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월드 - 심해에서 만난 찬란한 세상
수전 케이시 지음, 홍주연 옮김 / 까치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책을 읽고 나서 한 세계를 경험한, 일종의 경이를 느낄 때가 있다. 어떤 한 세상에 심취해있는 이들의 마음을 엿본다고나 할까. 소설이 아닌 현실은 우리에게 더욱 잘 다가온다. <언더월드>는 해양 전문 저널리스트 수전 케이시가 심해와 심해를 향한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으로, 우리를 저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특출난 이들은 떡잎부터 다르다. 저자 수전 케이시는 어린 시절부터 물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그녀는 심해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는데, 결국 직접 잠수정까지 타게 된다. 그렇게 직접 심해를 보며 그 경이로움을 써 내려간다.


개인적으로 바다에 대해 아는 지식이란 호프 자런의 저서<우리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 언급되는 수준이다. 인간이 증가시킨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흡수되어 바다의 온다가 올라 산호초들이 집단 폐사하고 있으며 빙하가 녹아 해수면 상승은 물론이고 새로운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을 키우며, 해수 온도 상승은 대류 변화와 같은 모습을 만들어 생태계와 기후 위기를 초래한다. 미세 플라스틱을 포함한 해양 쓰레기들이 동물들을 위협하며 이젠 인간의 몸에도 다량의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는 현실이 된 것이다. 현재 해양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은 커지고 있지만, 우리는 해양 그 자체를 잘 알고 있을까? 심해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평가 절하된다. 저자가 언급했듯 심해 연구는 굉장히 부족하고 우주연구에 비해 관심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얼핏 중고등학교때 지구과학에서 배운 내용들이 나온다. 대체로 심해 구조는 섭입과 같은 지각활동으로 인해 형성되는데, 그 모습은 정말로 다양하다. 화산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절벽이 존재하기도 하고, 다양한 생물이 돌아다니며 바닥은 세균더미들로 덮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심해를 모른다. 지금도 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세계 바다의 일부의 해당할 뿐이다.


바다가 애초에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1970년 이후로 바다는 우리가 화석 연료를 태우면서 발생시킨 열의 93퍼센트와 이산화탄소의 30퍼센트를 흡수해왔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진 바다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산성화되고 있으며 그 안의 산소도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현재 의존하고 있는 생태적 균형의 상태는 영구적이지 않다. 우리가 이 균형을 깨뜨리면 바다는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151p


심해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꼼치의 예시를 들어본다. 위 영상은 심해어 꼼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홍색 젤리처럼 생긴 꼼치는 본래 심해어가 아니었지만, 심해로 내려가 진화했다. 단각류를 사냥하며 살지만 수명은 짧다. 꼼치는 부력을 조절하는, 흔히 공기주머니라 부르는 부레가 없다. 대신 "내장은 부력이 있는 투명한 젤에 감싸여 있다. 몸에 광물 성분이 없어서 뼈대가 물렁하고 머리뼈가 완전히 닫혀 있지도 않"지만 수압으로 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심해 생물의 굉장히 신기함을 엿볼 수 있다. 


심해는 산업과 과학의 번성과 함께 관심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작은 괴물과 같은 형상에 대한 두려움 혹은 믿음이었다. 심해에는 생물이 없다는, 포브스의 심해 무생물설이 과학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심해의 증거물들이 쌓이면서 무생물설은 깨지게 되었다. 심해에 대한 관심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는데, 특히 잠수정을 펼쳤던 냉전시대와 심해 케이블을 설치해야 하는 시기에, 또 송유관을 건설해야 하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관심은 '경제적'이익에 한정되어 개발을 위한 연구로 변질되었고, 망가니즈 단괴 발견 이후로 심해를 향한 상업적인 경주가 이어졌다.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해양 채굴을 시도하다 실패한 노틸러스 회사의 사례가 나오지만 채굴을 시도하는 민간회사들은 생겨나고 있으며, 국제기구는 '해양보호'의 의무를 망각하고, 민간에게 개발 권리를 넘겨주는 계약을 벌이고 있다.


