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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볼드 - 그래픽 디자이너를 위한 페미니스트, 포용주의, 반인종주의, 비이분법 현장 가이드
엘런 럽튼 외 지음, 정은주 옮김 / 안그라픽스 / 2024년 11월
평점 :
「헬베티카의 세상에서 🧭」
책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으로 디자인에 입문했다.
나는 애초에 좀 다르게 생긴 책들을 좋아해 왔고, 내용과 책의 형태가 훌륭히 결합될 때 텍스트가 그 힘을 받아 더욱 잘 읽힐 수 있다고 믿으며, 할 수만 있다면 (국판 혹은 신국판인 이상적 ‘소설집’ 아닌) 다른 걸 만들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의 방식을 이해하고 일종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내게는 필요했다. 이제는 어떤 책을 만나도 내용만 살피지는 않는다. 종이, 폰트, 판형, 제본 같은 북디자인의 큼직한 요소부터, 인쇄와 유통 과정에 이르기까지, 책에 대해서라면 살피고 고민할 내용이 많으므로.
북디자인에도 일종의 계보가 있다. 한 북디자인 수업에서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그리드를 치’는 법이었다. 여백과 흐름을 만들기 위해 레이아웃이 쓰이는 방식을 주로 배웠다. 선생님께서 보여 주셨던 현대 북디자인 자료들은 매우 아름다웠고, 나는 그걸 조금은 따라 해 보고도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자료들이 비슷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때 가졌던 묘한 의구심은 이 책을 읽으며 해소되었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 우리는 헬베티카의 세상에 사니까.
헬베티카는 1957년 스위스에서 만들어진 산세리프 폰트이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산세리프 글꼴로 알려져 있다. 헬베티카는 우리가 아는 가장 유명한 브랜드들의 로고에 쓰였고, 헬베티카를 의식해 만들어졌거나 흉내낸 폰트도 많다.
같은 글씨체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없듯, 일관된 폰트와 포맷은 모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없다. 『엑스트라 볼드』는 지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의 80% 이상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명명되지 않았던 작업과 역사, 사람들을 소환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어 만나보기 어려웠던 인물들과 디자인 작업, 역사와 계보를 만나게 되었고, 영감을 받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으며, 결과적으로 페미니스트이자 퀴어이며 작업하는 아시안 여성으로서 내가 가지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나는 디자인을 배우며 어떤 책의 정확히 어떤 부분이 아름다운지를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써 책을 더욱 열렬히 좋아하게 되었다. 디자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관점을 나는 이제 믿는다. 우리에게는 획일화된 방식보다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늘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안그라픽스께, 감사드립니다. 이 고운 책은 안그라픽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