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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본격 추리는 서글프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비애이다._아스카베 가쓰노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이름이라면 자연스럽게 따라나오는 것이 바로 '신본격 미스터리'다. 아야츠지 유키토와 함께 신본격 미스터리의 기수로 평가받고있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니만큼, 역시 꼼꼼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트릭을 기반으로 하는 수수께끼 풀이가 떠오른다.
그러나 언제나 '본격 미스터리'로 분류되어있는 미스터리 작품에 아쉬움으로 따라나오는 것이 '동기'라는 측면이다. 실제로도 그 동기의 취약성에 반하여 사회파 미스터리가 출현하기도 했고.
언제나 소설의 흐름상 '누가봐도 피해자에게 가장 깊은 원한을 품은 사람'이 그대로 범인이 되어버린다면 본격 미스터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반전의 측면에서 임팩트가 확 사라져버리기에, 조금 미적지근하더라도 의외의 인물이 사실은 범인이었다는 형태로 진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듯 내 나름대로는 '동기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반전'을 위해 조금은 뒤편으로 밀어두고, 그 부족함은 사회파 미스터리에서 찾아보자고 위안을 삼곤 한다. 물론 모든 측면에서 훌륭하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말이다.
<주홍색 연구>의 해설을 맡아준 아스카베 가쓰노리는 그래서 신본격 미스터리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수수께끼의 향연과 언제나 공존하고 있는 그 '미적지근함'을 서글프나 영광스러운 비애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히무라와 아리스에게 오랜 시간 동안 경찰들이 공을 들여 꼼꼼하게 수사하고 있음에도 부족한 증거와 관련 인물들의 빈약한 알리바이, 그리고 살인에까지 이어질 정도로 강력한 동기를 찾지 못한 채 미궁에 빠져버린 2년 전의 사건이 찾아온다. 이는 부모님의 죽음, 살고 있던 집에서 벌어진 방화사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2년 전의 사건으로부터 오렌지색 공포증을 얻게 된 기지마 아케미라는 히무라의 제자의 부탁에서 기인한 것이다.
2년 전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기 위해, 그리고 마침 그 주변에 동료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살고 있었기에 히무라는 아리스의 집으로 향하고, 도착한 바로 다음 날 또 다른 살인 현장을 맞닥뜨리게 된다.
대담하다고 할 수 있는 범인의 도전장은 과연 히무라가 조사하고자 했던 과거의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러나 범행 현장으로 향하던 중 지나쳤던 남자가 피해자와 면식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유력한 용의자를 확보하면서 그들이 새로 맞닥뜨린 살인사건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범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치밀하게 또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고, 자신의 목을 죄어올 수 밖에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히무라는 우선 오랑제 유히가오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범인의 함정에 빠져버린 남자의 알리바이를 깨부수고, 그리고 다시 2년 전의 기묘한 살인 현장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히무라-아리스 콤비가 맞닥뜨린 사건은 누가 범인이 되어도 크게 이상하지 않고, 살의를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역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사건은 벌어졌고 범인은 주홍빛 노을 뒤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동기', 아마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작가 아리스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히무라는 시체와 범행 현장에 남겨둔 범인의 속삭임에 귀기울인다. 그리고 아리스는 속삭이는 범인의 목소리 속 흔들림을 읽어낸다. 그렇게 노을빛 아래에서 콤비가 펼쳐놓은 사건의 진상 속에서, 나는 살인범의 붉디 붉은 주홍빛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나만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그랬다.
<주홍색 연구>라는 제목을 통해 위대한 탐정 셜록 홈스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의 제목을 차용함으로써 빈약한 동기에 대한 도전장을, 혹은 오마주를 보내고 있다. 굳이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주홍색 연구>를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 역시 탐정 히무라 히데오와 그의 조수이자 기록자인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관계가 홈스와 왓슨의 관계를 닮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의 화자 아리스의 입을 빌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미스터리를 쓰고 있는 자기 자신 그리고 소설 속에서도 여전히 미스터리를 쓰고 있는 아리스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미스터리에 대한 향수와 애정을 드러내기도 한다(아리스 아리스 하니 엄청 헷갈리누나..ㅋㅋ;;).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 앞에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미스터리의 서글픔을.
게다가 일관적으로 소설을 감싸고 있는 배경은 제목 그대로 짙은 주홍색이다. 이토록 일관적이고도 강렬하게 색채에 뒤덮여 있는 소설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나 실로 하늘을 불태우는 듯한 노을은 그저 산란되지 않은 빛이 인간의 눈에 들어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사건을 둘러싼 기이한 현상을 무미건조한 과학으로 해체시켜버리는 본격 미스터리 트릭은 노을을 닮았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노을의 미적지근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 미적지근함 속의 뜨거운 근원을 그려내고 있다. 서글플 수 밖에 없는 본격 미스터리에 색채의 강렬함과 함께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보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죽은 자에게도 묻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했나요? 나를 용서해주겠어요? 울며불며 매달려도 대답은 없습니다. 상대는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또다시 묻고 말아요. 추리소설은 그런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_p.211~212
……이걸로 됐다,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하늘도 바다도, 눈에 비치는 모든 광경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어요.참으로 이상한 광경이었어요. 아아, 태양이 나를 집어삼켰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키기는 커녕 네게 상처를 주었구나. 부디 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은 잊어줘._p.368
"어째서 다들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는 전조인데."
"석양은 몰락의 상징이기도 하고, 분명 어둠이 저조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무는 거니까."_p.373
+. 그렇다고 동기에 엄청난 필연이 부여되었느냐, 그건 아니다. '나름' 뜨겁다는 것이다.
++. 사실 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처음 읽었다.-_-;; 아는 척 해서 미안해요 아리스가와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