인간은 바다를 더럽혀왔다. 해양 쓰레기는 물론이고 책의 곳곳에서 나오는 핵과 화학약품을 품고 있는 전함과 무기들의 흔적은 인간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리아나 해구에서 발견된 에우리테네스 플라스티쿠스는 내장 안에 플라스틱 미세 섬유가 들어있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이외에도 초심해저대 해구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배출한 온갖 독성 물질이 축적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DDT나 납, 수은, 약물 폐기물, 방사성 탄소를 포함한 각종 유해 물질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인류는 무대 위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존재이지만 한 번도 스스로를 조연으로 여긴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 세계는 박광층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하나의 기계와도 같다.

329p


책의 중후반부 대부분은 2인용 잠수함을 개발하고, 직접 조종을 담당하는 베스코프와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저자 수전 케이시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그와 동행하며 잠수정에 탑승할 수 있었고, 그 여정은 다사다난했다. 많은 공학 기술자들이 일정을 맞추고 국가와 민간기업에게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잠수정을 개발해야 했고, 날씨와 운 또한 따라줘야 했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인간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자연의 경이로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지구를, 아니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가 유명한 해양 식물학자 실비아 얼과나눈 대화가 어느 정도의 통찰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있어요." 얼은 말했다. "과거의 우리는 몰랐어요. 50년 전만 해도 모르는 것이 정말 많았잖아요. 이제는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고, 지식이라는 막강한 힘도 갖추고 있죠. 저는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해요. '21세기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땠겠니? 해결책을 모른다면 어땠겠니? 그러나 이제는 둘 다 알고 있지."

372p


책은 어렵게 쓰이지 않았으며, 친절하게 다방면에서 바다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래 유튜브 영상들은 심해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해준다. 책 중간중간 유머와 레이 달리오와 제임스 카메런의 바다 사랑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들도 나오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PaErPyEnDvk?si=vyuyZHzdr50vMJoe

https://youtu.be/9FqwhW0B3tY?si=3yR8bjKBMwvHCAcr


까치글방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저마다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만, 철학과 과학에서는 상당한 논쟁적 주제였고, 지금도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흔히 데카르트의 자기 인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서구의 자아 인식은 그 존재 자체의 유무부터 존재의 조건까지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으로 이루어진다. <아웃사이더>는 이런 자아와 관련된 논쟁을 주로 '뇌'의 기능과 연결시켜 자아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신경과 의사로 일하는 마수드 후세인은 환자들을 진료하며 느낀 점들을 풀어낸다. 환자들은 뇌졸중과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 때문에 일상생활에 차질이 생겨 자아 인식의 어려움을 느꼈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뇌의 상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정체성 또한 결정짓는다. '자아'와 '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책에는 7명의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트래시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는 남편 스티브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시간대가 다른 기억들을 뒤섞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진단받은 내용과 과거의 일을 잊고 되묻기도 했고,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쾌활한 모습을 보였다. 검사를 통해 그녀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숫자의 단기 기억과 공간적 위치의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마루엽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마는 최근의 특정한 일화에 속한 정보들을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이 기억을 어떻게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사람이 기억하는 방식, 특히 단기 기억은 뇌세포(뉴런)들 사이의 연결 강도 변화인 시냅스가 얼마나 튼튼하게 연결되느냐와 관련이 있다. 뉴런들이 서로 만나서 소통하는 지점이 시냅스다. 두 뉴런 사이의 틈새에서 정보가 건너가는데, 이 전기 충격이 화학신호로 전환되어 신호를 주고받으며 특정 뉴런이 자극되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더 먼 과거의 일들은 다른 뇌 영역들에 통합되어 떠올릴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인간이 정보를 자신에게 친숙한 도식에 끼워 넣고 기억을 재창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인간 자체의 기억이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트래시는 과거와 현재의 일을 뒤섞으며 대답했는데,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해마와 마루엽의 손상으로 이런 재창조의 경향이 심해졌고, 기억은 물론이고 시공간적 인식 또한 어려워진 것이다.


트래시는 진료 내내 자신이 괜찮다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의 면담에서 그녀는 너무 두려워서 자신의 병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남편뿐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후세인은 말한다. 트래시가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부정하는 것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고. 그녀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알렸다. 병은 단순히 병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병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사회적 낙인과 연관돼있고, 자신에 대한 신뢰, 자아와 연결된다.


