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음과모음 2024.겨울 - 63호
자음과모음 편집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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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동료가 될 수 있을까요? 🎵⌟

『자음과 모음, 2024 겨울 ⏐ 63호』


이번 호가 흥미롭게 다가온 것은 순전히 “동료”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나는 내내 동료를 구하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동료를 구하는 수업>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동료를 구하는 수업>의 이름을 붙일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 동지, 같은 유사어들이 있었지만 내게는 그 사이의 단어가 필요했다. 왜 하필 동료여야 했을까? (나는 친구도 동지도 다 없는데......) 이름을 붙인 이후로도 내내 확실히 해명되지 않아 궁금했다. 그러다 이번 계간지의 머리글의 일부를 읽고, 동료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료’는 특정 직군에 속하거나 특정 업무를 협력해 수행하는 자를 의미한다. ‘동료’는 제도화된 성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한 비평가가 짚어주었듯 오로지 공적이지만은 않은 사적인 성격을 지닌 관계를 포착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 되기도 한다. ‘동료'는 사무적인 용무로 얽힌 중립적이고 추상적인 관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같은 뜻을 공유한다고 기대되는 실체 없는 기표로 호명되기도 한다. 반면 ‘동료’는 창작이나 감상, 비평, 정치적 행위를 함께 수행하는 존재, 애착의 대상이 되면서도 분노를 일으키기도, 기어이 상처를 주고받고야마는, 몸으로 육박해 오는 실체이기도 할 것이다.” 8p
내가 왜 동료라는 단어를 마음 속에 품었는지를 말해 주는 부분이었다. 나는 알고 지내는 동종업계 사람이나,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친구가 아닌, 동료가 필요했다. 공적이기도 하고 사적인, 그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는 관계가 필요했다.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는 특성상 홀로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읽고 쓰는 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인지하는 일을 절실하게 여기게 된다. 학교를 벗어나고 소속감을 잃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내가 동료를 구하고자 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을 테다.
그렇기에 반가웠다. 다섯 명의 필자를 통해 문학장에서 동료라는 개념은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사유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값진 일이었으나,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누군가가 동료라는 단어를 또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기뻤다. 이것을 읽으며 내내, 저 여기 있어요, 하고 손 흔들고 싶어졌다.
특히 이여로 작가의 글과 김영희 선생님의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여로 작가의 글에서는 동료와 패거리를 구분하면서, 동료를 통해 사유하는 방식에 대해 밀고 나가는 방식을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 김영희 선생님의 글은 작지만 단단한 조약돌처럼, 교사 집단이 갖는 느슨한 연대와 동료성으로 귀결되어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후의 부분들도 흥미로웠다. 김유태 기자가 다룬 '작가의 골방' 이라는 키워드는 아주 흥미로워서, 나의 골방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다소 어쩔 수 없이...... 소설 파트에 집중해 읽은 면도 있다. 권여선 선생님 소설은 최근에 다른 문예지에 실린 소설과 많이 겹쳐 읽혔다. 간병하는 여자와 아픈 여자, 모녀 키워드가 중심으로 보였던 것 같다. 작가에게 모티프나 키워드가 반복된다는 것은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쓰이는 것이므로, 작가 본인께서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향해 가고 계시리라 짐작하게 되었다. 믿고 읽는 권여선....... 💙 이번 호에서는 김채원 선생님 소설인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가장 좋았다. 반짝반짝 슬픈 소설이었다.
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자음과모음께 감사드립니다. 이 고운 책은 자음과모음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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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볼드 - 그래픽 디자이너를 위한 페미니스트, 포용주의, 반인종주의, 비이분법 현장 가이드
엘런 럽튼 외 지음, 정은주 옮김 / 안그라픽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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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베티카의 세상에서 🧭」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으로 디자인에 입문했다.

