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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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를 읽고 한동안 까칠한 남자 오베에게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다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예약판매를 해버렸다. 사실,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속에 믿고 읽는 작가! 라고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다. 만약 이번 책도 읽고 나서 마음에 꼭 들면, 그 다음부터는 배크만이라는 이름 하나만 가지고 책을 구매하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판매가 끝난 뒤 책이 내 손에 들어오고 나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책을 읽느라 이 책을 잠깐 방치해 두었었다(리뷰를 쓰는 것은 더 한참 뒤인 지금이고)

이 책까지 다 읽고 드는 생각인데…… 프레드릭 배크만은 어떻게, 나이 든 사람을 이토록 멋있게 표현을 하는 거지?
뭐,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난 다시 한 번, 할머니라는 캐릭터에 푹 빠져버렸다.

괴팍하고 상대하기 까다롭고 온갖 사건사고를 다 치고 다니고 그러면서 되레 뻔뻔하게 응수하고, 보는 사람들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버리는. 현실로 따지자면 결코 가까이 하고 싶지도, 가까이 했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이 할머니에게는 어쩐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여기에, 또 한 사람.
할머니와 맞먹게 독특한 소녀가 등장한다. 이 소녀는 소위 어른스럽다고 말하는, 바꿔 말하자면 어마무지하게 짜증이 나는 소녀이다. 맞춤법에 어찌나 민감한지 틀린 것을 보면 고쳐주지 않고서는 못 베기는 것이다. 어른들 눈에는 귀엽지 않을 수밖에.

또래와 다른 성격 탓에 친구라고는 할머니가 다인 소녀는 어느 날, 유일한 자기의 편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자신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한 엘사에게 할머니의 마지막 편지가 도착한다. 엘사는 화는 나지만 할머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자신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에게 편지를 전하기 시작한다.
˝저기요,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한 편의 동화 같은, 어쩌면 할머니의 손에서 전해지는 마법과도 같은 기적.
그 전까지는 그저 한 개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나의 일부임을 깨닫고 이해할 수 없는 내면 안에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이야기.

나는 책장의 마지막을 덮을 때까지 이 할머니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가장 단순해 보이는데도 의외로 복잡하고 많은 생각과 비밀을 가지고 있어서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 그 일을 저지를 때 도대체 어떤 생각이었는지, 혹은 하나의 변덕일 뿐이었는지.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할머니가 아주 많이 미안해했다는 거다. 진심으로.

처음에는 비호감이라고 생각했던 아파트의 몇몇 주민들이, 겉으로 보이는 성격과는 달리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점점 아파트를 애정하게 되었다. 아파트가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그저 매일매일 우리가 우리로 존재할 수 있도록 간절히 바랐다. 어떤 기적이 아파트에 생기기를!

프레드릭 배크만 작가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참 다채롭다. 이 사람은, 어느 일부만 안다고 해서 그것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내면까지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작가다. 어쩌면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이렇게 따뜻하고 배려가 넘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또한.

이 후에 출판되는 소설에는 할머니에서 등장했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맨 처음에는 그 사람이 정말로 짜증이 나고 보기 싫었지만 지금은 이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그 사람이 아파트에서 떠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기도 하고. 다음 소설이 무척 기대가 된다.

앞으로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은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서 볼 것 같다.