마수드 후세인이 만난 환자들 중에는 적절한 치료제가 있어서 이전의 삶을 되찾은 경우도 있었지만, 치료제가 없거나, 치료제가 효과가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병에 걸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평생을 함께한 연인과 자신의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어떤 마음일까. 모든 병에서 예외가 아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 해본다. 그러다 보면 일종의 씁쓸함과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함이 느껴진다. 저자는 우리가 실제로 몸에 대해 얼마만큼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지도 묻는다. 이 부분에서 인간은 신경계 체제에 놀라움과 더불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트래시의 사례를 들면, 로크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자아에는 기억의 연속성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물을 수 있다. 트래시의 경우처럼 기억을 잃어간다면 자아도 사라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인식론적 질문들에 뇌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라고 할지라도 자아를 반드시 잃지는 않는 경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자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만약 존재한다면 뇌 어디에 있는가, 어떤 부위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 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해나간다.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계보에 속하는 일부 사상가들은 자아가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에 우려를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다른 자아들의 몸과 다른 공간적으로 한정된 대상-즉, 우리 몸-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이 사실이 우리 자신의 지각, 행동, 기억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인지 과정들이 체화한 자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즉, 몸이 없이는 자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25p


동파키스탄 출신의 이주민으로 영국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인 삶을 살았던 저자는 뇌의 기능도 이야기하지만, 사회적 정체성의 중요성에도 집중한다. 인간은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누군가와 가까워짐과 동시에 멀어짐을 느끼며 나의 집단과 너의 집단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의 관찰은 우리가 흔히 배제하며 차별하는 근거가 정말로 뇌의 문제일 수 있다는, 대상의 비자발적 요소이자, 차별이 근거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 또한 전달한다.


우리의 자아는 사실상 이런 다양한 인지 과정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인지과학자이자 인공지능의 개척자인 마빈 민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인지 과정은 마음을 세우는 토대이다. 즉 그것들은 "마음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 "사회"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길 때, 사회는 여전히 존속하지만 다른 사회가 된다. 개인 정체성이 달라진다.


그러나 정체성이 개인 정체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사회 정체성도 자아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본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헨리 타이펠과 존 터너는 사회 정체성이란 우리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을 포함하여 남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인 정체성이 자아("나")와 다른 자아들과의 구분하는 방식을 정의한다면, 사회 정체성은 자 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개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리킨다("우리") 350p


