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랜섬 릭스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다,라는 기준이 되어주지는 못하지만 '이 아이가 많이 컸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계는 산타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아차릴 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냥 착한 어린이에게만 선물을 주신대, 그러니 울면 안 돼,라고 속삭이던 부모님이 알고보니 몰래 선물을 가져다주는 할아버지였을 줄이야.(헉, 혹시 스포라면 죄송합니다.(__) 그러나 여기 오시는 분들은.. 이제 환상에서 깨어나셔도 괜찮지 않을까 변명을 해 보며^^;;)

 

  그러나 웃긴 건 나는 호그와트의 존재를 반쯤은 믿는다. 솔직히 100% 믿는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기에는 동양에는 마법학교가 부재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아니그러니까 나한테 부엉이 좀 날려보내라고!! 왜 꼭 유럽에만 가야하는겨!!─라는 머글의 열폭입니다. 흐허헝.

 

 

 

  여튼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베갯맡에서 할아버지가, 어머니가 들려주시곤 하던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슬픈 이야기는 슬프다고 울고, 무서운 이야기는 정말 무서워하며 온전히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가 그 세계 속에 '나'라는 존재를 집어넣어 상상을 해 본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상상을 소설 속 현실로 구현해냈다.

 

 

 

  그러나 주인공 제이콥은 확실히 다른 아이들과 다른 이야기를 듣긴 했다. 일단 '옛날 옛날에~'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들려주던,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동화보다는 조금 더 생생함이 있었으니까. 제이콥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언제나 포트먼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아원의 '이상한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진도 함께 꺼내 보여주곤 했다. 하지만 제이콥 역시 어린 시절에는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우와, 정말 그런 곳이 있어요? 하고 눈을 반짝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할아버지가 보여주신 사진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다만 '괴물'이 쳐들어온다며 온갖 무기를 구비해 두며 종종 발작을 일으키시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에게 맞춰주는 것은 그의 역할이었지만.

 

  그 날, 할아버지가 괴물이 찾아온다고, 그들을 막아내야만 한다고 발작적으로 자신을 부르던 할아버지가 영엉 돌아올 수 없던 곳으로 떠나버린 날, 제이콥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고 만다. 자신은 분명히 숲 속에서 괴물을 봤는데 그걸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이었는데 그걸 알 수 있는 건 제이콥 자신밖에 없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그리고 제이콥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제이콥은 할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 유언을 따라 영국의 케르놈 섬을 향한다. 그 곳에서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의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환상 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는 아예 작가의 역량 아래 그가 새롭게 창조해낸 세계를 무대로 그려내는 이야기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부터 참으로 꾸준히, 그러한 환상 소설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아왔다. 새로운 종족, 새로운 세계의 삶.

  두 번째는 일단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계를 기반으로 그 속에 이질적인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서 만들어낸 이야기다. 대표적으로 9와 4분의 3 승강장이라거나 정해진 공중화장실의 변기, 혹은 전화 부스를 지나 버리면 새로운 마법 세계가 펼쳐지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비롯해 넓게 보면 수많은 히어로물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랜섬 릭스의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후자에 속한다. 실로 이 소설은 현실과 상상 속 세계를 양분하는 경계를 상당히 자연스럽게 희미한 선으로 구분해 뒀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분명히 양분되어있음을 보여주면서.

 

  소설 속의 기묘한 사진들은 도대체 이런 사진들을 어디서 구한거야? 어떻게 합성한 걸까? 일단 그런 생각부터 든다. 표지 속 조용히 살짝 공중에 떠 있는 소녀에서부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위를 번쩍 들고 있는 소년, 이상한 옷을 입은 쌍둥이라거나 온몸에 벌을 두르고 있는 소년까지. 어느 정도의 조작이 가해진 것이 틀림없지만, 그리고 실로 몇몇 사진은 그 조작이 어느 정도 느껴지긴 하지만 랜섬 릭스는 일단은 그렇게 조작된 '실존하는 사진'을 바탕으로 그 사진이 진짜라면, 어린 시절 듣곤 했던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해 '이상한 아이들'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아름다워보이지만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살아가는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에는 본격적으로 그 세계를 둘러싼 반대 세력이 등장하면서 거대한 싸움이 있을 것을 암시하며 이야기가 진행되어간다. 그렇기에 책의 결말은 '이렇게 끝날 리가 없지'라는 후속편에 대한 강한 확신을 안겨주며 마무리된다. 실제로 작가의 블로그에 찾아가봤더니 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의 후속작을 쓰기에 여념이 없는 듯하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그가 창조해낸 세계의 기반을 설명하는 데 꽤나 많은 분량을 투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지루하기보다는 내가 있는 이 세계와 이상한 아이들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꼼꼼하게 바느질하며 자연스럽게 선을 지워가고 있는지라 크게 지루하지는 않다.