"아저씨한테 드릴 편지가 있어요!"
밤하늘에 대고 외친다.
엘사는 그제야 울음이
목에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사람이 누구길래 할머니가 은밀하게
미아마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대답이 없다.
눈 위를 가볍게 걷는 소리가 들린다.
괴물은 거대한 몸집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날렵하다.
그렇게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엘사는 겁을 먹어야 맞다.
괴물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상상하며 무서워해야 맞다.
괴물은 한 방에 자신을 찢어버릴 수 있을 만큼
덩치가 크다.
하지만 엘사는 너무 화가 나서 두려움을 잊는다.
"우리 할머니가 미안하다면서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엘사는 있는 힘껏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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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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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행렬로 이끌었던 최악의 병인 흑사병, 즉 페스트가 한 마을에 창궐하면서 그 마을이 폐쇄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병이 우리를 놓아줄 때까지 멈출 수 없었던, 그 순간들에 관한 소설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주민들.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
어느 날, 그 속으로 끔찍한 병이 잔혹한 살인마처럼 침투한다.
아무 대책도 없는 가운데 힘없는 사람들은 속속들이 쓰러져 갈 뿐이고 어떤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염병 소설에 관해 읽다 보면 정유정 작가님의 「28」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전염병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기간이 거의 그 정도 된다고 했던가
「28」이 사건 중심으로 긴박하게 빠른 속도로 펼쳐졌다면 이 소설은 사건 중심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건은 빠르게 흘러가지도 않고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 둘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는 거구나, 나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많은 죽음을 보고, 많은 죽음을 접하고, 많은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그 이후에는 죽음에 무덤덤해지는 걸까. 그게 아니면 눈물을 흘릴 힘마저도 전부 소진해 버리는 걸까.
아내의 죽음을 전해 듣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하던 그가 문득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소설 내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마음에 공허함만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보이던. 혹은 병이 그의 모든 마음을 송두리 채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병이라는 건, 확실히 무언가를 변하게 한다. 어쩌면 병 속에 존재할 때만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마을이 폐쇄되었을 때는 그렇게나 빠져 나가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그리운 사람을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 막상 모든 것이 해결되고 나자 마음속에 작은 의문이 싹 트는 것처럼.

진실한 것은, 죽음의 행렬 속에만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리외의 어머니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사는 잠자코 있다가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고,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이
새삼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여러 달 전부터,
그리고 이틀 전부터 계속되어온
바로 그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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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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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를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다른 책 읽느라 묵혀뒀던 파수꾼을 읽으려니 전작의 등장인물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매우 난감했다. 뭐, 읽다 보면 대략 기억이 나겠지 싶어 한 장 두 장 읽고 있노라니 정말 그 생각처럼 과거에 읽어 내려갔던 단편적인 기억들이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내 머릿속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진 루이즈라는 이름에는 무감각하다가, 스카웃이라고 불리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서로의 비밀을 터놓고 공유하듯 장난스러운 미소가.

앵무새 죽이기에서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소녀 스카웃이 숙녀 진 루이즈가 되어 마을로 다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전작에서 노예 제도에 대해 단지 지저귀기만 하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지고지순하게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파괴당한다.

스카웃은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여전히 맹목적으로 믿고 있다. 그런 그녀가 한참 뒤, 마을로 돌아오자 모든 것은 이상할 정도로 변해있다. 극명하게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는 마을 사람들, 과거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는 아버지, 가족처럼 지냈으나 현재는 그들을 거의 증오하다시피 하는 전 사용인.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혼란을 초래할 뿐인 것들. 그녀는 무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고 바꾸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다. 그녀는 이 분노와 실망감을 아버지에게로 돌린다.

순진하게 맹목적으로 맹신하던 것에 배신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나 또한 스카웃과 마찬가지로 참 맹목적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눈물을 뚝뚝 흘릴 리야 없지 않은가.
어쩐지 한껏 들떴던 마음이 축 가라앉으면서 바보 취급을 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는 더 이상 다음 장을 넘기고 싶어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계속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도 끝까지 읽은 것은 아마, 나와 같은 배신감을 경험한 스카웃이 그들에게 한 방 강력하게 먹여주기를 바라서였을 것이다. 내심 통쾌한 한 방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참 우습게도 도리어 한 방 맞은 것은 스카웃과 나였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것이, 그럴 거라 믿고 있던 것이, 사실은 진실의 한 이면이었으며 결국 우리 또한 하나의 편견 섞인 시선으로 그것들을 보고 있었다는 걸 불연 듯 깨달아버린 것이다.
어쩐지 분하지만 반박할 말도 없고 자존심도 무척 상해서 펑펑 울고 말았다.

그래도,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마음만은 놀라울 정도로 편하게 가라앉았다.

파수꾼은, 기대했던 것처럼 유쾌하지도, 마냥 편하지도,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한 템포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그것이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우리의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것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가끔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필요성이 있다.