뇌과학을 다루는 책이지만, 매우 이해하기 쉽게 쓰인 책이다. 또한 단순히 질병의 뇌과학을 말하지 않고 자아와 사회적 자아와의 연관성을 찾는 책이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자아란 무엇일까'라는 것은 철학이든 과학이든 정의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뇌의 작동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된 흥미로운 질문들을 7명의 환자의 사례를 바탕으로 책에서 묻고 나름대로 답하고 있으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 까치글방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역사학계의 발전된 연구에 따라서 대항해시대에서의 유럽이 벌였던 잔혹한 이야기들이 밝혀짐에 따라서 비판을 받지만, 최근까지도 대항해시대의 역사는 유럽의 시각에서 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야만의 해변에서>는 유럽중심의 사고가 아닌, 다양한 사료를 통해 인디저너스(인디언이 스스로를 칭하는, 정확한 표기)의 시각에서 대항해 시대를 바라본다. 먼저 호칭,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본 땅이 인도인 줄 알고 붙인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국제연합적 용어로, 가장 중립적인 인디저너스를 선택한다. 인디저너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니 어떤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유럽과 아메리카가 처음 조우할 무렵, 수만 명의 원주민들이 유럽으로 향했다. 헨리 8세를 만났던 "브라질"의 왕부터 브리스틀의 에이번 강에서 오리를 잡았던 이누크인도 있고, 인간 제물로 카를 5세의 궁전에 전시되었던 멕시코인, 죽기 전 까지 런던 술집의 쇼에 세워지고 죽어서는 런던 하트 가의 성 올레이브 성당에 묻힌 이누이트 아기도 있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메스티소msetizo(백인과 인디저너스의 혼혈/역주) 아이들도 있으며, 유럽인 가정에서 노예로 일해야 했던 수천 명의 카리브 해 및 메소아메리카 주민들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 르는 지역과 유럽 사이에 놓인 거대한 바다를 건너고,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4p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유럽인들은 그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벨 여왕은 곧바로 교황에게 자신의 새로운 대륙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것은 하나의 사업이 되어 잔혹성과 함께 무한히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인디저너스는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수동적인 '노예'로서 남아있었을까? 저자는 아메리카라는 공간에서의 역동성 또한 존재했음을 말한다. 그들은 다음의 말처럼 유럽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제국의 특산품이며, 화려한 귀중품, 부자들의 분신, 저 먼 속지의 신비로움이었다. 여기에서 간과된 점, 즉 그들의 신분이 귀족, 외교관, 하인, 통역사, 가족, 연예인, 노예 등으로 다양했다는 점은 근대 초기의 탐험과 제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다. 25p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섬에 도착해 인디저너스를 스페인에 보낸다. 그들은 유럽대륙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납치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의 살길을 찾고자 했으며, 유럽에 끌려간 그들은 자유를 울부짖었다. 단순히 노예로서 정적인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었다. <야만의 해변에서>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들의 처했던 상황을 풀어나간다. 인류학적 책이자, 존재들을 증명하는 책인 것이다. 대항해 시대의 유럽의 민낯과 유럽전역에서 발견되는 인디저너스의 삶을 살펴보자.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2년 11월 30일, Chat GTP가 출시되면서 세간에 놀라움을 선사했다. 기존의 단순한 AI(인공지능) 모델과 다르게 자연스러운 소통을 보여주는 생성형 AI로서 사람들은 큰 인상을 받은 것이었다. 최근엔 중국의 딥시크가 미국 기업들의 모델보다 더 나은 효율성을 보여주며 기술의 발전은 계속해서 폭탄 터지듯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AI에 대한 발전은 흔히 인간을 대체하고 심지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이어지는데,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결할 때에도 사람들은 AI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뿐인가, 1997년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경기에서 가리 카스파로프를 이겼을 때도 사람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나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대체 가능한 인간'이라는 두려움에서 인간의 쓸모를 증명함과 동시에 대체 불가능성을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다움'을 처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학지능>의 저자 주나이드 무빈은 이런 두려움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고, 인간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AI를 인간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온 '도구'로서 받아들여야 하고, 중요한 것은 '기계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저자는 순수과학과 응용수학을 넘나들며 AI 모델의 한계를 파악했는데, 이 책에서 인간과 AI의 사고 차이를 설명하며 아직 AI가 넘어서지 못한 인간만의 사고, 즉 인간만의 수학 지능을 설명한다. 이런 지능까지 AI가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 정확히 파악하자는 의미다.


실제로 인간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고 수천 년간 진보를 거듭해오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상상하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경제를 구축하고 민주주의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우리를 위협하는 기술을 낳았지만, 이 디지털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기술도 역시 이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스템이 바로 "수학"이다.

16p

먼저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수학사이자 인지과학 교양서처럼 흥미롭게 전개된다. 컴퓨터는 짜인 틀대로 계산해 정확한 값을 제공하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모호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핵심이다. 객관적으로 절대적으로 나눠진 무엇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겐 사물을 4개까지 인식(구분) 가능한 정확한 수 감각이 있지만 더 큰 수를 처리하지 못하는 대신 큰 수를 처리할 때 자연적으로 정밀한 연산이 아닌 어림짐작을 사용하는 근사 수 감각이 있다. 일정 수준 이상 숫자가 커지면 인간은 어림짐작을 하게 된다. 우리가 수학을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숫자(체계)는 어떤 상징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문화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수학적 사고가 환경과 언어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추상의 힘으로 적은 숫자만을 계산할 수 있는 인지적 한계를 극복했다. 어찌 됐든 수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도구가 개발되었다는 의미다. 저자는 우리가 수를 파악할 때 어떤 한계를 맞이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도구(표상 혹은 추상)들을 발전시켰는지 로그, 지수 등의 예시를 들며 수학적 계산의 역사를 설명한다.


