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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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에서 보통 고전들을 읽지만 요즘 베스트셀러가 어떠한지, 사람들이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주기별로 베스트셀러를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해 읽고 있다. 그리고 이번엔 성해나의 <혼모노>를 골랐다. 도서관에서 대여하려고 했는데, 예약 순번이 7번째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결국 독서모임 조원분이 책을 사서 읽은 후 나에게 보내주셨다. 먼저 말하지만, 내 글의 제목은 배우 박정민이 쓴 추천사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를 읽고 따온 것이다.

소설집 <혼모노>의 소재들은 한국적이고 흥행으로의 주제의 매력도는 높다. 전반적으로 무당이나 토속신앙, 풍수지리, 정과 같은 동양적 요소들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핵심을 먼저 말하면 깊이는 없다. 잔여감도 없고 찝찝함조차 없다. 굉장히 소재의 미적인 포인트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텔링은 있지만 애착이 가는 인물이 없다. 통일성도 부족하다. 특히 혼모노의 주인공은 자신이 신빨이 떨어졌지만 기도를 드리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며 열등감이 지배하면서도 핵심 고객을 뺏어간 어린 무당에게 일종의 연민을 느끼면서도 신(할멈)을 원망하고 할멈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가짜가 되었다는 울분을 푸는 것인지 광기가 가득한 작두 타기를 시전한다. 독재 정권에 부역하면서도 인간성을 말하며 제자의 사고를 비판하는 <구의집>의 여재화의 말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인물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지만 몰입도가 떨어지며 그 모습들을 이어줄 서사가 부족했다. 더불어 조금 더 나아가서 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또한 부족했다.

현실적이고 일상의 흥미로운 사건과 배경을 소재로 삼고 그 사이로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그저 단편집일 뿐인 느낌이다. 나는 스토리들이 조금 더 깊고 확장되었으면 하길 바랐다. 읽으면서 계속해서 느낀 것은 스토리의 핵심 포인트들을 짜놓고 내용을 욱여넣는 느낌이었다. 또한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들을 자극적이지 않게 현실과 화해시킨다. 그러니 미적 포인트가 강조되고 그 내면의 심리와 갈등이 부각되지 못한다. 소설이 나름대로 잘 쓰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일상적 소재와 더불어서 기술적 요소들을 잘 배치했기 때문이다. 소설 <우호적 감정>에서의 딤섬, <혼모노>에서 작두, <스무드>의 뱃지와 같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사물들이 감정을 담아냈지만 그저 어디까지나 기술적 느낌이 들 뿐이다. 그러니 소설들이 비슷한 느낌을 띈다.

작가 본인의 의견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은 중립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 개인의 감정과 사고가 어느 부분에서라도 드러나며 저자의 의도라는 것이 대강이라도 그려지기 때문이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했던가? 해설에서는 굉장히 장황하게 소설의 포인트들을 짚어낸다. 특히 <구의집>을 설명하면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언급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거대한 살육 체계에서의 기구'로서의 부역자가 아니라, 고문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여재화와, 그 설계를 제자에게 맡긴 사건으로 축소되어 그려진다. 해설의 말이 옳다면, 아이히만의 스토리에서 그 형식만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비판의 포인트가 다른 것이, 여재화는 자신이 제자에게 그 일을 맡겨놓고, 즉 목표 전달자가 된 후에 갑자기 제자가 목표에 맞게 잘 설계한 것에 대해 인간성을 대입하며 평가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문제는 제자가 아이히만이 된 것이 아니라, 여재화가 아이히만의 요소를 가지고 인간성을 챙기는 척하는 모순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비판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부역한 사람은 처벌도 받지 않은 채로, 어떤 흐릿한 과거의 한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것도 아는 사람만 아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현대 소설이라면 '남영동 대공분실'보다 차라리 <길티클럽>처럼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른 소재를 가져오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보다 더 효과적으로 인간의 '무사유'를 다룬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해설은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았으나 깊이 들어가서 까발려 놓는 것은 작가의 몫이지 독자의 몫은 아니다. 작가가 <혼모노>를 읽고선 역사적 사건을 찾아볼 것 같은가? 한강의 소설을 <혼모노>에 갖다 대는 것은 결례될 정도지만 둘을 비교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될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견이 한스푼이라도 담겨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되려 <스무드>에서 언급된 제프 쿤스와 같은 작품이 된다. 그저 현대적 방망이로 두드려 만든 스무드하게 읽히는 소설인 것이다.

