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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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보’는 나아졌다는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다. 우리의 마음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일까. <마음의 진보>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 정확히 말하면 신앙의 변화에 대해 쓴 책이다. 17살에 수도원으로 들어가 7년 동안 수녀로 살았던 소녀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세계 종교를 연구하는 종교학자가 되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17살의 카렌은 신을 찾고 싶었다. 어딘가에 속해서 진리를 찾는 것은 설레고 의욕 넘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한 인격의 억제 혹은 말살을 겪었다. 개인을 규율에 맞춰야 했으며, 그의 천성인 의심과 질문을 억압했다.

카렌은 응답받지 못했다. 밤새 기도하며 수녀원의 엄격한 규율을 따라도 실질적으로, 영적으로 무엇인가 얻어지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신은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신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카렌은 대학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어 일반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수도원 생활에 대한 회의를 갖게되었고 환속을 신청하여 세상으로 나온다. 그녀는 이제 열정적인 기독교 비판론자가 된다.

카렌은 잠시 정신을 잃거나 기억을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 밖에서는 치료의 대상이었던 질병이 수도원에서는 나약함의 상징이었다. 카렌이 찾아갔던 의사들은 무의식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거라는 프로이트식의 진단을 하며 엉뚱한 이야기만 반복했다. 나중에 다른 의사를 찾아가서야 간질이라는 제대로 된 진단을 받는다.

무엇인가 정확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 달성 가능한 것을 원하는 과정이 그의 삶 속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대충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정확한 실체를 알고 싶어 했다. 그것이 마음이 편한 것이었다. 세상엔 엉터리가 많았다.

카렌은 방송국 편집자의 제안에 따라 종교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면서 종교에 대해 더욱 자세히 공부하며 흥미로운 자료들을 접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일맥상통하며, 진실된 믿음을 요구하고 절대적 진리를 가지고 행동을 규율하는 기독교와는 달리 유대교는 바른 행동을 중시했다. 십자군 연구를 통해 악마화된 이슬람교보다 더욱 악한 행위를 했던 것이 십자군이었음을 알게된다.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우리’만이 진리와 정의를 독점한 것처럼 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p.439) 확신은 독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연구와 인생을 통해 깨달았다.

인기가 없었던 종교 프로그램 제작은 예산부족으로 중단되었지만 그동안 얻은 깨달음으로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이 세 종교가 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정리하는 <신의 역사>저술을 계획한다.

그녀는 유대교 이야기에서 신앙은 실천이고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종교는 인생을 알차게 살기 위해 존재함을, 진리와 믿음을 위해 생을 죽여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

이슬람은 복잡한 교리를 받아들이기보다 의식을 실천하는 편이었다. 또한 마호메트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아낌없이 주려는 마음과 행동을 강조하며 사회를 바꿔나갔다. 핵심은 믿음의 체계가 아니라 실천 과정이었다.

답답한 사람들이 그래서 무슨말이냐, 진리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냐! 라고 묻겠지만 카렌은 이런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몇몇 신학자나 종교인들도 신은 객관적 사실이나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며 무(無)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서양은 합리주의라는 사고를 가지고 오류 없는 교리, 완벽한 진리라는 허상에 빠지게 됐다. 신은 논증 가능한 대상으로 여겨졌고 직관은 적이 되었다. 저자는 이런 태도가 종교적 문제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저 멀리 하나의 진리를 두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할까? 거대한 인류사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각자의 위치에서 발전한 종교의 공통점이야말로 진리를 의미하며 그것이 신이라는 형상으로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세 종교 모두 자신을 내려놓는 비슷한 가치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기에 다시 하나로 수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세한 연구 내용은 <축의 시대>, <신의 역사>와 같은 책에 나와있다. 이 책은 그녀의 마음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단순히 개성을 내세우는 자서전이 아니라 인생을 통해 인간의 믿음과 신앙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에게 믿음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인가? 이는 살면서 한번쯤 생각해볼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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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권력자들 한길그레이트북스 184
이언 커쇼 지음, 박종일 옮김 / 한길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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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변화에서 지도자의 개성이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아니면 시대의 조건이 영향이 큰지 비교하는 것은 논쟁적인 주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이언 커쇼는 <역사를 바꾼 권력자들>을 저술하며 역사적 중요성의 관점에서 개성과 시대적 조건에 대해 말한다.

