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링크로스 84번지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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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날개에 소개된 바와 같이 이 책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고서점에 보내는 도서 청구서와 고서점의 납품서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식으로 산다면 이런 책이 나올 리가 없다.

적어도 나는 고서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 단 돈 몇 푼 더 버는 게 당장의 목적이고 어떤 인간적인 틈새도 용납하지 않는 우리 같은 문화환경에서는 이런 책이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이건 비단 고서점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니다.

문화라는 것, 책이라는 것, 예술이라는 것, ...이런 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당장 돈이 되고 쌀이 되지 않는 것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한 문화라는 것이 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의 제2의 고서점(당시 제일 큰 고서점은 <통문관>이었다.)에서 근무할 당시의 월급은 2000원이었다. 때는 거슬러 올라가 1967년 경이었다. 2000원 중에서 1000원은 끼니를 굶고있는 부모님게 보내고 1000원으로 한 달을 사는 거다. 목욕은 물론 이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의 유일한 해방은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물론 밥은 주인집에서 먹었다. 그러나 그 대신 주인집 아들의 과외를 해 주어야 했는데, 이 애가 어찌나 교활하게 속을 썩이는지 애를 많이 먹었다. 즈이 엄마가 너무나 들볶으니까 모든 핑계를 나에게 돌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외선생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둥 늦게 왔다가 일찍 간다는 둥.... 그러나 내가 전심전력을 기울여 성심껒 가르친 결과 나중에는 성적이 현저하게 오르고, 이 애가 나를 무척 따르던 기억이 난다. 진(晉)씨인 이 꼬마도 지금은 나이 40의 중년이 되었겠지.....

제일 괴로웠던 일은 잠자는 일이다. 책방의 한 켠에 다다미를 한 장 놓고 그 위에서 웅크리고 자는 건데, 특히 겨울 밤에는 자다가 한 두 번은 꼭 깨어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가려워서 도저히 잠을 못 자기 때문이다.

12시 쯤 일어나 내의를 모두 벗어서 바깥에 널어 놓는다.겨울 추위에 이들이 얼어서 죽기를 기다린다. 나로가에 앉아서 한 30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가 다 죽었겠지 할 때 쯤 나가서 내의를 훌훌 털어입고 자는 것이다. ...이런 짓은 하룻밤에 한 두 번 해야하는 것이다. 지금이야 그까짓 내복 2벌 사서 한 벌은 입고 한벌은 내다 널면 돼잖냐? 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에는 내복 한 벌이 꽤 비쌌기 때문에 그럴 엄두도 못 냈다.

어떻든 이런 고서점 생활에서 고객과, 더구나 해외로 넘나드는 고객과의 편지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일부 대형 서점을 제외한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는 형편 아닌가? 더구나 고서점은 사양길로 접어든지 오래다. 굵직 굵직한 사회과학 서점들이 연이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전쟁이 끝난 후의 궁핍했던 영국의 한 고서점 사람들과, 미국 뉴욕의 간난한 무명작가의 이 아름다운 교류는 고독한 현대인의 마음을 적셔주는 한 떨기 들꽃 같은 향기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편지(청구서)는 빠른 템포로 책방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사연이 계속되고, 영국으로 계속 초청을 하지만 결국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러다가 갑자기 책방 주인 프랭크가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어느덧 지금은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에필로그가 보인다.

이것이 한 시대를 살다 간 한 사람의 생애의 압축판이다. 만약 뉴욕의 무명작가가 영국의 책방 사람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일찍 영국의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방문했더라면... 아마도 이들의 고독한, 그러나 정겨운 만남은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헬렌 한프는 온라인 시대의 선구자적 예감을 실천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터넷을 통하여 만나고 헤어지고 대화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고.....하는 것을 그녀는 당시 편지라는 매우 고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실천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인터넷과 편지는 매우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떻든 우리는 살기 위해서 소통을 원하고 그 소통의 방법이 종이 위의 편지에서 온라인으로 변한 것 뿐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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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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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은 있는가?

 

배우 김혜자씨의 방송인터뷰가(3월 중순경) 있자 마자 나는 그분의 책을 샀다.

 

<꽃으로도 대리지 마라>

 

그러나 나는 그 책을 서가에 꽂아놓은 채 차마 읽을 수가 없다. 방송에서 그녀의 목소리 몇 마디를 듣는 것만으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꽂아 놓은 채 하루에 몇 번 씩 바라보고 만져본다.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나 모두 자신의 고통 속에서 희망 따위는 없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어떤 분은 건강 문제로, 어떤 분은 부부간의 문제로, 어떤 분은 어쩔 수 없이 진 카드 빚 때문에.....

 

사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 곳에서도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세상은 전쟁과 살륙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고 정치는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고 청년실업자는 나날이 늘어나고 가난한 사람과 돈 많은 사람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문화는 퇴폐의 징후를 보이고 종교는 자신의 아성 속에서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의 배만 불리려고 하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세 명의 여인이 떠오른다.
마더 데레사, 배우 오드리 헵번, 그리고 배우 김혜자.
진정으로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구절이 이 시대에 복음처럼 들려온다.

 

앙리 듀낭이 솔페리노의 참상 속에서 느꼈던 바로 그 진실을 오늘 배우 김혜자는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혜자씨 역시 처음에는 절망을 느꼈다.
처음에 에티오피아를 방문하고 나서 너무도 절망이 컸던 나머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큰 절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로 공단의 어느 미싱사 아가씨가 소년소녀 가장 돕기에 쓰려고 꼬깃꼬깃 모아두었던 돈 8만 천 원을 사랑의 빵 성금으로 내고 싶다는 전화를 받는 순간

 

"신이 나의 손을 잡아 이끄는구나."하고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절망적인 이 시대 속에서, 우리 개인의 온갖 절망을 넘어서 나는 희망을 본다.
오늘 나는 깊은 절망 속에 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절망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8만 천 원을 내놓겠다고 했던 가난한 미싱사 아가씨, 배우 김혜자, 그 예뻤던 오드리 헵번, 그리고 인류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그래, 이들이 있는 한 아직도 희망은 있다.

 

마지막으로 김혜자씨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한테 제대로 해주지 못해 늘 미안했는데 그런 아이들은 엄마한테,
'새벽 3-4시까지 책 읽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고 오히려 이해해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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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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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의 <현의 노래>가 아닌< 칼의 노래>를 펼치니 첫 장에 이런 말이 나온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작가의 고독한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소위 당대의 희망이라는 것과 한 발자욱 떨어진 자리에서 세상을 관조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니 그 자신은 그럴 수 밖에 없음을 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또한 우리의 삶이 아닌가? 어떻든 이 세상과 화해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저자는 다시 거리로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희망이 사라진 시대이다.
어떤 구석을 둘러보아도 암담한 구석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희망을 거둘 수가 없다. 희망을 거두어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희망은 아마도 사랑에서 잉태될 것이다.
사랑은 생명의 근원이고 희망은 생명에서 비롯된다.
여성적인 것이야 말로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리라.
절망의 땅위에 오늘도 사랑의 결실로서 여성은
수태하고 출산한다.

하나의 절망이 독버섯 처럼 번져나갈 때
또 하나의 아주 연약한 희망이 태어난다.
끝없는 싸움과 같은 희망과 절망의 대결은
지금 승산이 없어 보일지라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자신을 던져서 아주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깜짝 놀라게 된다.

완고한 세계의 구조는 사악하지만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연약한 팔다리가
희망의 가교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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