수와 수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든 더 추상적인 종류의 지식이든 그러한 지식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

93p

AI 연구자들은 각 모델마다 규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항상 완전히 지정된 규칙만으로 파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광대하고 복잡했다. 하나의 모델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는 것이다. 계산된 값을 다른 분야에도 상호 적용하며 답을 찾아야 했는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만든 것이다. AI는 문맥이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결괏값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으며, 다양한 결과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만약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어도 인지하지 못한다. 컴퓨터 그저 "규칙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컴퓨터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만 답을 찾는다. 기계가 스스로 목표를 정의하려면 일단은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213p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바꾸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그 말은 즉 "표상을 전환하며 여러 관점을 융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미덕이라고 말한다. 반사실적 추론을 통해 "만약에"라는 질문이 가능한데, 그러한 질문을 통해 무리수나, 0, 허수의 발견(혹은 발명)으로 이어졌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선입관과 물리적 규범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답보다 중요한 것이 질문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학습 프로그램은 아주 약간의 수학적 개념을 포착한 후 이를 토대로 모든 사고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계는 수학이 베푸는 다양한 표상들을 놓치게 된다. 또한 수학자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모형을 배제해야 할 시점을 판단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러한 억제력을 보이지 않는다. 

135p

우리는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학습 과정을 설계하고, 적절한 난이도의 과제를 파악하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는 지식의 습득을 조절한다.

280p

여기서 AI가 가질 수 없는 인간 특유 주체성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며 해결하고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며 목표를 해결하며 멈추지 않는다.


기계학습 프로그램은 아주 약간의 수학적 개념을 포착한 후 이를 토대로 모든 사고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계는 수학이 베푸는 다양한 표상들을 놓치게 된다. 또한 수학자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모형을 배제해야 할 시점을 판단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러한 억제력을 보이지 않는다. 

135p

AI가 하는 일이 정해져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이 둘은 협력 관계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AI가 계산 영역에서 사용되고, 인간이 방향을 제시하고 융합시킬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저자는 개미의 협동 사례를 들면서 인간 협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개미는 환경에 맞춰 집단과 소통하며 자신의 역할을 바꾸면서 일을 해나가는데, AI 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모델들의 협동이 더 좋은 성능을 낸다는 것이다. "인지적 다양성의 힘은 특정 상황에 대해서 각 모델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표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온다." (303p) 우리가 세상이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표상이 다양할수록 도구가 많아진다는 의미이며 문제 해결의 정확도는 더욱 올라간다. 다양한 표상을 교차시키고 또 다른 생각을 낳음으로써 해결책을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AI가 아직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다.


최근  AI의 발전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알게 된 사실은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어떤 게임이 그러한 전형으로서 최상의 척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42p

저자가 말하는 '인간다움'의 특징, 애초에 AI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만의 특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떤 안도를 느낄 수도 있지만, 저자의 말에선 인간 사고 특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인간 사고의 가치는 컴퓨터와 같은 계산이나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정보들의 종합적인 압축을 통해 표현하는 것과 다양한 표상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표출하는 그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고립된 단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도구를 통해 표출된다. 숫자 표상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아름다움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인간다움은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책이 전하는 시사점의 핵심은 책의 후기에 나오는 듯하다. 결국 우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있는가, 어떤 "의식적인 선택"을 하느냐,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서 수학을 포함한 파생되는 기술들까지 바뀌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이 중요하냐에 따라서 그와 관련된 수학적 기술 혹은 표상들이 개발되었다. 기술은 혼자 발전하지 않는다. 한편 인간은 협력이라는 또 하나의 인간적 특징을 통해 다양한 상호보완적인 도구를 개발하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러므로 저자의 결론은 다양성을 강조하는, 창발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향점은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향점과 목표는 인간이 설정하며 그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은 기계가 풀어나가기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다. 세상을 정확히 표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인간의 지능으로 만들어낸 지능이 과연 세상을 정확히 '풀어'나갈 수 있을까? 그저 특정 목적을 가진 또 하나의 도구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닐까?


수학의 질문과 답은 오늘날 가장 똑똑한 기계조차 방향을 찾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하고 탐구해야 할 내용은 너무 깊다.

321p

이 책을 읽고 나는 GPT와 생각보다 길게 대화를 나눴다.(물론 더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주요한 것만 캡처해 본다.) 통상적으론 AI의 한계점이 6개로 요약되는데, 나는 AI는 탄생의 근거가 유한한 '인간의 정보'임과 동시에 존재 목적 자체가 도구적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 선을 넘어가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도 더 이상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인간과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이고, 한편으론 인간의 수학 지능뿐 아니라 사회, 정의적 지능 또한 시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 탐구에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궤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vsAI의 관점에서 주체성을 가진 인간을 긍정한다. 인간만의 지능을 긍정할지라도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고려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라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협력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AI의 모습이 AI의 강한 힘들 가진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나누는 모습 또한 인지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세상을 인식한다는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리는 보통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천사들의 엄격함>의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말한다. 그는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의 주장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저지르는 실수들을 문학, 과학, 철학의 관점을 통해 설명한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세 명의 인물은 인간의 편견을 뒤집어 문제를 해결했다.


