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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여우눈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1월
평점 :
품절
거의 이십년이 되어간다. 방송에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소개한 뒤로 책을 읽었고, 중고등학생 시절에 한국 근대문학집을 접하는 느낌으로 그저 옛 시절의 아련한 이야기라는 감상만 아련하게 떠올릴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 사이 너무 많은 책과 작가들이 쏟아져 나왔기에-사실은 내 게으름으로 책을 가까이 두고 읽지 않아서 접하지 못한 것이 맞겠지만-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단순히 엄마와 같은 ‘박’씨 성을 가진 작가라는 이유로, 담낭암을 앓다 타계하셨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완서 작가님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려한 문체가 아니라서 좋고, 이웃집 할머니의 철학이 담긴 고집이 느껴지는 산문집이라서 더 좋다. 고지식한 개똥 철학이 아니라 인생의 숱한 비극과 작은 기쁨들을 경험한 지혜로운 어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는 책이라서 좋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찾아서 하나씩 마음에 담고 싶다. 세상에 치여 혼자서 슬프고 힘들때마다 천천히 들여다보며 위안받고 싶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바랄 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내가 불태운 것만큼의 정열, 내가 잠 못 이룬 밤만큼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갚아지길 바란 이성과의 사랑, 너무도 두렵고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본능적인 사랑또한 억제해야 했던 자식 사랑……. 이런 고달픈 사랑의 행로 끝에 도달한, 책임도 없고 그 대신 보답의 기대도없는 허심한 사랑의 경지는 이 아니 노후의 축복인가.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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