먼저 그의 주장을 말하자면, 역사 변화에 정치적 지도자의 개성이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자기 특색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특정한 조건“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현대사는 굉장한 격동과 격변의 시대였다. 대중은 혼란의 시대를 이끌어줄 강한 개인을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흐름에서 절대적으로 현명한 선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언 커쇼는 현대사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 12명을 뽑아 소개하며 “기존의 통치구조가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거대한 정치적 격변 가운데서, 또는 그 직후에 개인의 영향력은 최고 수준에 이른다“와 같은7개 명제들, 일종의 법칙들을 설명한다.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처칠, 드골, 아데나워, 프랑코, 티토, 대처, 고르바초프, 콜

세계사에 관심이 많다면 다들 유명한 인물이라 생각하겠지만, 일반 대중들에겐 히틀러 스탈린의 이름이 가장 친숙할 것이다. 커쇼도 세계사에서 영향력이 가장 컸던 인물로 레닌 히틀러 스탈린을 들고 있다. 책의 내용은 각각의 인물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시대적 조건과 그들의 개성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시대가 개인을 만들까? 시대를 타고나는 것은 레닌의 사례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과 달리 레닌은 러시아 혁명 이전과 혁명 당시에도 인기가 적었다. 망명길에서 러시아에 도달한 것조차 러시아의 혼란을 유도하는 독일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악착같이 기회들을 이용했다. 소수파였던 자신의 당을 다수파(볼셰비키)라고 부르며 정신승리한 것처럼. 그는 트로츠키와 같은 훌륭한 책략가들을 뒀기도 하지만 그의 굴복,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결국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언 커쇼는 민주주의 정권이든 독재자든 상관없이 자기주장이 강한 권력자들은 권력 행사의 제약을 없애려 한다 주장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는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처칠, 대처, 드골은 격동에 시대에서 긴급한 지시를 내리기 위해 민주주의적 절차를 건너뛰는 경우도 있었으나 민주주의 그 자체의 핵심(토의, 절차, 견제)을 없애진 못했다.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의 끝은 무엇인가. 그 모습은 테러를 동원하고 끈끈한 정치 카르텔을 만들었던 히틀러와 스탈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과연 개성만이 문제였을까? 나는 여기서 사회 시스템의 중요성을 본다.

현대 사회에 민주주의가 발달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것이 차선이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를 통해 국가는 최고의 발전을 이룰 수 있지만 최악의 지도자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의 국가 붕괴를 만든다. “헌법적 제약(과 어느 정도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통한 지배는 본질적으로 독재적인 통치보다 파국적 결과를 가져올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훨씬 적다.“, “권력의 집중은 개인의 영향력을 강화하며, 흔히 부정적이고 때로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독재의 다른 문제점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이다. 전시 상황에서 예산 사용과 전략이 효율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의존한다. 융통적 행정이 먹히지 않는다. 그런 모습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형편없는 군사 지도자“임이 증명됐다.

콜, 아데나워, 고르바초프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전시 시대의 인물로, 정치 지도자에겐 군사적 힘이 받쳐줘야 하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처의 정치생명이 포클랜드 전쟁에 달려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중을 사로잡을 다른 능력 혹은 기회가 필요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각자의 핵심 기회들이 존재했다.

지도자는 개성으로 우뚝 서지만 그를 불러내는 것은 시대와 민중이다. 우린 역사를 보면서 시대의 열망을 파악하고, 권력자들을 보면서 권력의 개성적 판단의 시원함을 느끼면서도 독단의 위험성을 인지한다. 사회는 개인을 만들고 개인은 사회를 바꾼다.

“민주주의 체제가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부족해 보일수록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져간다. (사회의 거울인) 의회정치는 민주주의의 어려움 속에 권위주의의 유혹이 잠복해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문제다. 희망을 잃은 사회는 극단적 해결을 갈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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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 세창명저산책 100
박찬국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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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데도 기술이 필요할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읽기>는 에리히 프롬 전문가 박찬국 교수가 <사랑의 기술>을 해설하는 책이다. 한국에 변역된 <사랑의 기술>은 번역본 초판이 1972년에 나와 비교적 딱딱한 표현이 아쉽고, 판권이 독점되어 있어 새 번역을 할 수 없었는데, 세창미디어의 제안으로 풀어 읽기를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사랑은 인간만의 것이라 볼 순 없지만, 인간이 유일하게 이성으로 논할 수 있는 주제이며 그 형태를 다양화 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성욕과 같은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롬은 동물보다 인간이 완전히 우월하거나 행복하다 보진 않는다. 우월은 관점에 따른 것이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이유로 수많은 부정적 고독감, 불안함, 우울함 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프롬이 많은 저작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유에 수반되는 불안'이다. 자유를 얻은 인간은 불안을 느끼고 또 단체에 합류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느낀다. 인간은 '획일성'에서 편안함을 느끼는데, 특히 현대사회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화되었다. 프롬은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말한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자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과 모든 인류 그리고 자연과의 결합을 경험하는 것이다." (p.57)