  덕분에 이상한 아이들의 세계와의 첫 만남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 시리즈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앞으로 아이들이 휘말리게 될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달렸다. 시침질은 끝이 났으니 본격적인 박음질이 꼼꼼해야 할텐데, 그저 그런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로 전락해 버릴지, 아니면 '이상한 아이들'의 이상한 능력들을 발휘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흘러가게 될지 궁금해지누나. 제발 또 그냥 '해리 포터'의 후계자라는 마케팅으로 울궈먹지 말고, 다른 행보를 보여주기를. 초반이니 해리 포터의 후계자라 말해주기도 뻘쭘하니 그 판단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자. 솔직히 해리 포터랑 닮은 건 '현실 속의 환상적 세계'를 그럴듯하게 그려낸 것 밖에 없다. 오히려 X맨에 더 가깝다.

 

 

 

  그러나 역시 '대박'의 조짐을 느낀 듯, 출간한 지 얼마 안 되어 20세기 폭스사는 이 작품의 영화화를 결정했다. 게다가 그 메가폰을 잡는 것은 팀 버튼 감독이라 한다. 그만의 감각으로 '이상한 세계'가 어떻게 시각적으로 구현될지를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를 숭배했다. …어렸을 때에는 포트먼 할아버지로부터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때에도 할아버지는 여전히 어딘가 신비로운 인물이었다._p.113 

 

다 허튼소리지, 뭐. 말했다시피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 아이들은 결코 평범한 고아들이 아니었단 거야._p.120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었던 바로 그 천국의 모습이었다. 이곳이 바로 신비의 섬이었고 이 아이들이 이상한 아이들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_p.177

 

물론 겉보기에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것이다. 똑같은 바람이 불고 똑같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의 느낌은 새로울 것이다. 이상한 아이들도 똑같겠지._p.222~223

 

아름다운 곳이고 편안한 삶이었지만 매일매일이 똑같다면, 그리고 아이들이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면 페러그린 원장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천국이 아닌 감옥이었다. 단지 사람을 취하게 할 정도로 유쾌한 감옥이어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고 마침내 알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서 떠나는 것이 너무 위험해진다._p.258

 

늘 평범한 삶에서 벗어나길 꿈꾸었지만 내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단지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_p.4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사관 살인사건 스토리콜렉터 7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일본의 3대 기서로 불리우고 있는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이 재출간되었다. 출판사와 번역을 새로 싹 바꾸어서.

  그렇다고 내가 딱히 이미 읽어본 책을 새로 읽어봤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일본 3대 기서에 다시 눈을 돌려볼 만한 계기는 충분히 되었으리라 본다.

  그래서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냥 책도 아닌 '기서'에 도전하다니!

 

 

 

  그렇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왜 도전했을까?]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이렇게 읽고 있어야 하는가, 자괴감에 빠졌다. 정말정말 오랜만에 공부할때 보는 책 말고 그냥 즐거우려 읽는 책에서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눈으로 글자만 훑는 바로 그 기분을 만끽했다고나 할까….