나는 애초에 좀 다르게 생긴 책들을 좋아해 왔고, 내용과 책의 형태가 훌륭히 결합될 때 텍스트가 그 힘을 받아 더욱 잘 읽힐 수 있다고 믿으며, 할 수만 있다면 (국판 혹은 신국판인 이상적 ‘소설집’ 아닌) 다른 걸 만들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의 방식을 이해하고 일종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내게는 필요했다. 이제는 어떤 책을 만나도 내용만 살피지는 않는다. 종이, 폰트, 판형, 제본 같은 북디자인의 큼직한 요소부터, 인쇄와 유통 과정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해서라면 살피고 고민할 내용이 많으므로.

북디자인에도 일종의 계보가 있다. 한 북디자인 수업에서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그리드를 치’는 법이었다. 여백과 흐름을 만들기 위해 레이아웃이 쓰이는 방식을 주로 배웠다.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던 현대 북디자인 자료들은 매우 아름다웠고, 나는 그걸 조금은 따라 해 보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료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 가졌던 묘한 의구심은 이 책을 읽으며 해소되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우리는 헬베티카의 세상에 사니까.

헬베티카는 1957년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산세리프 폰트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산세리프 글꼴로 알려져 있다. 헬베티카는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브랜드들의 로고에 쓰였고, 헬베티카를 의식해 만들어졌거나 흉내낸 폰트도 많다.

같은 글씨체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없듯, 일관된 폰트와 포맷은 모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다. 『엑스트라 볼드』는 지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의 80% 이상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명명되지 않았던 작업과 역사, 사람들을 소환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만나보기 어려웠던 인물들과 디자인 작업, 역사와 계보를 만나게 되었고, 영감을 받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으며, 결과적으로 페미니스트이자 퀴어이며 작업하는 아시안 여성으로서 내가 가지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나는 디자인을 배우며 어떤 책의 정확히 어떤 부분이 아름다운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써 책을 더욱 열렬히 좋아하게 되었다.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관점을 나는 이제 믿는다. 우리에게는 획일화된 방식보다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안그라픽스께, 감사드립니다. 이 고운 책은 안그라픽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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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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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물 1호의 진짜 이름 🦾

예술대학을 나왔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내가 하는 것이 예술이 맞는지.

소설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영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묻는다. 소설이나 쓰다니, 대단한 일이라고, 자기는 상상도 못해 봤다고 한다. (요즘은 한강 같은 작가 되는 거냐고도 많이들 물으시던데...... 한강 선생님 같은 작가는 못될 것 같다) 가끔은 소설을 써 보는 게 일생의 꿈 중 하나라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나는 아주 반가워한다. 이거 별거 아니라고, 한 번 써 보십사 한다. 가벼운 권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소설 쓰기는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만 관찰과 논리를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많다. 본질적으로는 성실함을 요하는 육체 노동에 가깝고, 때문에 산문을 쓰는 사람은 숙련공 같은 면을 갖추게 된다.

이게 예술이 맞나? 누가 공인하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술은 계속해서 폭이 넓어지고 있고, 지금보다 훨씬 더 넓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충분히 그래야한다. 분명히 그렇게 믿지만, 내 얘기로 돌아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쓰는 소설...... 예술이 맞나?


그래픽노블 『이것이 새입니까?』 는 브랑쿠시의 작품 <공간 속의 새Bird in Space>를 둘러싼 재판을 다룬다. 브랑쿠시의 조형 작품이 진정한 의미의 예술 작품이 맞는지, 실용품인지를 가르는 재판이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이란 무엇이며 어때야 하는지를 따져 묻게 된다. 브랑쿠시의 작품은 특별히 조형 예술품이기에 이와 같은 질문들이 따라붙었다. 이 '새'는 유일한 버전인가? 이 '새'는 작가가 직접 제작했는가? 사실 이런 질문들은, 우리가 지금 아는 예술에 비추어 보면 다소 낡은 질문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것의 폭이 그 사이 더욱 넓어졌다는 뜻일 테다.