 

프롬은 병적인 사랑을 비판하면서 사디즘적인 사랑과 마조히즘적인 사랑을 구분한다. 마조히즘적 희생은 자아를 절멸하는 데서, 사디즘적 지배는 타인을 파괴하며 만족을 얻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정반대의 형태를 보이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근본적인 상태, 즉 자신에 대한 불안감과 무력감이 나타나는 두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p.65)

 

또한 프롬은 사랑의 한 유형으로 모성애와 부성애를 언급한다. 그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면서 남성중심적인 심리발달이론을 비판한다.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신에게 사랑받는 가부장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모성과 부성, 둘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소유적 심리로 자식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거나 의존도를 높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모성애의 참된 본질은 아이가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p.82) 갑자기 오은영 박사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우상숭배적 사랑과 감상적인 사랑을 한다. 프롬은 이 둘 모두 비판한다. 사랑은 현실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과 전혀 갈등을 빚지 않을 상대를 발견하고 싶어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갈등은 항상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그러한 갈등을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통해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p.94)

 

프롬은 남성적인 특징과 여성적인 특성을 가진 둘이 서로를 존중하며 합일을 이뤄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말하고 있다. 프롬의 다른 저서에도 강조되지만, 나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곧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사랑은 성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강렬한 감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감정으로 표현되지만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수반하는 것들이 많으며 우리는 이를 고려해야 한다.

 

프롬은 이기주의와 자기애를 구별한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소유로 채우는 것이 아닌 사랑을 실현함으로써 풍족함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기심은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을 배척한다. 증오의 감정은 타인을 향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신을 사랑할 여유가 없다. 그 반대도 똑같다.

 

자본주의적 사고가 발달하면서 사랑 자체에 대한 근본적 사고가 변화했다. 많은 것들이 자본화, 조건화가 되었다. 사랑도 '따져가면서'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우정도, 연인 간의 사랑도 하나의 교환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주는 정도만큼 자신도 주겠다는 것이다." (127p)

 

그는 계속해서 프로이트의 사랑이론을 비판한다. 프롬의 시각에서 인간의 삶은 실존적 욕망과 사회적 성격이 중요한데, 프로이트의 이론에서는 성적욕망을 결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프롬의 날카로운 통찰은 신에 대한 사랑의 설명에서 한 번 더 발휘된다. 사람들은 교회를 찾지만 일상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평소에는 신을 찾지 않다가 위기에만 신을 찾고, 물질적인 필요가 생길 때 신을 찾는다. 현대의 신은 우상숭배적인 모습이 되었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도 습득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신 집중과 깨어 있기의 훈련을 권한다. 불교적 수행법과 거의 동일하다. 우리는 관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된 것 또한 자각해야 한다.

 

사랑은 "자기도취의 극복,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또한 소유 지향적인 이기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스스로를 소유를 통해 나를 채우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유를 통해 나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를 통해 나의 가치를 느껴야 한다. 거기에 더해 인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프롬은 인간은 부나 명성이나 권력을 통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온전히 전개할 경우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롬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 자신의 이성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행동과 그것에 수반되는 만족감'만이 진정으로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쾌락은 일시적으로는 좋은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p.184)

 

내가 프롬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희망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사람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는다.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나의 것을 꺼내서 활용하면서 살아갈 때 사람으로 존재하며 행복할 수 있다. 인간은 현실을 살지만 이상을 꿈꾸는 존재다. 프롬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세창미디어의 세창명저산책은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된 시리즈다. 100번째 명저산책을 출간한 것을 축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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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
이광호 지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기획 / 사회평론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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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노회찬과 관련해서 글을 쓰고 싶었다. 20대인 나는 노회찬과의 접점은 적었지만, 중고등학생 시절 TV 토론에서 노회찬을 보고 난 후 관심을 갖기 시작해 애정 아닌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토론과 연설들을 있는 대로 찾아보며 대학 2학년 시절 ‘현대시창작’과제로 ‘6411버스’와 관련된 시를 쓸 정도였다. 마침 사회평론에서 정식 발매 이전에 <노회찬 평전>서평단을 모집해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뽑아주셔서 표지와 띠지가 없는 가제본을 먼저 보내주셨다. 드디어 노회찬에 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보 정당을 지지해 달라거나 노회찬을 긍정적으로 봐달란 말도 아니다. 그저 그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정치란 무엇인지,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마음이다. 나의 이야기가 불편하다면 넘어가도 무방하다.