그럼에도 <스무드>에서 어느 정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한국계 이민자 3세대로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은 주인공이 태극기 부대 사이에 들어가서 미국인의 상징이 됨으로써 나름의 호의를 받는 것으로, '그들'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길 시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까발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 내에서 받는 호의'로 둔갑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시도해야 할 것은 그들 사이로 들어가길 시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공유하고 있고 기초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독자도 어려움을 느낄 필요도 없다. 우리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너와 나, 그들와 우리를 구분하는 것은 끝없이 이어져온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 소설집 <혼모노>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어느 정도 잘 풀리지 못한 느낌이 든다. <길티클럽>에서 보이던 친절함과 쉬운 공감력이 <메탈>에선 불친절로 다가온다. <메탈>에선 소재 선정도 흔하다는 문제가 있지만, 자신들만의 가수들의 나열로 여겨지고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나의 글로, '그들'만의 이야기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길티클럽>에선 용어에 대한 각주로 친절히 설명까지 했는데 말이다. 또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사고방식을 나의 방식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저 아는 척하는 부르주아의 소설이 된다. 집단 내에서의 나름의 서사를 인지하고 갈라지는 지점을 파악하는 저자의 강점을 더욱 잘 살릴 수 있으면 좋겠다. 성해나의 특징이 관찰적 서사나 감정의 절제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단순한 관찰은 그저 사실 나열일 뿐이며, 소설의 강점을 담아내지 못할 뿐이다. 시도를 했으면 나아가야 한다. 독자에게 찜찜함을 남겨줄 정도로.

잠시 혼모노를 혼모노라는 틀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해 보자.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본인이 진짜임을 자처하며 타인을 밀어내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엇인가 엄청나게 바라고, 집착하는 것은 내 속에 그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지식들이 채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딸에 대한 통제권에서 고부와 갈등을 겪는 내용인 <잉태기>에서는 진짜 내가 엄마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물론 동서양 사고관의 충돌이나 고부갈등 등의 쟁점들도 존재한다), 엄마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내 아기라는 소유욕이 매우 강조된다. 욕망, 고부에게 욕지거리까지 하게 되는 그 욕망. 그것이 애초에 '진짜와 가짜'라는 틀을 만들어 내는 기제인 것이다. <혼모노>에서도 진짜 팬인가 아닌가의 구분을 넘어서면 연예인이 잘못을 저질러도 옹호하는 '팬으로서의 콩깍지'가 씌는 부분이 강조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가'라는, '경계'에 대한 의식보다 '개인에게 무엇이 빠져나가고 채워지는가'가 핵심 포인트로 읽혔다. 오히려 진짜와 가짜의 구분으로 흔한 포인트를 잡으면 소설의 매력도를 한층 떨어트리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 속에 어떤 지향성이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있는 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의집>에서 말한 인간성이라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신빨이 떨어져 다른 무당을 질투하는 것, 회사 직원이 프로젝트 때문에 시골에 내려가서 갈등을 겪는 것,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 건물 계단을 나선형으로 건설한다는 것과 특이하게 계산된 건물을 지었다는 설정, 학창 시절 메탈에 빠지는 스토리는 다른 매체에서도 소개되거나 이용된 설정이다. 물론 흔한 소재도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지만, 내가 왜 성해나의 특별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매력도가 떨어진다. 또한 등장인물들에게 해외의 정체성을 계속 섞는 것은 조금 혼탁한 느낌이 든다. 앞선 세 소설을 위해 작품성이 아쉬운 소설들을 뒤에 채운 느낌도 난다. 어떤 의미로는 '잘 쓴다' 혹은, 잘 읽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겠다. 대중소설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른 의미로의 '잘 쓴다'는 것은 모르겠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질 좋은 작품들이 많은데, 차라리 나는 넷플릭스를 보겠다. 18,000원보다 저렴하게. 가끔은 과한 추천사가 소설의 매력도를 더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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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월드 - 심해에서 만난 찬란한 세상
수전 케이시 지음, 홍주연 옮김 / 까치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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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읽고 나서 한 세계를 경험한, 일종의 경이를 느낄 때가 있다. 어떤 한 세상에 심취해있는 이들의 마음을 엿본다고나 할까. 소설이 아닌 현실은 우리에게 더욱 잘 다가온다. <언더월드>는 해양 전문 저널리스트 수전 케이시가 심해와 심해를 향한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 책으로, 우리를 저 미지의 세계로 이끈다. 특출난 이들은 떡잎부터 다르다. 저자 수전 케이시는 어린 시절부터 물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 그녀는 심해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는데, 결국 직접 잠수정까지 타게 된다. 그렇게 직접 심해를 보며 그 경이로움을 써 내려간다.