아름다운 삽화로 채워진 고운 책을 덮은 뒤, 실제 브랑쿠시의 작품을 검색해 보았다. 성실하게 그려진 대로, 아주 미끈하고 아름다운 새 조형이었다. 사실 나는 사진을 보고 좀 당황했다. 너무 새 같아서. 이걸 어떻게 새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있지? 사람들 참 보수적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소 보수적인 사람들에게 대항하고, 이것이 왜 예술인지를 일련의 논리를 설득시키는 작업은, (다소 빡칠 수도 있지만) 예술을 수행하는 작업자 본인에게도 중요한 의미라는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인지하는 것 자체가 예술적 행위를 이루는 중요한 근간이니까.


책에서 다루어진 에피소드는 브랑쿠시의 새를 예술적 새로 인정했지만, 내게는 이런 질문이 남았다. 숙련공으로 사는 삶과 예술가로 사는 삶이 그리 다를까? 소설가는 예술가가 맞는가? 잘 모르겠다. 이 까다로운 중노동을 나는 언제까지고 하고 싶은데.......



그나저나 이 책, 내용을 떠나서도 만듦새가 너무 곱다....... 이야기와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그림, 여느 그림책처럼 큼직한 크기, 잘 어우러지는 환양장 제본......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매혹된 것 같다. 이 책이 집에 온 날, 품에 꼭 안고 낮잠을 잤다. 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바람북스께, 감사드립니다. 이 고운 책은 바람북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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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조이스 박 지음 / 제이포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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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여자들을 좋아해 왔다. 쟤 왜 저래? 라는 생각이 드는 여자들과 여자 같지 않지만 분명히 여자였던 여자들, 사람을 내던지거나 심지어는 죽일 줄도 아는 여자들. 온갖 미디어, 이야기, 시, 현실에서 마주한 정신 나간 여자들을,  겉으로든 속으로든 좋아해 왔다. 

내가 그냥 미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건 안다. 이것을 읽는 당신이, 미친 사람과 미친 여자가 그렇게 다른 걸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자라는 단어를 놓치고 싶지가 않은데, 거기에 진실이 걸려 있다. 나는 그들을 미친 여자라 부르면서 어느 순간 이해하고 이입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 스스로도 내가 미친 여자 같다. 나는 나 스스로의 어떤 부분과는 협상할 수 있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왔다. 이건 어떤 병이라고 칭할 수 없었고 (우울증과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이름을 얻긴 얻었다.) 종교에 의탁하는 건 정말로 불가능했으며 (가끔은 절에 가서 절을 한다.) 나를 사랑했다던 어떤 애는 나와 헤어질 때, 나를 히스테리 환자라고 불렀다. (히스테리라는 병은 없다는 거, 그 애는 이제 알까?) 나는 나의 문제와 해답을 찾아 오래 헤매 왔지만 무엇도 내게 답이 되어 주진 않았다. 나의 문제를 하나로 지목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그런 삶은 보통 미친 것으로 말해졌고, 나도 내가 좀 미친 여자라고 생각해 왔다. 진짜 미친 짓은 이런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본론적인 문제로 계속해서 회귀한다. 나는 왜 이런 짓을 계속해서 하고 있을까, 이따위 답도 없는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식으로.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의 한 챕터 제목은 이렇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세상을 바꾸는 여자’.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시간 동안 아무 데도 가지 않았고, 밖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나를 알고 싶었다. 나를 좀 더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 삶을 발견하고 싶었다. 세상과 화해하고 싶었다. 이 책에서는 여성이 떠나는 모험을 스스로가 가진 힘을 탐색하는 과정으로서 그려낸다. 무시무시한 용이나 뱀도, 악마처럼 묘사되었던 마녀나 노파도, 전부 내 안에 드리워진 깊은 숲에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것이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지속해 온 이 미친 삶이, 어쩌면 내 안에 드리워진 깊은 숲에서부터 기원했을지 모른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그래서일까? 여성성에 대해 말하는 방법으로서, 이 책은 내게 가장 실용적인 책 중 하나가 됐다.