나에겐 노회찬이란 인물은 정치인이란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 보게 만든 첫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이다. 그에 대해 뭔가 씁쓸함이 남아있다. 일부러 힘든 길을 선택한 그에게 도움 하나 못 주고 응원만 한 아쉬움이랄까. 이번에 나온 <노회찬 평전은> 노회찬과 함께했던 동료 이광호가 쓴 노회찬 인생 이야기다. 세세하고도 감정이 어느 정도 절제되어 그의 인생이 더 잘 다가왔다. 500페이지가 조금 넘어 생각보다 두껍긴 하지만 간결한 문체와 정보 전달로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정치인 노회찬. 길고 긴, 다사다난한 인생이다. 노회찬은 피난민 부모 아래서 모범생으로 자랐지만 반항정신이 강해 선생님에게 따져 묻기를 잘했으며, 그런 천성으로 학생운동을 시작한 전형적 운동권 국회의원으로, 진보 정당 역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평전에는 그의 정계 입문부터 개혁신당, 국민승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을 거치고 거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는 정치 역사, 특히 진보 역사는 굉장히 정신없이 돌아갔음을 다시 느끼게 했다. 진보 정치에는 위기도 많았다. 보수는 부패하고 진보는 분열해 망한다고 그러지 않나. 특히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때는 분노와 분열의 최고조를 찍었다. 진보 유권자의 희망과 그의 노력을 배신하는 황당한 일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논란을 수습 짓고 총대를 매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해법은 동반 사퇴와 같은, 같은 당 의원도 말리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의 성격은 그랬다. 할 때는 해야 하고 손해 보더라도 하는 것. 그는 어려운 길을 일부러 걷는다고 말했다. 안기부 X파일과 검사들의 이름을 모두 공개한 그의 뚝심은 지금 봐도 놀랍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강한 힘을 주진 않았다. 그가 보루로 삼았던 면책특권은 지금처럼 가볍게 불리는 정쟁의 수단으로 변질될 것이 아니라 노회찬같이 용기 있는 발언을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속적 사회에서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의 모습과 행동이 세련되지는 못했다. 때론 투박했다. 하지만 매우 솔직했다. 또 풍자와 해학이 그의 특징이었다. 많은 국회의원들과도 원만한 사이로 지내면서도 할 말은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런 그는, 나에게 솔직함이 묻어나는 그저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었다. 인간다운 사람이랄까. 사람 냄새가 풍겼다. 흔히 진보 정치를 지지한다는 유권자들이 내세울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노회찬은 2018년 7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당시 정치자금법을 위반해 논란이 일었는데, 그것은 정치인 신분이 아닐 때 받은 정치후원금이 문제가 된 것으로, 구조적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하지만 법 위반은 위반이다. 어쩌겠는가. 그는 그 나름대로, 죽음으로 책임을 졌다. 나는 부고 소식을 듣고 굉장히 허무하고 뭔가 쿵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이 그 존재까지 부정할 문제였을까. 그러나 평소 그의 성격을 유추해 보고, 또 유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 정도였다. 사실 그의 선택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진보 정당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래봤자 손에 꼽고 그래도 희망으로 남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정치는 다툼이라지만, 그 끝엔 공공선으로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증발하는 혐오나 비아냥이 아니라 의견을 말하고, 상대를 납득시키는 것은 고사하더라도 특정 집단이나 나의 의견을 인지하게 만드는 것. 진보 정치엔 일말의 희망이라도 심어줄 수 있는, 해결까진 바라지 않아도 적어도 말로라도 자신의 마음을, 노동자들의 마음을, 억울함을 사회에 인지시켜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노회찬이었다. 우린 그를 통해 6411버스를 타고 다니는 노동자들을 알게 된다.