 

 

  


  전반적인 분위기는 말하자면, 상당히 김전일스럽다. 김전일 소년의 사건은 언제나 그렇다. 꼭 '몇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연쇄살인마의 피튀기는 연극의 서막이 될 줄은….'이라는 바로 그 레퍼토리. 그리고 도대체 일본에서 왜 이렇게 외국인들이 연쇄살인에 연루되는거야. 연극 무대는 언제나 기이한 구조 혹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저택으로, 꽤나 유서깊은 건축물에서 벌어지며 꼭 거기 사는 사람들 짜증나구로 저택 이름은 '죽음'을 암시하는 ㅇㅇ관이 대부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김전일 소년의 이야기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성을 따 왔을 뿐이지, 전반적인 분위기라거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거의 이런 데서 따 온거 아닐랑가 모르겠다. 그러나 <흑사관 살인사건>을 읽어보면 김전일 소년, 참으로 귀엽습디다.

 

 

 

  사실 이야기 구조 자체는 상당히 단순하다. 흑사관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 노리미즈는 장광설과 함께 추리하고 난리법석이다 → 그런데 그 추리는 어긋난다 → 빗나간 추리, 또 다른 피해자 발생 → 용의자가 점점 좁혀져 간다의 반복인 것이다. 조금 독특한 구조의 흑사관에서 모두의 알리바이가 불확실하거나, 모두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좀처럼 용의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흑사관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정말 말 그대로 '흑사관을 둘러싼 악마의 기운'으로 기인한 것인가, 라는 관련 인물들의 두려움이 책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추리라는 것이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다. 아니,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범행에 쓰여진 트릭 역시 어느 정도 파헤쳐지긴 하지만 '그걸 누가 하느냐'를 좁혀나가는 방법은 도대체가 상상을 할 수가 없는 방법이다.

 

 

 

 

노리미즈의 과학 특히 건축학적으로 흑사관의 설계자가 숨겨놓았던 의도를 파헤치는 장광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지식이 줄줄 이어지고 그 대화를 또 흑사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시를 읊으며 되받아친다. 아니 이 사람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그리고 또 웃긴 건 그런 대화 속에 노리미즈는 나름대로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상징과 암시를 흩트러놓고, 그에 반응하는 상대방이 무의식적으로 '시를 읊는데 이러이러한 게 의도적으로 억양이 어긋났다. 이건 내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는 상대방의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라고 추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헐.. 이거 뭐임..-_-;;

 

 

 

  그렇게 흑사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악마의 속삭임에 귀기울이고 만 '파우스트 박사'의 정체를 파헤쳐나가는 과정이 노리미즈의 어마어마한 장광설과 함께 이어져있다. 배음이 뭐고 시가 다 무엇이랴. 시의 원문을 억양 그대로 읽을 줄도 모르는데 그 억양에서 미세한 차이점을 발견해 내는 노리미즈를 도대체 어찌 해야 할까.

  처음에는 그래도 설마, 라는 마음에 한 번 나도 찾아봐야지~! 라는, 겁없이 도전을 했으나 오렌지를 먹고 몸에서 기이한 빛을 내뿜으며 살해당한 단네베르크 부인의 죽음에서 바로 손 들었다.ㅋㅋㅋㅋㅋ 노리미즈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벅찼으니까. 이걸 실제 원문과 대조하면서, 그리고 연재를 하는 동안 발생한 모순 등등을 피해가며 번역을 하신 번역가 선생님께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흑흑.

 

 

 

 

 

  오구리 무시타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1933년 결핵으로 쓰러지면서 대타로 나서 <완전범죄>라는 작품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대타 작가'라는 운명을 타고났던 것인지, 같은 해 <악령>의 연재를 시작한 에도가와 란포가 잠적하는 바람에 급히 또 대타로 들어가 연재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흑사관 살인사건>이라 한다.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라는, 그 시대 일본 미스터리의 두 거장의 대타로 들어선 오구리 무시타로는 그 사이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새기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오컬트와 엄청난 현학적 지식을 뽐내면서 독자들을 악마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것은 아닐까. 확실치는 않아도 일단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이리저리 현혹시켜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전쟁터에 책을 들고 가서 정신을 놓아버리려는 독자가 등장할 정도로 말이다….