먼저 핵심을 말하자, 우리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거름망을 거친다.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부여하여 형성된 직관을 오성이 정리한다. 그리고 이성이 이를 다룬다. 자, 그렇다면 실재는 그자체로, 그러니까 모든 것인 실재가 그대로 인간에게 와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틀을 거쳐 변형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틀'은(특히 시공간이 실재한다 여기는 틀) 항상 옳은 것일까? 진리의 도구일까?


우리는 우리만의 도구, 나쁘게 말하면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생산해 나가느냐의 문제에서 도드라진다. 그것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이 벌인 양자역학 논쟁과 칸트의 객관적 지식에 대한 연구에서 나타난다.

지식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지만, 실재의 궁극적 성질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27p

먼저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습성을 살펴보자.


젊은 시절 사랑을 하며 갈등을 겪고 이별 후 고통의 시간을 보낸 보르헤스는 언어의 근본적 한계를 초월 수 있는 사랑과 존재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뒤이어 그는 애인 노라 랑헤를 잃은 후 제논의 역설에 사로잡혔는데, 제논의 역설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가는데, 거북이와의 거리를 계속해서 쪼개서 따라가는 것으로 사고하면 결국 추월하지 못하는 역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흐르는 것, 연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해결하려 했지만 보르헤스는 그것을 해결이 아닌 해석이라 하며 '이 문제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제논의 역설에 나오는 경주 방식을 상상해서 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며 이들은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시공간을 쪼갤 때 멋대로 연속성을 부과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거주하는 시공간상의 실재가 견고하고 연속적이라는 우리의 가정 때문에 제논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150p) 보르헤스는 시간과 공간, 인과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시공간상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잃어버리는, 지식과 세계의 단절을 경험하는 인물들을 창작한다.


그는 인간이 꿈을 꿔왔다고 말한다.(이는 우리는 환각을 경험한다는 말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계가 공간상으로 고정되어 있고 불가사의하며 눈에 보이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신강상으로 영속적이라고 꿈꿔왔다."고. 그러나 이것이 헛것이라는 균열 또한 허용했다고 말하며 칸트를 암시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왜 실재가 우리의 관찰 및 측정과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느끼냐는 것이다. 


저자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을 써가면서 변화한 사고를 보여준다. 칸트는 지적 세계와 감각할 수 이는 세계를 별개의 영역으로 두었지만, 두 주장의 극단적인 근거를 거부하면서도 둘을 연결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모순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과연 객관적 지식이 가능할까?를 연구하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발견하게 되고, 이 틀을 비판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알게 되는가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공통된 하나의 기본적인 가정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세계 그 자체라는 가정이었다. 그는 이제, 실제로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우상에 복종하던 관행을 마침내 몰락시킬 새로운 "비판의 시대"가 탄생할 것이다. 후세는 여기에 계몽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163p

의식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통합성에 불과하며, 이 통합성으로부터 내가 지각한 것들을 스스로 정돈하고 판별할 때 잣대가 되는 시간선이 생겨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공간, 즉 우주는 물체를 서로 구별하고 정돈하는 데에 필요한 관념일 뿐이다. 

165p

인간의 사고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과 공간을 관념으로 치부하는 굉장히 혁신적인 생각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전자들의 움직임이 문제가 된다. 뉴턴의 법칙에서는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그 물체에 가해지는 힘들을 완벽하게 알면 미래에 일어날 모든 위치와 운동량을 완벽하게 알 수 있"었지만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하나를 확실히 알면 하나를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불확정성이라는 문제로,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지만, 둘 다 알 수는 없다는 의미다. 보어나 슈뢰딩거는 고전물리학의 방식을 사용해 설명하려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사고를 반대했다. 그는 입자들이 측정될 때까지 실제로 확정된 경로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이중슬롯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은 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포함해 확률론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접근방식을 거부한 아인슈타인도 기존의 고전물리학을 뒤집는 추론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 모든 사람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 즉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구체적인 특성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배경이라는 것을 무시하기로 결심했을 때, 상대성 이론을 가능하게 한 혁명적 통찰이 떠올랐다. 하이젠베르크가 그와 비슷한 추론을 사용했을지 모른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이 젊은이의 비유를 단박에 거절했다.