나는 노회찬이 옳은 말만 했다거나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세련된 엘리트의 모습이나 권위적인 모습보단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고 보통 사람을 대변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나서서 개선하지 못하고 힘 하나 못 보탠 미안함이랄까. 많은 이들이 민주당에 투표를 던져도, 비례대표를 정의당에게 준 이유는 그에 대한 응원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정치라는 영역에 대중의 시선을 끌게 만들고 직관적 이해를 도와 논의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은 많은 이들을 정치혐오로 나아가지 않게 했다. 그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다. 정치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장이다. 다양한 의견은 소음으로 취급받아 목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대에, 풍자조차, 웃음조차 사라져 대립과 혐오만이 남은 이 시대에 더더욱 그리움이 커져간다. 이제야 조악한 글이라도 쓴다. 잘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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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서양 미술사 - 한 장씩 읽고 그리는 서양 미술 히스토리
이케가미 히데히로 지음, 박현지 옮김 / 탐나는책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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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서양사 강좌를 들을 때 반복해서 강조되었던 것은, 서양사 이해에 있어서의 그림의 중요성이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인쇄술 개발 이전에, 사실상 그 이후에도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엔 글보다는 그림으로 대중에게 설명하거나 나타내야 했다. 또 상류층의 전리품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하나의 소유물의 개념이기도 했다. 그만큼 과거에는 미술품이란 귀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동양은 문자 기록이 발달 했다면, 서양은 그림이 발달했다. 그림도 남아있는 역사자료다. 그렇기에 서양사를 배우기 위해서는 서양미술사를 공부해야 한다. 반대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어떤 사회적 영향이 있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는 서양미술사>는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일본인 교수가 간단하게 정리한 미술사 책이다. 일본 특유의 다이제스트 서술이 드러나는데, 핵심적인 것들을 설명하며 하나의 교양 강좌처럼 되어있다. 따로 옆에 도식화까지 했다. 미술사를 보는 관점을 설명하면서, 명화에 숨겨진 특징과 미술 기법의 발전, 전체적인 서양 미술사의 흐름과 암호와 상징들을 해석한다.

 

미술품은 시대와 개인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사회뿐만 아니라 화가 개인에 대해 아는 만큼 그림이 보인다. 특히 중세 시대의 가톨릭 그림, 혁명의 시대의 그림들은 상징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알아야 그림이 이해가 간다.

 

그림은 주관이 투입된다. 화자의 의도에 따라서 원근법이 달라지거나 충분히 배경이 달라지기도 했다. 물론 외압에 의해서 그림에 변형이 있었기도 했지만, 화가 개성의 어느 정도의 허용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이 주관성은 곧 다양성과 발전을 의미했다. 그래서 결과물을 보면서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는 '이 그림을 왜 그렸을까?'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림의 특징부터 사회의 특징까지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의 영향을 크게 본다. 미술은 시대와 함께 간다. 과거의 미술이 상상력의 발현이나 사진의 대체물이었다면, 이제 미술은 일상이자 철학이 되었다. AI가 대회에서 수상하는 이 시대에 주관성, 철학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저자는 중세 시대의 제약을 강조해서 설명한다. 미술사에서 르네상스를 빼놓을 수 없는데, 누가 먼저 중세의 금기(노출이나 세속적 표현의 억압 등)를 깨나 보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에 행해졌던 나체 표현은 중세에 금지된 모습을 보면 사회의 영향의 중요성을 다시 느낄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 화가들의 개성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기존에는 인물화에 집중되어 있던 그림의 장르 또한 다양해졌다.

 

미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이다. 앞서 말했듯 미술을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당대에 예술을 후원하는 쩐주는 당대의 잘나가는 인사였으니 말이다. (메디치가문은 말해모해)

 

이처럼 시대의 편견을 부수고자 하는, 자신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분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것도 묘미다. 우리가 코페르니쿠스, 다윈 혹은 종교개혁가들이 쉽게 의견을 공표하지 못하고 책에만 그 내용을 썼었던 마음을 보듯, 화가들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

 

시대의 제한은 오히려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았을 때 미술의 다양성으로 나타났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본 것이겠지만. 아니면 인간 다양성의 발로가 미술과 표현의 다양성인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린 다양한 작품과 표현으로 다양한 인간과 사고를 본다.

 

과거의 그림은 작가의 의도 해석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면 현재의 그림은 관찰자의 주관적 해석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는듯 하다. 물론 현대미술이란 이도저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만, 그림도 결국 인간 세상 안에 있어 벌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곧 미학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알고 있던 내용들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기회여서 좋았다. 강의의 흐름을 짜는 참고서로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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