 

  다른 의미에서 오구리 무시타로는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 파우스트 박사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범죄란 동기에서만 출발하는 게 아니야. 특히 지적 살인은 일그러진 심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 물론 그리되면 일종의 사디즘 형식을 띠는데……. 종종 감정 외에도 특정한 감각적 착각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억압을 강요받는 경우에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있다네. 나는 흑사관의 음울한 성채에 그렇게 비도덕적인, 어찌 보면 악마적인 성능이 있다고 확신해._p.293

 

이제는 아셨겠지만 저는 사실 사건 관계자를 비추는 심상경으로 시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상징을 흩뿌려놨죠. 다시 말해 거기에 맞는 부호나 대응을 징후로 해석해, 그것으로 심층 심리를 알아내려 했습니다._p.392

 

<흑사관 살인사건>을 읽다 보면 과연 작가는 자기가 인용한 작품이나 학술 자료들을 다 읽어봤을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몇 가지는 끝내 찾지 못했지만 작품 속 인용은 대부분 실존하는 자료입니다. 오구리 무시타로의 어마어마한 독서량과 작품 속에서의 적절한 사용으로 볼 때, 도서실의 장서 목록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리미즈가 추리에 언급하는 지식은 그가 직접 읽고 이해한 자료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_p.521, 역자 후기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름만으로도 전설이 된 존재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엘러리 퀸]은 상당히 영리했다. 두 명의 사촌 형제의 공동 작업은 [엘러리 퀸]이라는 필명을 등장시켰고 그것을 자신들의 소설 속 주인공 '탐정'에게 부여하면서 탐정 소설의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단단히 새겨넣은 것이다.

 

  정작 '세계 3대 미스터리'라는 누가 선정했는지 모를 정체 불명의 또 다른 '명예의 전당'에는 엘러리 퀸의 <Y의 비극>이 자리하고 그 곳에는 '엘러리 퀸'이 아닌 '드루리 레인'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서도… 심지어 그 작품은 '엘러리 퀸'이 아닌 '바너비 로스' 명의로 발표했다. 뭔가 모순적인가? 크크크.

 

  어쨌든 만프레드 리 그리고 프레더릭 다네이의 역사적인 첫 공동 작업이자 그들의 데뷔작, 그리고 '국명 + 명사 + 미스터리'라는 형식으로 작품이 출간되어 '국명 시리즈'를 이루고 있는 그 출발점이기도 한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읽었다.

 

 

 

  192X년 가을,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던 연극 <건플레이>를 상연하는 로마 극장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마침 사건 현장에 있던 형사의 신속한 대응과 사건 발생 당시 극장 주변의 직원들의 증언을 통해 극장 밖으로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건 현장을 찾은 리처드 퀸 경감과 소설가로 활동하는 그의 아들 엘러리 퀸. 그들의 날카로운 관찰력과 경찰들의 꼼꼼한 극장 내부 조사, 피해자의 신원 그리고 피해자와의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이 극장에 머물렀음이 밝혀지면서 용의자가 상당히 좁혀진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모자'가 당췌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극장의 모든 곳을 다 뒤져봐도, 손님들을 내보내면서 신체 검사를 했음에도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다는 모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인 역시 너무 빠른 시간 내에 약효를 발휘한 정체 불명의 독살인데다 극장에서 피해자를 시체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조차 짐작가지 않는 퀸 부자는 '사라진 모자의 행방'이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모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날을 시작으로 퀸 부자는 범인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팔기 시작한다. 악덕 변호사였던 피해자 몬테 필드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혹은 가지고 있을 법한) 사람들을 심문하며 그날 로마 극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퀸 부자의 추측 그리고 추론이 반복되는데, 독자들은 그렇게 그들로부터 힌트를 얻어 함께 사건의 진상을 찾아 나름대로 추론을 시작한다. 이제 '연역 추론'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 싶을 즈음엔 막간이 등장해선 '이제는 힌트 줄 만큼 줬으니까 당신도 한 번 풀어보시지'라는 엘러리 퀸의 발칙한(?) 도전장이 등장한다. 헹, 그렇단 말이지!