230p


관찰되기 전까지 모른다. "후에 불확적성 원리라고 알려지게 된 이 원리는 현재 순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단지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연적,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했다." (20p) 어떤 관찰이든 그것은 그 대상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한다. 오로지 현재 순간에 빠지면 무엇도 관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양자 냄비가 끓지 않는 경우처럼 위와 같은 결과가 역설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가 실재에 대한 기대ㅡ실재는 단일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라는 기대ㅡ를,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일 뿐인 관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뒤 실재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면 놀란다. 한 관찰이 다른 관찰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놀라는 이유는 그관찰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실재는 통합성을 유지한다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잘 곱씹어보자. 거꾸로 보라는 소리다. 우리가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특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 뿐인데, 여기에 실재가 연속적일 거라는 기대를 하니 놀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속적이라는 개념을 대상의 속성으로 여겨버린다.

우리의 관찰은 지금의 흐릿함, 시공간의 연속체를 항상 수반하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런 뒤 우리는 그 연속체를 관찰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의 속성으로 돌리고, 그 결과에 놀란다.

256p

관찰은 시공간상의 사건들을 연결 짓기 때문에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피하지 못한다. 우리가 마음을 펼쳐 모든 것을 감싸안을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포괄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즉 관찰 그 자체에 내재된 한계에 부딪힌다. (...) 우리가 우주에 부여하는 그 모든 실재성에도 불구하고, 그 우주는 인간의 구성물이다.

257p

결국 실재성에 다가가지 못하는 인간은 실재를 가정하며 환각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인간의 이런 인식적 한계를 단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에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에 힘을 싣는다. 과학은 우리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잘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잘 작동하는 것은 우리가 눈앞의 이론을 기꺼이 시험하고, 우리가 바라거나 보기를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간에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찰과 실험이 이론을 계속 뒷받침 하는 한에서만 그 이론이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언제든 내놓을 수 있다. 어떤 지식도 도그마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과학자가 원칙상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해도 우리 주위에는 무의식적인 편향이 넘쳐난다. 일례로 로벨리가 형이상학적 편견이라고 명명한 것이 있다. 실재가 바깥에, 우리와의 상호작용과 독립해서 존재하며, 그 존재 방식이 지구 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삶 과 일치한다는 믿음이다. 공간상 펼쳐져 있고 시간상 연속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믿음, 세계가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이 욕구는 대단히 강해서 그것을 뒷받침하기만 하면 어떤 구성 개념도 무모 하지 않다고 본다.

371-372p

그렇다고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제거한다거나, 관찰자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시공간적인 가정들을 고려하며, 다른 이해 방법을 찾아보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100% 어떤 한 지점에 도착하면 되려 알 수 없어지는 모순에 봉착한다. 위의 이야기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관찰에서든 관찰자와 그의 이론, 그가 세계를 보는 방식, 직관의 필수 형식은 관찰의 핵심 자리에 있으며,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최선의 방책은 그것들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경험이 가능한 모든 경험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시공간적인 경험에 적합한 가정을 계속 유지하면 길을 잃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론 학자들이 우주의 끝, 그리고 창조의 맨 처음 순간으로 관심을 돌렸을 떄 발견한 진실이다.

252p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덧없는 것들에서부터 인간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입자 덩어리에 이르기까지 시간 속에 놓인 모든 실체의 본성은 항상, 그리고 오로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고 이해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물리학과 논리학의 법칙에서 인간의 관계까지 그 지평을 넓힌다.

우리는 저 너머의 진실을 알 자격이 있을까? 아니, 그것에 집착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있다는 건, 관계를 맺고있다는 의미일 것이며

지식과 도덕적 옳고 그름도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사고 틀, "형이상학적 편견"을 한 번 더 강조하며 글을 마친다.

어떤 결과를 볼 때 우리는 바깥에서, 즉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 영속적인 세계에서 원인을 구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세계는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거기에는 실제로 엄정함이 있다. 하지만 우 리가 그 엄정함을 만든 체스 장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놓아 주어야 한다. 실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37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