몇 년 전에는, 내가 사는 이 미친 삶을 종종 집에 비유했다. 그 집은 이런 집이다. 불 꺼진 집. 영영 정전인 집. 이 집에 사는 나조차 이 집의 구조를 모르는 집. 구조가 가끔은 바뀌는 집. 넘어지고 부딪히고 무릎이 깨지면서 차근히 그려나가야 하는, 그러나 평생 다 알 수 없을 집. 돌이켜 보니 이것은 내면의 숲으로 파고 들어가야 하고, 스스로에게 숨겨진 괴물들을 만나야만 하는 모험과 같은 비유로 여겨진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지겨웠다면, 다만 이제는 궁금하고 조금 설레이기도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얼마나 커다란 힘이 도사리고 있기에 내가 이토록 오래 아팠는지.


조이스 박의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이 아름다운 책은 태연한 책장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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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테이블·라이프·디자인
기디언 슈워츠 지음, 이현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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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LP를 몇 장 선물받았다. 주로 아낀다고 오래 말해왔던 음악가들의 앨범이었다.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어 본 적 없던 내게 LP 선물은 꽤 낯선 것이었는데, 큼직한 아트워크와 흠이 잘게 나 있는 동그란 판의 존재, 이것이 음악을 기억하고 있다니 재생할 수 있다니, 그 신묘한 사실에 한동안 매료되어 있었던 것 같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과 스포티파이만 있다면 못 들을 노래가 없는 2024년에, 이런 아날로그라니.
아마 그들이 내게 LP를 선물했던 건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이유였겠으나, 내게 LP를 가진다는 건, 내가 이제 독립된 공간을 정말로 가졌다는 뜻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LP를 모으고, 턴테이블을 들이고,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증거처럼. 진정 음악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내게 생긴 것이다.

내게 LP와 턴테이블은 오디오 시스템과 더불어 가장 사치스러운 취미 중 하나고, 그건 공간의 문제와 너무도 직결된다. 나는 아름다운 공간을 방문하거나 소비하고, 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어떤 공간을 구경할 수는 있지만, 내가 발견한 모든 아름다운 공간를 소유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방법을 취해 볼 수는 있다. 어떤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다. 그것을 들으며, 이곳이 이곳이 아니고 그곳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음악에게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음악은 알 수 없어 이상한 것, 전환하는 아름다운 것이니까.

<턴테이블, 라이프, 디자인>은 에디슨의 축음기에서부터 탄생한 턴테이블의 변모와 역사를 차근히 조명하지만, 거기에서만 그치지는 않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에 음악이 녹아든 방식, 그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디자인까지를 다룬다. 이 책이 단순히 기술의 발전과 역사에 대해서만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할 뿐더러 아름다운 점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여느 예술이 그러하듯 음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겠지만, 사람들은,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를 알았다. 그리고 이 가치가 더 많은 사람에게 향유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여러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발명과 발전을 거듭하게 했다.
디자인과 기술이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방법은 어떤 가치를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것에 가깝다고,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내게 음악을 듣는 것은 단순한 감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과 원치 않는 사람들의 존재감으로부터 연약한 스스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포티파이로 전세계의 플레이리스트를 자유롭게 건너뛰고 가로지르며, 이곳이 이곳이 아니고 그곳일 수도 있다는 상상력을 애써 발휘했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음악으로 인해 보호받고 있다 느꼈다. 어떤 음악은 그 시기의 피폐까지 함께 재생시킨다. 그 시기에 좋아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뼈가 욱신대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시기를 음악으로부터 보호받았다. 당신의 힘든 시기도 그러하기를. 무엇으로부터든 당신이 위로 혹은 보호를 받기를, 열망하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기디언 슈워츠의 『턴테이블, 라이프, 디자인』, 이 아름다운 책은 출판사 을유문화사 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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