 

  흔쾌히..까지는 아니고 나 나름대로도 추리를 펼쳐가고 있었기에 한 번 쯤 도전해 볼만하다, 그리 생각했다. 나름대로 혼자 하고 있던 생각을 엘러리 퀸이 불쑥 말하며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하나의 가능성을 소거할때는 이렇게 힌트까지 준단 말이야! 더더욱 포기할 수 없어!라는 마음에 열심히 머리를 짜내봤다. 엘러리 퀸이 내어놓은 퍼즐은 정말 일대일의 상황에서 대결하라면 이기기 힘들진 몰라도 어느 정도 카운터펀치를 먹일 수 있을 정도의 추론의 요소가 등장했다는 것, 인정한다.

 

  게다가 독자들도 자기만의 메리트를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라면, 하다못해 <소년 탐정 김전일>을 한 번 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것. '누가 봐도 범인 같은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라는 추리소설의 뻔하디 뻔한 법칙. 아니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었어! 라는 바로 그것 말이다.(사실 이제 너무 당연해져 그게 반전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으악.)

  이를 생각해 보면 살포시 일단은 가장 감옥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을 살포시 소거한다. 모자의 행방을 함께 생각해 보면 용의자의 범위는 좁혀진다. 다만 그 중에서 딱 한 명을 자신있게 꼬집기가, 그리고 그 용의자가 정확히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그러니까 찍었다는 소립니다.-_-;). 아, 아쉬워라! 발끝까지 쫓아가긴 했는데. 힝.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이 <로마 모자 미스터리>야 말로 엘러리 퀸의 도전장을 흔쾌히 받아들여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그들의 데뷔작이고, 작품을 써내면 써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발전하고 있을 것이고(아니 독자도 발전한다고 왜 말을 못해 왜!), 실제로 <그리스 관 미스터리>는 엘러리 퀸 국명 시리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있으니 그나~마 초반의 작품이라 허술할 때 한 번 뒤집어줘야하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리 생각하니 더더욱 아쉽다. 아, 아쉽드래용!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만, 그래도 승리에 많이 근접했던 패자의 변─어차피 패자면 패자! 그 이분법이 너무 슬프지 않나요. 행복은 승리에서만 오는 게 아니잖아요!─을 잠깐 써 보련다. 와 나 정말 억울했나봐. 그리고 이것은 역시 지금에 와서 미스터리를 읽으면서 독자들이 많이 아쉬움을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기에, 라는 변명을 미리 해 둔다.

 

  일단 범인을 좁혀가기에 '동기'가 너무 안 보인다. 왜냐면 정말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너무도 뻔한데 앞서 말한 '추리소설의 법칙'에 따라 그 사람은 범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음하하. 그리고 나머지 쩌리들(미..미안하오 죽을 죄를 지었소 범인님..) 중에서 사람을 죽일만한 동기는 숨어있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연역 추론은 좋았으나, 그 논리 안에는 역시 알 수 없는 인간 세상의 미묘함을 녹여내기에는 조금 아쉬운 것이다.(그러나 난 지난 번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에서도 이야기했듯 여기에는 좀 관대하다. 져서 억울할 뿐이드래용.)

 

  그리고 또 하나. 나를 포함한 선량한 시민들은 독극물에 대한 지식을 잘 모른다. 아니 독극물로 사람을 죽였고 독극물 전문가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같이 선량하기 짝이없는 사람은 그걸로 사람을 죽여보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응용력이 당연히 딸릴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거기서 선점한 엘러리 퀸 당신이 이겼소. 그래 내가 졌다고!

 

 

 

  변명을 해놓고 이제와서 이런 말 하기는 웃기지만 쿨하게 패배를 인정한다. 사실 그야말로 '이 장에서는 ~일이 벌어진다'라는 목차와 그를 정확히 따르고 있는 소설 속의 진술,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조금 간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역시 시간의 흐름과 자연 법칙을 따르는 법. 자연 법칙을 따르는 용의자와 증거들을 따라 집요한 추적 그리고 치밀한 추론을 끝낸 뒤 날렵하게 증명종료, Q.E.D.를 외치는 엘러리 퀸, 그래 당신 멋있어요!