개인적으로 바다에 대해 아는 지식이란 호프 자런의 저서<우리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에서 언급되는 수준이다. 인간이 증가시킨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흡수되어 바다의 온다가 올라 산호초들이 집단 폐사하고 있으며 빙하가 녹아 해수면 상승은 물론이고 새로운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을 키우며, 해수 온도 상승은 대류 변화와 같은 모습을 만들어 생태계와 기후 위기를 초래한다. 미세 플라스틱을 포함한 해양 쓰레기들이 동물들을 위협하며 이젠 인간의 몸에도 다량의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는 현실이 된 것이다. 현재 해양오염에 대한 문제의식은 커지고 있지만, 우리는 해양 그 자체를 잘 알고 있을까? 심해는 보이지 않기에 더욱 평가 절하된다. 저자가 언급했듯 심해 연구는 굉장히 부족하고 우주연구에 비해 관심도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얼핏 중고등학교때 지구과학에서 배운 내용들이 나온다. 대체로 심해 구조는 섭입과 같은 지각활동으로 인해 형성되는데, 그 모습은 정말로 다양하다. 화산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절벽이 존재하기도 하고, 다양한 생물이 돌아다니며 바닥은 세균더미들로 덮혀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심해를 모른다. 지금도 안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세계 바다의 일부의 해당할 뿐이다.


바다가 애초에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렵다. 1970년 이후로 바다는 우리가 화석 연료를 태우면서 발생시킨 열의 93퍼센트와 이산화탄소의 30퍼센트를 흡수해왔다. 이런 어마어마한 부담을 짊어진 바다는 점점 더 따뜻해지고 산성화되고 있으며 그 안의 산소도 줄어들고 있다. 우리가 현재 의존하고 있는 생태적 균형의 상태는 영구적이지 않다. 우리가 이 균형을 깨뜨리면 바다는 우리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151p


심해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지만, 대표적으로 꼼치의 예시를 들어본다. 위 영상은 심해어 꼼치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홍색 젤리처럼 생긴 꼼치는 본래 심해어가 아니었지만, 심해로 내려가 진화했다. 단각류를 사냥하며 살지만 수명은 짧다. 꼼치는 부력을 조절하는, 흔히 공기주머니라 부르는 부레가 없다. 대신 "내장은 부력이 있는 투명한 젤에 감싸여 있다. 몸에 광물 성분이 없어서 뼈대가 물렁하고 머리뼈가 완전히 닫혀 있지도 않"지만 수압으로 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심해 생물의 굉장히 신기함을 엿볼 수 있다. 


심해는 산업과 과학의 번성과 함께 관심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작은 괴물과 같은 형상에 대한 두려움 혹은 믿음이었다. 심해에는 생물이 없다는, 포브스의 심해 무생물설이 과학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심해의 증거물들이 쌓이면서 무생물설은 깨지게 되었다. 심해에 대한 관심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는데, 특히 잠수정을 펼쳤던 냉전시대와 심해 케이블을 설치해야 하는 시기에, 또 송유관을 건설해야 하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그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관심은 '경제적'이익에 한정되어 개발을 위한 연구로 변질되었고, 망가니즈 단괴 발견 이후로 심해를 향한 상업적인 경주가 이어졌다.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해양 채굴을 시도하다 실패한 노틸러스 회사의 사례가 나오지만 채굴을 시도하는 민간회사들은 생겨나고 있으며, 국제기구는 '해양보호'의 의무를 망각하고, 민간에게 개발 권리를 넘겨주는 계약을 벌이고 있다.


인간은 바다를 더럽혀왔다. 해양 쓰레기는 물론이고 책의 곳곳에서 나오는 핵과 화학약품을 품고 있는 전함과 무기들의 흔적은 인간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마리아나 해구에서 발견된 에우리테네스 플라스티쿠스는 내장 안에 플라스틱 미세 섬유가 들어있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이외에도 초심해저대 해구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배출한 온갖 독성 물질이 축적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DDT나 납, 수은, 약물 폐기물, 방사성 탄소를 포함한 각종 유해 물질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인류는 무대 위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존재이지만 한 번도 스스로를 조연으로 여긴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창조했고 그 세계는 박광층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하나의 기계와도 같다.

329p


책의 중후반부 대부분은 2인용 잠수함을 개발하고, 직접 조종을 담당하는 베스코프와의 이야기로 이루어진다. 저자 수전 케이시는 여러 프로젝트에서 그와 동행하며 잠수정에 탑승할 수 있었고, 그 여정은 다사다난했다. 많은 공학 기술자들이 일정을 맞추고 국가와 민간기업에게 지원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잠수정을 개발해야 했고, 날씨와 운 또한 따라줘야 했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인간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자연의 경이로움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지구를, 아니 우리를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저자가 유명한 해양 식물학자 실비아 얼과나눈 대화가 어느 정도의 통찰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있어요." 얼은 말했다. "과거의 우리는 몰랐어요. 50년 전만 해도 모르는 것이 정말 많았잖아요. 이제는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고, 지식이라는 막강한 힘도 갖추고 있죠. 저는 아이들한테 이렇게 말해요. '21세기의 인간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어땠겠니? 해결책을 모른다면 어땠겠니? 그러나 이제는 둘 다 알고 있지."

