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멋으로 예술을 즐기는 사람, 태극기 부대에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검은머리 외국인, 자기가 찐 무당이라는 걸 증명해보이고 싶었던 늙은 박수무당, 고문실을 설계한 융통성 없는 한 건축가 등등. 성해나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새롭고, 그 인물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생생하다. 성해나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진다. 간만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소설집 P. 154 하기야 X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느냐만. 큭큭, 큭큭큭큭. 여기서 소름이 쫙.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것을 다룰 때는 조심성과 섬세함이 필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일면 그런 점이 장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이가 다칠까봐 가둬두기만 하고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어려운 상황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대범함과 용기가 훨씬 더 필요하다.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작가의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아이를 보며 나를 돌아보고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 가진 힘인 것 같다. P. 121 유리 조각을 치우면서 생각했다. 아주 작은 조각이 얼마나 날카로워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파편’이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는 무수한 크기와 날카로움에 대해서도. 단지 작은 조각이 아니라는 것을.
P. 51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정열일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 둘 다일 수도.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느누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걔였는지 쟤였는지 이름과 얼굴은 지워졌어도 촉감과 온도와 음향, 아득한 형체로 남은 것들. 지나간 애인들은 대체로 얼간이거나 양어치였고 그때는 괜찮은 놈이라 믿었는데 돌아보면 영 아니었다. 한두 명쯤은 제법 괜찮은 놈이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함께 사랑을 밝혀낼 수도 있었을까. 만약 가장 좋은 인연이 이미 지나갔다면, 바보처럼 내가 알아보지 못했고 이제 열화판을 반복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 울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수도. 요즘 것들의 키치적 사랑, 평범한 것이 오히려 특별한 것임을 보여주는 소설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변주되는 장면들이 선연하다.
다 갚지 못한 전세 대출금이나 사랑 없이 누구처럼 비슷하게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결혼과 아이, 어쩌다 생긴 유자로 유자청을 담가 달디 단 유자차를 마시는 이야기들. 크게 잘 되지도, 크게 망하지도 않아서 다행인 이야기들. 그런데 문득 나도 비슷한 결로 살아가고 있는것 아닌가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들. P.293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 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말의 맛이 살아있는 에세이.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보고 그의 말맛 살아있는 글에 매료되었다. 이 에세이는 좀 더 ‘날 것’의 모습을 보여준다. 술이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하고, 술 그 자체가 삶을 빛나게 하기도 한다. 적당히 마셔서 좋을 때도 있고, 때로는 엄청나게 마신 술로 겪는 아찔한(?) 일글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술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사람을 좋아하는 작가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라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