 

 

 

 리처드 퀸 경감은 외모나 태도에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사람이었다. 단지 작은 몸집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신사일 뿐이었다. 그는 늘 구부정한 자세로 걸었다. 하지만 숱 많은 머리칼과 특수염 그리고 부드러운 회색 눈과 늘씬한 손은 경감인 그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어울렸다._p.32

 

 

엘러리 퀸은 아버지보다 키가 15센티쯤 컸으며, 어깨가 떡 벌어져서 걷는 모습이 늠름했다. 그는 짙은 회색 양복 차림에 가느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콧잔등에는 체격 좋은 사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테 없는 코안경이 걸쳐 있었다. 하지만 갸름한 얼굴이나 눈썹, 반짝이는 눈 때문에 스포츠맨보다는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_p.36

 

 

없어진 실크 모자에 대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또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사건을 해결하는 데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인이 그 모자를 노리고 살인을 계획했는가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밝혀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모자에 어떤 의미가 있었다면 범인은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하는 거죠. 저는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범인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범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 또한 범인이 로마 극장에 오기 전에는 모자 안에 숨겨져 있는 어떤 물건에 대해 몰랐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근거입니다. Q.E.D._p.138~139

 

 

이거 참 총체적인 난국이네요. 필드에 대해 캐면 캘수록 놈을 죽인 범인에게 수갑 채울 생각이 사라지는군요._p.2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본격 추리는 서글프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비애이다._아스카베 가쓰노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이름이라면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것이 바로 '신본격 미스터리'다. 아야츠지 유키토와 함께 신본격 미스터리의 기수로 평가받고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니만큼, 역시 꼼꼼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트릭을 기반으로 하는 수수께끼 풀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언제나 '본격 미스터리'로 분류되어있는 미스터리 작품에 아쉬움으로 따라나오는 것이 '동기'라는 측면이다. 실제로도 그 동기의 취약성에 반하여 사회파 미스터리가 출현하기도 했고.

  언제나 소설의 흐름상 '누가봐도 피해자에게 가장 깊은 원한을 품은 사람'이 그대로 범인이 되어버린다면 본격 미스터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반전의 측면에서 임팩트가 확 사라져버리기에, 조금 미적지근하더라도 의외의 인물이 사실은 범인이었다는 형태로 진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듯 내 나름대로는 '동기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반전'을 위해 조금은 뒤편으로 밀어두고, 그 부족함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찾아보자고 위안을 삼곤 한다. 물론 모든 측면에서 훌륭하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말이다.

 

  <주홍색 연구>의 해설을 맡아준 아스카베 가쓰노리는 그래서 신본격 미스터리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수수께끼의 향연과 언제나 공존하고 있는 그 '미적지근함'을 서글프나 영광스러운 비애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히무라와 아리스에게 오랜 시간 동안 경찰들이 공을 들여 꼼꼼하게 수사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증거와 관련 인물들의 빈약한 알리바이, 그리고 살인에까지 이어질 정도로 강력한 동기를 찾지 못한 채 미궁에 빠져버린 2년 전의 사건이 찾아온다. 이는 부모님의 죽음, 살고 있던 집에서 벌어진 방화사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2년 전의 사건으로부터 오렌지색 공포증을 얻게 된 기지마 아케미라는 히무라의 제자의 부탁에서 기인한 것이다.

 

  2년 전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그리고 마침 그 주변에 동료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살고 있었기에 히무라는 아리스의 집으로 향하고,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또 다른 살인 현장을 맞닥뜨리게 된다.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범인의 도전장은 과연 히무라가 조사하고자 했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범행 현장으로 향하던 중 지나쳤던 남자가 피해자와 면식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를 확보하면서 그들이 새로 맞닥뜨린 살인사건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밀하게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고, 자신의 목을 죄어올 수 밖에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히무라는 우선 오랑제 유히가오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범인의 함정에 빠져버린 남자의 알리바이를 깨부수고, 그리고 다시 2년 전의 기묘한 살인 현장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히무라-아리스 콤비가 맞닥뜨린 사건은 누가 범인이 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고, 살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사건은 벌어졌고 범인은 주홍빛 노을 뒤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동기', 아마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작가 아리스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히무라는 시체와 범행 현장에 남겨둔 범인의 속삭임에 귀기울인다. 그리고 아리스는 속삭이는 범인의 목소리 속 흔들림을 읽어낸다. 그렇게 노을빛 아래에서 콤비가 펼쳐놓은 사건의 진상 속에서, 나는 살인범의 붉디 붉은 주홍빛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나만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랬다.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통해 위대한 탐정 셜록 홈스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의 제목을 차용함으로써 빈약한 동기에 대한 도전장을, 혹은 오마주를 보내고 있다. 굳이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주홍색 연구>를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 역시 탐정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조수이자 기록자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관계가 홈스와 왓슨의 관계를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의 화자 아리스의 입을 빌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미스터리를 쓰고 있는 자기 자신 그리고 소설 속에서도 여전히 미스터리를 쓰고 있는 아리스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미스터리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아리스 아리스 하니 엄청 헷갈리누나..ㅋㅋ;;).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 앞에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미스터리의 서글픔을.