372p


책은 어렵게 쓰이지 않았으며, 친절하게 다방면에서 바다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래 유튜브 영상들은 심해에 대해 매우 잘 설명해준다. 책 중간중간 유머와 레이 달리오와 제임스 카메런의 바다 사랑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들도 나오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https://youtu.be/PaErPyEnDvk?si=vyuyZHzdr50vMJoe

https://youtu.be/9FqwhW0B3tY?si=3yR8bjKBMwvHCAcr


까치글방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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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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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다.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저마다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만, 철학과 과학에서는 상당한 논쟁적 주제였고, 지금도 논쟁은 이어지고 있다. 흔히 데카르트의 자기 인식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서구의 자아 인식은 그 존재 자체의 유무부터 존재의 조건까지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으로 이루어진다. <아웃사이더>는 이런 자아와 관련된 논쟁을 주로 '뇌'의 기능과 연결시켜 자아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신경과 의사로 일하는 마수드 후세인은 환자들을 진료하며 느낀 점들을 풀어낸다. 환자들은 뇌졸중과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 때문에 일상생활에 차질이 생겨 자아 인식의 어려움을 느꼈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했다. 뇌의 상태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 정체성 또한 결정짓는다. '자아'와 '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책에는 7명의 다양한 환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기억을 잃어가는 트래시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녀는 남편 스티브를 다른 존재로 인식하고 시간대가 다른 기억들을 뒤섞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진단받은 내용과 과거의 일을 잊고 되묻기도 했고,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고 쾌활한 모습을 보였다. 검사를 통해 그녀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 숫자의 단기 기억과 공간적 위치의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마루엽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마는 최근의 특정한 일화에 속한 정보들을 통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이 기억을 어떻게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해마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사람이 기억하는 방식, 특히 단기 기억은 뇌세포(뉴런)들 사이의 연결 강도 변화인 시냅스가 얼마나 튼튼하게 연결되느냐와 관련이 있다. 뉴런들이 서로 만나서 소통하는 지점이 시냅스다. 두 뉴런 사이의 틈새에서 정보가 건너가는데, 이 전기 충격이 화학신호로 전환되어 신호를 주고받으며 특정 뉴런이 자극되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더 먼 과거의 일들은 다른 뇌 영역들에 통합되어 떠올릴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인간이 정보를 자신에게 친숙한 도식에 끼워 넣고 기억을 재창조한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 인간 자체의 기억이 허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트래시는 과거와 현재의 일을 뒤섞으며 대답했는데,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해마와 마루엽의 손상으로 이런 재창조의 경향이 심해졌고, 기억은 물론이고 시공간적 인식 또한 어려워진 것이다.


트래시는 진료 내내 자신이 괜찮다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의 면담에서 그녀는 너무 두려워서 자신의 병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남편뿐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후세인은 말한다. 트래시가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부정하는 것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고. 그녀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알렸다. 병은 단순히 병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병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사회적 낙인과 연관돼있고, 자신에 대한 신뢰, 자아와 연결된다.


마수드 후세인이 만난 환자들 중에는 적절한 치료제가 있어서 이전의 삶을 되찾은 경우도 있었지만, 치료제가 없거나, 치료제가 효과가 없을 정도로 병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 질문하게 된다. 병에 걸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평생을 함께한 연인과 자신의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전과 달라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어떤 마음일까. 모든 병에서 예외가 아닌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생각 해본다. 그러다 보면 일종의 씁쓸함과 인간 존재에 대한 측은함이 느껴진다. 저자는 우리가 실제로 몸에 대해 얼마만큼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지도 묻는다. 이 부분에서 인간은 신경계 체제에 놀라움과 더불어 겸손해질 수 밖에 없다.


트래시의 사례를 들면, 로크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한 것처럼 자아에는 기억의 연속성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인지 물을 수 있다. 트래시의 경우처럼 기억을 잃어간다면 자아도 사라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런 인식론적 질문들에 뇌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라고 할지라도 자아를 반드시 잃지는 않는 경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자아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부터 만약 존재한다면 뇌 어디에 있는가, 어떤 부위가 어떤 작용을 하는가 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해나간다. 


