가가 20대의 탈을 쓰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관찰자 시점이 느껴진다.

정말 20대라면 저런 말은 하지 않을 텐데, 재밌으라고 쓴 부분에선 시큰둥하게 되는 그런 시츄에이션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20대이기 때문이다. (2주 후면 30대가 된다...- -;)

 

제목이 퀴즈쇼이기 때문에 잡다한 상식들이 쏟아진다. 몇몇은 낯이 익은 책 내용과 영화들이어서 역시 내 레이다 망에 모두 걸리는군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가 한때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 <문화 포커스>에서 들었던 내용들이었다.

역시나. 그는 1년 남짓 진행했던 프로그램에서 섭취한 박학다식상식을 작품에 그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퀴즈쇼라는 제목이 나올법하다.

그의 문학성과 접목한 상업성이 그의 천재성을 말해준다.

 

작가는 많은 경험을 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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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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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리뷰에 나와 있는것처럼 단숨에 읽었는데 그건 재미있었다는 말도 되고 쉬웠다는 얘기도 된다.

왜냐면 바리데기 설화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그 기본 얼개에 오늘의 사회 문제를 덧씌운다.

바리데기 설화로 뮤지컬을 만든적도 있다는데 그건 예전에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처럼 입양아 문제를 건드렸다고 한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만나기 위해 고국을 찾는 바리, 바리들.

 

황석영의 바리는 북한에서 강을 건너 중국으로 몰래 잠입한 후 죽음의 밀항선을 타고 영국으로 가게 된 여자다. 특이한 것은 어린 시절 혹독하게 병을 앓고 나서부터 신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동물과 소통할 수 있고 사람들의 과거를 볼 수 있게 됐다. 할머니가 신기가 있는 사람이었으니 내림일 수도 있지만 그런 특별한 능력은 바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부분이 있기 때문일까. 어느순간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도 느껴지는데 거기에 황석영 특유의 입담까지 버무려져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심청>도 그렇게 썼겠지. 다음에는 어떤 설화를 가지고 나올지 궁금하다. 춘향이나 황진이, 자청비, 제주삼승할망, 오늘이.... 아직도 많네요. 황석영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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