 

  게다가 일관적으로 소설을 감싸고 있는 배경은 제목 그대로 짙은 주홍색이다. 이토록 일관적이고도 강렬하게 색채에 뒤덮여 있는 소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실로 하늘을 불태우는 듯한 노을은 그저 산란되지 않은 빛이 인간의 눈에 들어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사건을 둘러싼 기이한 현상을 무미건조한 과학으로 해체시켜버리는 본격 미스터리 트릭은 노을을 닮았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노을의 미적지근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미적지근함 속의 뜨거운 근원을 그려내고 있다. 서글플 수 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에 색채의 강렬함과 함께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죽은 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_p.211~212

 

 

……이걸로 됐다,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도 바다도, 눈에 비치는 모든 광경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어요.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어요. 아아, 태양이 나를 집어삼켰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키기는 커녕 네게 상처를 주었구나. 부디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잊어줘._p.368

 

 

"어째서 다들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는 전조인데."

"석양은 몰락의 상징이기도 하고, 분명 어둠이 저조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무는 거니까."_p.373

 

 

 

+. 그렇다고 동기에 엄청난 필연이 부여되었느냐, 그건 아니다. '나름' 뜨겁다는 것이다.

++. 사실 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처음 읽었다.-_-;; 아는 척 해서 미안해요 아리스가와 선생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밀실을 향해 쏴라 이카가와 시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임희선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어언 세 번째로 만나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이다보니 이제 더 이상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서도, 그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준에서 내 멋대로 하는 이야기이므로 한 마디라도 히가시가와 도쿠야만의 매력을 한 번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없이 가볍고 유머러스한 그만의 문장 속에는 의외로 치밀한 트릭이 녹아 있다' 라고나 할까.


  그의 데뷔작이자 이카가와 시 시리즈인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는 하룻밤 사이 두 건의 살인사건에 휘말려 그 용의자로 지목받는 대학생 청년이 탐정인 제부와 함께 은신하는 한편 나름대로 '밀실의 열쇠를 빌려주며' 독자로 하여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리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 수수께끼의 풀이와 함께 자칭 '명탐정과 그의 제자'의 만담 아닌 만담, 그리고 의외의 복병이었던 '명형사와 그 부하'의 골때리는 대화 속에서 터지는 웃음은 보너스 정도?

  그리고 상황 설명과 함께 군데군데 작가 스스로 한 마디 하지 않으면 못 배기겠다는 듯 툭툭 내던지는 말은 어쩌라고 싶으면서도 의외로 등장 포인트가 명백해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유머를 선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카가와 시 시리즈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밀실을 향해 쏴라> 역시 그 특색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편이다.