데카르트에게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계보에 속하는 일부 사상가들은 자아가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에 우려를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다른 자아들의 몸과 다른 공간적으로 한정된 대상-즉, 우리 몸-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이 사실이 우리 자신의 지각, 행동, 기억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인지 과정들이 체화한 자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즉, 몸이 없이는 자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325p


동파키스탄 출신의 이주민으로 영국에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인 삶을 살았던 저자는 뇌의 기능도 이야기하지만, 사회적 정체성의 중요성에도 집중한다. 인간은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누군가와 가까워짐과 동시에 멀어짐을 느끼며 나의 집단과 너의 집단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의 관찰은 우리가 흔히 배제하며 차별하는 근거가 정말로 뇌의 문제일 수 있다는, 대상의 비자발적 요소이자, 차별이 근거가 없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 또한 전달한다.


우리의 자아는 사실상 이런 다양한 인지 과정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인지과학자이자 인공지능의 개척자인 마빈 민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인지 과정은 마음을 세우는 토대이다. 즉 그것들은 "마음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 "사회"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길 때, 사회는 여전히 존속하지만 다른 사회가 된다. 개인 정체성이 달라진다.


그러나 정체성이 개인 정체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사회 정체성도 자아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본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헨리 타이펠과 존 터너는 사회 정체성이란 우리가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을 포함하여 남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개인 정체성이 자아("나")와 다른 자아들과의 구분하는 방식을 정의한다면, 사회 정체성은 자 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개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리킨다("우리") 350p


뇌과학을 다루는 책이지만, 매우 이해하기 쉽게 쓰인 책이다. 또한 단순히 질병의 뇌과학을 말하지 않고 자아와 사회적 자아와의 연관성을 찾는 책이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자아란 무엇일까'라는 것은 철학이든 과학이든 정의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뇌의 작동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된 흥미로운 질문들을 7명의 환자의 사례를 바탕으로 책에서 묻고 나름대로 답하고 있으니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 까치글방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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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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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역사학의 진전된 연구에 따라 대항해시대의 유럽의 잔혹성이 비판을 받고 있지만, 최근까지도 대항해시대의 역사는 유럽의 시각에서 쓰일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런 시각은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야만의 해변에서>는 유럽중심의 사고가 아닌, 다양한 사료를 통해 인디저너스Indigenous(인디언이 스스로를 칭하는 정확한 표기)의 시각에서 대항해 시대를 바라본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본 땅이 인도인 줄 알고 붙인 이름이었다. 이 책에서는 먼저 원주민의 명칭의 문제를 건드리며 시작하는데, 국제연합적 용어로, 가장 중립적인 인디저너스(Indigenous)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인디저너스.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아니 어떤 삶을 살아야만 했을까.

유럽과 아메리카가 처음 조우할 무렵, 수만 명의 원주민들이 유럽으로 향했다. 헨리 8세를 만났던 "브라질"의 왕부터 브리스틀의 에이번 강에서 오리를 잡았던 이누크인도 있고, 인간 제물로 카를 5세의 궁전에 전시되었던 멕시코인, 죽기 전 까지 런던 술집의 쇼에 세워지고 죽어서는 런던 하트 가의 성 올레이브 성당에 묻힌 이누이트 아기도 있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메스티소msetizo(백인과 인디저너스의 혼혈/역주) 아이들도 있으며, 유럽인 가정에서 노예로 일해야 했던 수천 명의 카리브 해 및 메소아메리카 주민들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부 르는 지역과 유럽 사이에 놓인 거대한 바다를 건너고,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24p


대서양을 건너 새로운 세계로 들어온 유럽인들은 그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섬에 도착해 인디저너스를 스페인에 보낸다. 그들은 유럽대륙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납치되었다(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벨 여왕은 곧바로 교황에게 자신의 새로운 대륙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인정받기를 원했고, 그것은 하나의 사업이 되어 무한히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인디저너스는 유럽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수동적인 '노예'로서 남아있었을까? 저자는 아메리카라는 공간에서의 역동성을 발견한다. 그들은 유럽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살길을 찾고자 했으며, 유럽에 끌려간 그들은 자유를 울부짖었다. 단순히 노예로서 정적인 역사를 쓴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 인간으로서 살아있었다. <야만의 해변에서>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그들의 처했던 상황을 풀어나간다. 