오랫동안 메이콤 교회는
좋은 목사를 모셔오기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고,
범용한 목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터라,
관계자들이 지난번 교단 당회에서
젊고 정력적인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메이콤 주민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못 되어 그 목사가
회중에게 준 느낌은,
어느 일요일 핀치 박사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빵을 달랬는데 돌을 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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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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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골 소녀의 성공담이라고 하기에 너무 거창한 것을 생각한 내 탓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살짝 실망을 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어떤 기대감을 품고 이 책을 접했든. 차라리 시골 소녀가 여배우가 되기 위해 경험하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과 마음고생이라고 말을 했더라면, 어떤 커다랗고 웅장한 드라마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캐리가 보란 듯 우아한 여배우로 성공해서 탄탄대로를 걷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많은 기대감을 품고 내 마음속 상상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참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끝에 가서는 약간의 실망을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러울 정도 잘 읽혔다.

캐리가 생각한 성공, 내가 생각한 캐리의 삶, 그것에 따른 회의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울.

캐리는 순진한 시골처녀로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어 대도시로 오게 된다. 그곳에서 각기 다른 특성을 각진 두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유부남으로서 나름 지위가 있는 남자였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속이고 캐리와 연애를 하는데 그러다가 어떤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캐리를 데리고 도시에서 달아난다. 어쩌면 그 때가 캐리에게 있어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캐리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 극장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 이후 캐리는 점점 성공의 길로 한발 두발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성공은 행복의 척도를 나타내는 데 적합할까. 내가 계속해서 성공을 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게 되면, 더 많은 돈을 움켜쥐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우상이 된다면, 그것이 행복해지는 길인 걸까.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시간은 극히 짧다고 한다. 어떤 것을 성취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하다.
끝없는 행복을 가지고 싶다면,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낼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캐리의 성공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끝없는 성공이 캐리의 행복의 근원인 셈이다.

분명 이 소설은, 한 시골소녀의 성공담인데 어째서 내 눈에는 이토록 불행한 인간들만 보이는 걸까.
유쾌하고 통쾌한 반전을 기대하며 읽은 소설이었는데 정작 느껴지는 것은 지독하게 올라오는 쓴물이다.

"당신의 여자가 현명하건 머리가 비었건,
아름답건 못생겼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그녀가 정말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그녀의 마음이에요."
캐리가 연인을 향해 슬픈 눈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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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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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랬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읽는 내내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고. 나역시 그랬고 조금 곤란하게도, 마지막까지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대략 이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정말 그런 의미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을까. 그저 짐작만 할 뿐.

소설 속에는 각각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한다. 누군가는 그걸 탈출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무겁지 않은 것, 누군가는 자유, 누군가는 뒤늦게 발견한 운명이라 생각한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얽매이며 그것이 싫어 도망을 갔다가도 다시 한 번 스스로 그 굴레 속으로 들어가고 마는.

밀란 쿤데라는 참 똑똑한 작가다.
어쩜 이렇게 사랑이라는 걸 지적이고 우아하게, 그려낼 수가 있는 걸까.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이 소설은 어쩐지 철학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다른 캐릭터들도 다 마음에 들었지만 특히 사비나가 눈에 밟혔다.
끝없는 자유를 열망하는 그녀는 날개 없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자유롭고, 그만큼 아름답고, 그만큼 외로워 보인다. 아마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토마시와 잘 지낼 수 있었던 거고 프란츠와 그렇게 헤어져야 했던 거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그녀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을까? 자신이 그런 식으로 사랑을 했다는 걸. 프란츠를 떠난 것을.
후회하고 되돌아보고 싶은 적이 전혀 없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좋았다.

사랑에 관해 열심히 노래하는, 다른 소설들처럼 그렇게 로맨틱하지는 않지만 이 소설에는 어딘가 마음을 머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강렬한 여운이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것도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모호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더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닐까.

닷새 만에 토마시가 불쑥 아파트에 나타났다.
카레닌이 그의 얼굴까지 뛰어올랐고
덕분에 서로 말을 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들을 한동안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눈 덮인 들판 한가운데 마주 서서
추위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마치 아직 키스를 하지 않은 연인들처럼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가 물었다.
"잘돼 가?"
"응."
"신문사에는 들렀어?"
"전화했어."
"그래서?"
"아무것도 없어. 기다리는 중이야."
"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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