간토 지방 어떤 현에 있다고 했던가, 없다고 했던가? 아니면 예전에 그런 도시가 있었다고 했던가? 아무튼, 뭐 그런 도시 이카가와 시에 대해 독자 여러분은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_p.7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히가시가와 도쿠야라는 작가의 입이 제일 처음 떨어지면서 꺼냈던 이야기와 상당히 흡사하게, 그러면서도 능청스럽게 스리슬쩍 이카가와 시를 기억해 보라는 듯 시치미를 떼면서 만담 아닌 만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에 이어, 근무 시 태도는 정말 불성실하기 그지없으면서 필요할 때는 충분히 냉철해지는 '명형사' 콤비가 역시나 조금은 방심한 상태에서 근무를 하는 도중 사제 권총이 이카가와 시에 반출되어버리는 소설같은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밀실을 향해 쏴라>는 제목에 걸맞게 언제 어디서나 권총이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도록 스리슬쩍 무대를 세팅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예상치 못하게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등장했던 우카이 모리오 탐정과 그의 처형 도무라 류헤이, 그리고 책에서 역시 등장하며 지난 번 사건의 알리바이를 상당히 꼬이게 만들었던 맨션의 여주인 니노미야 아케미가 우카이 탐정 사무소와 얽히면서 탐정 측 역시 스리슬쩍 팀을 짜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밀실을 만드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인적 드문 해변가에서 노숙자의 시체가 발견되고, 도무라 류헤이가 죽은 노숙자 긴조 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변을 거닐다 주죠지 그룹의 회장, 그리고 그의 손녀를 만나게 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찌어찌 사건 의뢰를 받아들여 주죠지 그룹에 하룻밤 머물게 된 우카이 모리오 그리고 도무라 류헤이. 잠든 밤, 우카이의 발을 향해 총알이 날아오면서 시작된 총성 소리는 토리노미사키의 주죠지 저택을 뒤흔들고, 잠에서 깨어난 주죠지 저택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중 쥐도 새도 모르게 복면을 쓴 총기남은 저택에 머물고 있던 손님 한 명을 살해한다. 덩달아 사건 현장 근처에서 한 명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고… 저택을 뒤흔든 총성의 행방을 파헤치는 것이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총기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엄살은 있는대로 다 부리던 '자칭 명탐정' 우카이 모리오 측 그리고 '명형사' 시나가와 경부와 시키 콤비 측은 서로를 견제하며 총성에 감춰진 범인의 알리바이를 쫓기 시작한다.




"이번 사건은 그렇게 단순한 밀실하고는 차원이 다르니까. 범인은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근 게 아니야."

"아니, 그럼 밀실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 밀실 맞아. 아마 중인환시(衆人環視)의 밀실이지."_p.256




  작가 스스로도 그렇게 '밀실 만들 정신 있으면 도망이나 빨리 칠 것을!'이라는, 범인의 정곡을 찌르는 핵심을 인정하면서도 밀실 살인사건에 대한 로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두 편에서 연달아 밀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저 자물쇠를 걸어잠근 밀실 대신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서 밀실이 만들어진 상황을 상정한 것이다. 뭐, 실은 이러한 밀실─솔직히 중인환시의 밀실이라고 부를 줄은 몰랐지만─은 이미 많은 미스터리 소설에서 접해본 형태이지만.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는 특정한 미스터리에서 형성된 밀실의 형태를 어느정도 가져와 변형을 꾀했다면, <밀실을 향해 쏴라>는 밀실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범인을 좁혀가라는 듯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용의자의 범위를 좁히는 것은 쉽다. 순식간에 단 한 명으로 좁혀진 용의자는 역시나 예상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인환시의 상황─많은 사람들이 둘러싸 지켜보고 있는─에서 여덟 발의 총알이 들어있었던 총성의 행방을 찾는 것은 나름대로 정교한 추론이 필요했고, '동기'의 측면에서도 완전한 복선은 아닐지언정 초반부터 꽤나 암시를 주고 있었기에 그 부분을 놓쳐버렸던 것이 아쉽기도 했다.

  역시, 히가시가와 도쿠야는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 속에서도 의외로 촘촘하게 퍼즐 조각을 흩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반전을 위한 반전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생각했던 그대로의 추리에서 끝나버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다. 메인 요리에 손을 댈 것은 아닐지언정 자그맣지만 의외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디저트를 마련해 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작의 그 의외성에 허를 찔렸던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요리의 양념이라 할 수 있는 '유머' 역시 전작만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냥 띨띨해 보였던(?) 도무라 류헤이가 '명탐정의 제자'로서 나름대로 착실히 훈련을 하면서 경험치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고무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기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웃음을 주는 빈도 역시 조금 줄어들었다.

  훌륭한 요리였지만, 역시 처음 맛볼 때의 기대감과 설렘이 조금 부족해서인지 비슷한 요리를 두 번째로 먹을 때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마련인가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