그들은 제국의 특산품이며, 화려한 귀중품, 부자들의 분신, 저 먼 속지의 신비로움이었다. 여기에서 간과된 점, 즉 그들의 신분이 귀족, 외교관, 하인, 통역사, 가족, 연예인, 노예 등으로 다양했다는 점은 근대 초기의 탐험과 제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다.
25p


유럽인들은 인디저너스를 마주했을 때 그들을 상품으로 인식했지만 처우문제가 대두되고, 이사벨 여왕은 그들의 처우를 일반인과 같게 하라는 말을 하면서 이론적으로는 노예화로부터 보호되었다. 원주민 귀족들은 귀족 대우를 받기도 하며, 유럽인들과 결혼하게 되면서 동등한 지위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예외도 존재했다. 어린아이나 여성들은 가사노동을 주로 담당했으며 노예지위에 있기도 했다. 이사벨 여왕의 사후엔 그 지위마저 위태로워지기도 했으며 인디저너스 납치도 성행했다. 특히 인디저너스 일반 여성은 계속해서 완전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체로 흑인과 다르게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시민들 사이에서 인디저너스들은 조용히 살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원주민 여행자들은 흔할 정도라고 말한다. 이들은 외국어를 배우며 유럽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의외로 좋은 대접을 받은 인디저너스 귀족들도 존재했다.


유럽인들은 기독교 전파를 강하게 내세우며 이를 잘 따르는 종족과 외교적 관계를 맺는 등의 전략을 구사했는데, 특히 식민지에서 강제적 세례와 교역을 통해 토착문화를 말살시키는 행위를 지속했다. 주로 사적 관계를 통해 외교를 유지하는 것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의 외교에는 그들을 도왔던 인디저너스들이 존재했다. 아즈텍을 정복한 코르테스의 편이 되어 통역사가 된 된말린친의 이야기가 대표적으로 언급되는데, 당시의 유럽 침략자와 식민지 이야기를 쓴 작가들의 성공 뒤에는 인디저너스 조력자가 존재했다. 인디저너스의 조력을 통해 식민지 통치 방법과 자연에 대한 이해, 항해술을 발전시켰다. 한편으론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다 부족으로 돌아간 완체세와 계속해서 영국에 충성한 만테오의 사례를 비교해 본다면, 식민지 상태에 처한 민족의 입장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아메리카 외교의 상황은 굉장히 역동적이었다. 스페인의 착취에 맞서서 영국과 협상을 맺는 부족도 존재했으며 정복자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 유럽 왕궁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책 후반부에는 유럽인과 대비되는 인디저너스의 세계관이 소개된다. 저자는 이미 인류학에서는 유명한 포틀래치의 사례를 들며 유럽의 무역과 다른 인디저너스의 '나눔관행'을 보여주고 그들이 자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말한다. 흡연과 카카오의 유럽 전파에는 인디저너스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흡연은 인디저너스에게 공동체 의식이었으며 카카오는 결혼 계약과 동의어로 쓰였다. 유럽에는 아메리카의 감자, 호박, 옥수수, 콩, 토마토만 들어간 것이 아니다. 그들의 습관과 기호, 언어도 스며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담배나 카카오와 같은 물건들에 담긴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한채, 상품으로서 받아들였다. 콜럼버스는 인디저너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첫 거래엔 바보같은 거래라고 말했다. 다음은 인류학자 린다 투히와이 스미스의 말이다.


무역'이라는 용어는 판매자와 구매자 간의 최소 두 방향의 거래를 가정한다. 이는 또한 인간과 다른 문화적 문물들도 '판매'가 가능한 상품 혹은 물건으로 본다. 인디저너스들에게 이러한 가정은 적용되지 않는다. 인디저너스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물은 도난당한 것이지, 거래된 것이 아니다.

239p


인디저너스들이 유럽을 볼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그들이 보기에 유럽인들은 매우 불평등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디저너스들을 오해하면 안된다. 우리는 흔히 인디저너스들을 이야기 하면서 사유재산 개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편견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소유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호성과 자연에 대한 인식이 광범위 했다는 것이다. 인디저너스들은 단순한 무사유를 제시한 것이 아니다. "상호주의와 지속가능성의 윤리에 기초한, 대지와의 관계"(207p)의 필요성을 항상 이해해 온 것이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추구했으며 공동체 내에서, 또 공동체끼리 상호간 부를 증식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러한 인디저너스의 사고와 단순한 이득을 추구한 유럽인들의 모습의 대비는 현대인들에게 다양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가 역사를 이해할 때 그 복잡성을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디저너스들에게 배타적인 사유재산 개념이 없다는 생각은 그들의 권리와 영토를 찬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동원되었다. 그러나 사실,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같은 학자들은 16세기에도 인디저너스들이 자신들의 땅에 대해 "완벽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그들에게는 소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고, 그 가치가 자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과 달리, 그들은 상품에 굴정하지 않았다. (...)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인디저너스들은 과거에도 복잡하고 다양한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모든 것이 공유되고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206-207p


브라질엔 왕실의 오락을 위한, 모의 전쟁쇼를 진행하기 위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인디저너스들은 왕족을 비롯한 관중 앞에서 전시되었고 특히 이누크인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해부되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물건과 문화재를 쉽게 가져갔으며 이익의 추구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인디저너스의 기록은 유럽의 문서에서 매우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혹은 '포카혼타스적'인 미화를 거쳐 당시의 인디저너스들의 이미지가 재탄생 되거나. 유럽엔 수많은 인디저너스들이 묻혀있다. 저자는 그 인디저너스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 일으킨다.

