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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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항상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데 삶의 어떤 시기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완의 자세]에서 엄마가 말했듯이 ‘오늘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되’고 ‘인생은 지겹도록 기니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면서도 어떨 때는 내가 이뤄내지 못한 욕망이 너무 커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빠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이 헛되다 여겨져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에 등장하는 ‘오혜자’는 또래의 다른 여성들보다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잃었고, 재산을 사기로 잃었고, 덕분에 미래에 대한 낙관도 잃은듯하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딸 ‘유라’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목욕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엄마의 욕망인 무용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유라’의 삶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아마도 엄마 ‘오혜자’가 딸을 포기하지 않고 나름의 최선을 다해 노력해왔음을, 다만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탓에 인생이 남들보다 행복하지 못했던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오혜자’의 인생에서 서사되지 못한 불행이 더 많았음을, 그래서 인생을 ‘허무해, 그치? 인생이란게 참 허무해, 허무하고 허무하다’라고 되뇌이는 모습이 쓸쓸하게느껴진다. 그리고 딸 ‘유라’가 엄마의 허무함에 일조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안타깝다. 엄마의 삶의 무게가 딸에게 대물림되는 현실은 불편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유라는 엄마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약속하지도 않고, 엄마의 열망대로 뛰어난 무용가가 되어 비행기 타며 공연하는 삶을 살겠다고 헛된 꿈을 꾸지도 않는다. 아직 어떻게살아갈지 확실하지 않지만 천천히 몸을 풀며 다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자세를 취할 따름이다.

현재의 내 모습도 어쩌면 유라처럼 불안하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게 부유하는 중인 것 같다. 내가 꿈꿔온 나는 진정으로내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가 만들어 낸 허상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내가 꿈꿔온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해진다. 어떤 직업을 갖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디에 집을 사고, 어떤 차를 타는 그런 ‘내’가 아니라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로 내가 꿈꿔온 나를 설명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충분히 ‘내가 꿈꿔온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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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 무루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읽기
무루(박서영)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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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고 경제활동을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서도 이상하게 스스로가 ‘어른’이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어른이 되지 못하였으니 노년은 아직 멀고 먼 이야기로 느껴지겠지만, 언젠가 오긴 할 것이다. 늙고 힘이 약해진 할머니가 되었을 때가. 동화에 나오는 심술궂고 고약한 할머니가 될지, 인자한 미소의 너그러운 할머니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윤여정 배우가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지게 나이들기 위해서는 현생이 멋있어야 하겠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왠지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어쩌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내 또래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보아도 그리 위안이 되진 않는다. 반짝이고 값비싼 것들로 둘러싸인 사람들을 보면 더 작아지기 때문일까.
내가 ‘나’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혼자 살아가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거창하고 그럴싸한 목표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안온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 그것을 몸소 증명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걸 듣다보면, 그리고 나도 하나씩 그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물들다보면 행복한 노년의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태어나지 않은 세계에 성장은 없다. 안락하고 평온하지만 그곳에서는 몸도 마음도 자라지 않는다. 고통도 슬픔도 없기에 기쁨도 행복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이는 모두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용감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부모를 응원하고 위로한다.
(중략)

태어난 뒤에도 우리는 몇 번이고 태어나는 마음으로 산다. 제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커다란 운동장에 처음 들어설 때,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갈 때,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사랑이 올 때, 사랑이 떠날 때, 크고 작은 도전과 모험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시를 쓰지 않는 어리석음보다 시를 쓰는 어리석음을 더 좋아’(비그와바 쉼보르스카, <선택의 가능성>)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용기를 낸다. ‘연습 없이 태어나서 /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 인생이라고 ‘여름에도 겨울에도 / 낙제란 없는 법’이니(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기꺼이 매 순간 태어나는 쪽을 선택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상처도 후회도 없다. 그러나 성장도 없다. 성장은 언제나 균열과 틈, 변수와 모험들 사이에서 생겨난다. 간극을 메우고 틈을 좁히고 서로 어긋난 것들 속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에야 비로소 우리는 조금 자랄 수 있다. 온실 속 화초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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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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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 쪽을 쓰고 이야기를 완성하기까지 7년 여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작가님의 말 때문이었을까. 책을 읽는 사람도 금방 읽어낼 수 없는 책이었다.
바람, 눈, 추위, 어둠, 빛, 나무, 피, 바다, 산.
제주의 풍경이 스산하다고 하면 어울리지 않는다 하겠지만, 이 소설 속의 눈으로 뒤덮인 제주는 어딘가 한맺힌 슬픔으로 가득 차 차디찬 얼음 같이 단단한 느낌이다.
무자비하고 참혹한 4.3 사건은 수십 년의 시간 속에서 함구되었고 피해를 겪은 사람들도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경하’와 ‘인선’이 살아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뚜렷이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분명하게 남은 그때의 그 비참한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앞으로 여름의 제주를 떠올리면 김금희 작가의 ‘복자에게’가 생각날 것 같고, 겨울의 제주를 떠올리면 이 책이 떠오를 것 같다.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 피에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다. 빳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대. 총알이 턱뼈의 일부를 깨고날아간 거야. 뭉쳐진 머리카락이 지혈을 하고 있었는지 새로 선혈이 쏟아졌대.
윗옷을 벗은 이모가 양쪽 소매를 이빨로 찢어서 두 군데 상처를지혈했어. 의식 없는 동생을 두 언니가 교대로 업고 당숙네까지걸어갔어.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대.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대.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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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돈독하게 -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김얀 지음 / 창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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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감이 커진다면 제프 베이조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겠지만 공평하게도 행복감은 주관적인 것이라서 돈과 상관없이 우리는 그들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비용은 필요한 것이 현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부자를 꿈꾸고 그린다.
매월 월급을 주는 직장에서 일하며 남자친구가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며 함께 하자고 제안하는 것에도 끌리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 보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지은이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에 충실하며 살았고 먼 길을 돌아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물질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표지에 적힌 말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세상이다. 게걸스럽게 돈을 모으려 애쓰지 말고, 지혜롭게 돈을 모으고 싶다. (물론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위해서.

돈을 모아서 하고 싶은 것은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먼 훗날 근로소득이 없어지는 때에도 너무 빈궁하지 않게 여유롭고, 초라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돈을 모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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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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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이십년이 되어간다. 방송에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소개한 뒤로 책을 읽었고, 중고등학생 시절에 한국 근대문학집을 접하는 느낌으로 그저 옛 시절의 아련한 이야기라는 감상만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책과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기에-사실은 내 게으름으로 책을 가까이 두고 읽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이 맞겠지만-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단순히 엄마와 같은 ‘박’씨 성을 가진 작가라는 이유로, 담낭암을 앓다 타계하셨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려한 문체가 아니라서 좋고, 이웃집 할머니의 철학이 담긴 고집이 느껴지는 산문집이라서 더 좋다. 고지식한 개똥 철학이 아니라 인생의 숱한 비극과 작은 기쁨들을 경험한 지혜로운 어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는 책이라서 좋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찾아서 하나씩 마음에 담고 싶다. 세상에 치여 혼자서 슬프고 힘들때마다 천천히 들여다보며 위안받고 싶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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