흔히 알려진 아타우알파와 피사로의 이야기와 헨리8세와 투피남바 족장의 만남과 침략자와 결혼한 왕실 가족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펼쳐지니 대항해 시대에 흥미가 있는 이들에게 <야만의 해변에서>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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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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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30일, Chat GTP가 출시되면서 세간에 놀라움을 선사했다. 기존의 단순한 AI(인공지능) 모델과 다르게 자연스러운 소통을 보여주는 생성형 AI로서 사람들은 큰 인상을 받은 것이었다. 최근엔 중국의 딥시크가 미국 기업들의 모델보다 더 나은 효율성을 보여주며 기술의 발전은 계속해서 폭탄 터지듯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AI에 대한 발전은 흔히 인간을 대체하고 심지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이어지는데,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가 대결할 때에도 사람들은 AI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뿐인가, 1997년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경기에서 가리 카스파로프를 이겼을 때도 사람들은 놀라움과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나름의 두려움을 느끼면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시작했다. '대체 가능한 인간'이라는 두려움에서 인간의 쓸모를 증명함과 동시에 대체 불가능성을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다움'을 처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학지능>의 저자 주나이드 무빈은 이런 두려움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고, 인간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AI를 인간이 역사적으로 발전시켜온 '도구'로서 받아들여야 하고, 중요한 것은 '기계가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저자는 순수과학과 응용수학을 넘나들며 AI 모델의 한계를 파악했는데, 이 책에서 인간과 AI의 사고 차이를 설명하며 아직 AI가 넘어서지 못한 인간만의 사고, 즉 인간만의 수학 지능을 설명한다. 이런 지능까지 AI가 뛰어넘을 수도 있지만,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 정확히 파악하자는 의미다.


실제로 인간은 수백만 년의 진화를 거치고 수천 년간 진보를 거듭해오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상상하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시스템을 발전시켜왔다. 우리는 이 시스템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기반이 되는 경제를 구축하고 민주주의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우리를 위협하는 기술을 낳았지만, 이 디지털 괴물을 길들일 수 있는 기술도 역시 이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스템이 바로 "수학"이다.

16p

먼저 인간이 어떻게 사고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수학사이자 인지과학 교양서처럼 흥미롭게 전개된다. 컴퓨터는 짜인 틀대로 계산해 정확한 값을 제공하지만 인간은 애초부터 '모호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핵심이다. 객관적으로 절대적으로 나눠진 무엇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겐 사물을 4개까지 인식(구분) 가능한 정확한 수 감각이 있지만 더 큰 수를 처리하지 못하는 대신 큰 수를 처리할 때 자연적으로 정밀한 연산이 아닌 어림짐작을 사용하는 근사 수 감각이 있다. 일정 수준 이상 숫자가 커지면 인간은 어림짐작을 하게 된다. 우리가 수학을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숫자(체계)는 어떤 상징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문화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수학적 사고가 환경과 언어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추상의 힘으로 적은 숫자만을 계산할 수 있는 인지적 한계를 극복했다. 어찌 됐든 수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도구가 개발되었다는 의미다. 저자는 우리가 수를 파악할 때 어떤 한계를 맞이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도구(표상 혹은 추상)들을 발전시켰는지 로그, 지수 등의 예시를 들며 수학적 계산의 역사를 설명한다.


수와 수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든 더 추상적인 종류의 지식이든 그러한 지식을 효과적인 방식으로 표상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

93p

AI 연구자들은 각 모델마다 규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 했지만, 항상 완전히 지정된 규칙만으로 파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광대하고 복잡했다. 하나의 모델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은 너무나도 좁다는 것이다. 계산된 값을 다른 분야에도 상호 적용하며 답을 찾아야 했는데, 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만든 것이다. AI는 문맥이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결괏값에 대한 의미를 찾지 않으며, 다양한 결과를 비교하지도 않는다. 만약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어도 인지하지 못한다. 컴퓨터 그저 "규칙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컴퓨터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대해서만 답을 찾는다. 기계가 스스로 목표를 정의하려면 일단은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213p

그러나 인간은 도구를 바꾸며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졌으며 그 말은 즉 "표상을 전환하며 여러 관점을 융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저자는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미덕이라고 말한다. 반사실적 추론을 통해 "만약에"라는 질문이 가능한데, 그러한 질문을 통해 무리수나, 0, 허수의 발견(혹은 발명)으로 이어졌다. "창의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선입관과 물리적 규범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답보다 중요한 것이 질문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학습 프로그램은 아주 약간의 수학적 개념을 포착한 후 이를 토대로 모든 사고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계는 수학이 베푸는 다양한 표상들을 놓치게 된다. 또한 수학자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모형을 배제해야 할 시점을 판단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러한 억제력을 보이지 않는다. 

135p

우리는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학습 과정을 설계하고, 적절한 난이도의 과제를 파악하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는 지식의 습득을 조절한다.

280p

여기서 AI가 가질 수 없는 인간 특유 주체성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세우며 해결하고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하며 목표를 해결하며 멈추지 않는다.


기계학습 프로그램은 아주 약간의 수학적 개념을 포착한 후 이를 토대로 모든 사고를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기계는 수학이 베푸는 다양한 표상들을 놓치게 된다. 또한 수학자는 풍부한 정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모형을 배제해야 할 시점을 판단할 수 있지만, 컴퓨터는 그러한 억제력을 보이지 않는다. 

135p

AI가 하는 일이 정해져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이 둘은 협력 관계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AI가 계산 영역에서 사용되고, 인간이 방향을 제시하고 융합시킬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저자는 개미의 협동 사례를 들면서 인간 협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개미는 환경에 맞춰 집단과 소통하며 자신의 역할을 바꾸면서 일을 해나가는데, AI 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모델들의 협동이 더 좋은 성능을 낸다는 것이다. "인지적 다양성의 힘은 특정 상황에 대해서 각 모델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표상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온다." (303p) 우리가 세상이나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표상이 다양할수록 도구가 많아진다는 의미이며 문제 해결의 정확도는 더욱 올라간다. 다양한 표상을 교차시키고 또 다른 생각을 낳음으로써 해결책을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AI가 아직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다.


최근  AI의 발전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알게 된 사실은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 지능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어떤 게임이 그러한 전형으로서 최상의 척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42p

저자가 말하는 '인간다움'의 특징, 애초에 AI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인간만의 특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떤 안도를 느낄 수도 있지만, 저자의 말에선 인간 사고 특유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인간 사고의 가치는 컴퓨터와 같은 계산이나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정보들의 종합적인 압축을 통해 표현하는 것과 다양한 표상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표출하는 그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고립된 단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도구를 통해 표출된다. 숫자 표상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공지능의 아름다움은 그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인간다움은 그 나름대로 아름답다.


책이 전하는 시사점의 핵심은 책의 후기에 나오는 듯하다. 결국 우리가 어떤 목적을 향해 있는가, 어떤 "의식적인 선택"을 하느냐,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에 따라서 수학을 포함한 파생되는 기술들까지 바뀌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엇이 중요하냐에 따라서 그와 관련된 수학적 기술 혹은 표상들이 개발되었다. 기술은 혼자 발전하지 않는다. 한편 인간은 협력이라는 또 하나의 인간적 특징을 통해 다양한 상호보완적인 도구를 개발하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그러므로 저자의 결론은 다양성을 강조하는, 창발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향점은 기계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향점과 목표는 인간이 설정하며 그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은 기계가 풀어나가기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하다. 세상을 정확히 표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인간의 지능으로 만들어낸 지능이 과연 세상을 정확히 '풀어'나갈 수 있을까? 그저 특정 목적을 가진 또 하나의 도구로서 작용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닐까?


수학의 질문과 답은 오늘날 가장 똑똑한 기계조차 방향을 찾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하고 탐구해야 할 내용은 너무 깊다.

321p

이 책을 읽고 나는 GPT와 생각보다 길게 대화를 나눴다.(물론 더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주요한 것만 캡처해 본다.) 통상적으론 AI의 한계점이 6개로 요약되는데, 나는 AI는 탄생의 근거가 유한한 '인간의 정보'임과 동시에 존재 목적 자체가 도구적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 선을 넘어가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에게도 더 이상 의미를 주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인간과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이고, 한편으론 인간의 수학 지능뿐 아니라 사회, 정의적 지능 또한 시험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 탐구에는 절대적으로 정해진 궤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vsAI의 관점에서 주체성을 가진 인간을 긍정한다. 인간만의 지능을 긍정할지라도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고려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라 인간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협력으로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AI의 모습이 AI의 강한 힘들 가진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나누는 모습 또한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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