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 코이가쿠보가쿠엔 탐정부 시리즈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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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되면 '믿고 보는' 히가시가와 도쿠야다.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가 이제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작품을 네 번째로 만난 셈이니 성급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다.


  탐정부 부부장 키리가미네 료의 방과 후를 여덟 장면으로 그려내고 있는 단편집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는 그래도 역시 학교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내고 있다보니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 대신 소소한 미스터리를 그려내고 있다. 다행히도 사망자수는 (아직까지는) 제로.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당히 탄탄한 트릭과 의외로 허를 찔러오는─정말 선입견을 가지지 않겠노라고, 속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당했다!─반전은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역량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구나. 웃고 있다가 아차, 하고 앉은 자세를 고쳐앉는 독자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을 작가를 생각하니 으악, 얄밉다.

 

 

 

 

 

  단연코 추천하고 싶은 단편은 적절하게 수미상관(?)을 이루며 처음에 당한 굴욕을 잊지 않고 이번에는 지지 않으리라, 머리를 마구 굴리고 있는 독자에게 또 한 번 스리슬쩍 뒷통수를 건드려주는 「키리가미네 료의 굴욕」과 「키리가미네 료의 두 번째 굴욕」이다. E자 모양으로 생겨 E관으로 불리는 곳에서 사라진 범인을 추격하는 키리가미네 료에게 누가 어떤 굴욕을 안겨준 것일까? 덧붙이자면, 이번에 이 작품이 드라마화되던데 절대로 소개를 읽지 말고 먼저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왜냐고? 읽어보면 압니다.



  탐정부 부부장이니 사건을 해결하겠노라 큰소리를 치지만 어리버리하게 헛다리를 짚고 함께 방과 후에 사건에 휘말린 친구나 선배 혹은 선생님들이 사건을 해결할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부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키리가미네 료의 역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골때리는 육상부 부장 덕에 운동장 한가운데서 「키리가미네 료의 절규」를 내지르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독살을 이용한 살인 미수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키리가미네 료와 보이지 않는 독」의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X의 비극을 안 읽어봐서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UFO의 등장에 얽힌 사건은 「키리가미네 료와 X의 비극」이라는 제목 속에 담겨 있다. 「키리가미네 료와 방과 후」에 어슬렁거리는 양아치와의 에피소드, 하늘에서 사람이 뚝 떨어지더니 만들어진 「키리가미네 료와 옥상 밀실」의 상황 역시 의외의 진실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함께 드러난다.

 

 

 

 

 

 

  상당히 매력적인 '키리가미네 료'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코.. 코이가쿠보가쿠엔(이건 절대 못 외울 것 같다...-_-;;) 고등학교 탐정부 부부장의 활약을 그려내고 있는 <방과 후는 미스터리와 함께>는 사실 번외편이라고 한다. 어디서나 다 한다는 탐정 소설 연구회와 비교하지 말라는, 진짜 탐정으로서 활동한다는 탐정부 부원들은 상당히 시크하게도 소설 연구는 커녕 미스터리 소설 같은 것도 읽지 않는다고. 부부장이 방과 후에 휘말리는 사건이 이러한데, 정작 그들이 전면에서 활약하는 다른 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벌써부터 다른 작품들이 기다려지누나.

 

 

 

 

 

 

  긴 말 않겠습니다. 읽어보세요. 저 진지합니다.

 

 

 

 

 

나는 은연중에 상처를 입었다. 명탐정이나 가능할 줄 알았던 내 추리가 평범한 할아버지도 농담 삼아 꺼낼 만한 내용이었다니. 홈런을 취소당한 기분이다._p.27, 「키리가미네 료의 굴욕」


선생님의 말에 그만 나도 발끈하고 말았다. 이래 봬도 탐정부 부부장인 나를 붙들고 논리적 사고가 몸에 배어 있지 않다고 하시다니, 그게 어디 탐정부 부부장에게 하실 말씀인가. 덧붙여 말하자면 탐정부란 흔히 있는 탐정 소설 연구부와는 차원이 다른 탐정 활동 실천을 목표로 하는 동아리다. 유래가 수상쩍을지언정 교내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문화계 동아리이다. 논리적 사고라면 오히려 전문 분야다._p.125, 「키리가미네 료와 X의 비극」


"안 가지고 있다면 이 창고 어딘가에 숨겨놨겠군. 네 담배와 라이터를 찾아내면 확고한 증거겠지?"

"좋아요. 찾을 수 있음 찾아보세요."

"그럼, 찾아내 주고말고. 찾는 김에 하나 물어보자. 네 담배 상표는 뭐냐?"

"마일드 세븐, 라이터는 카네모토의 2,000 안타 달성 기념 지포."

"좋아, 두고 봐라. 꼭 찾아낼 테니!"

아니, 선생님. 찾고 안 찾고를 떠나 아라키다는 이미 자백한 거 아녜요?_p.167, 「키리가미네 료의 방과 후」


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상공에서 떨어진 사람은 맹렬한 기세로 내 앞에 있던 에이코 선생님을 덮쳤다. 선생님은 그 충격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마치 방심하여 등을 보인 프로 레슬러 점보 쓰루타에게 로프를 이용해 몸을 날려 공격한 멕시코의 전설적인 레슬러 밀 마스카라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적합한 비유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깜짝 놀라게 한 광경이었다._p.208~209, 「키리가미네 료의 옥상 밀실」


"선생님, 남자 육상부에서 아다치에게 살의를 가질 만한 인물이 있을까요?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우리 육상부에 아다치 슌스케를 죽이고 싫어하는 녀석은 한 명도 없어. 허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언젠가 꼭 한 번은 패주고 싶다고 벼르는 애들은 있지. 스무 명쯤 될걸."

스무 명? 많잖아.

"남자 육상부 정원이 몇 명인데요?"

"스물한 명이다."_p.255, 「키리가미네 료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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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세컨즈 2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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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리뷰와 동일합니다.

 

 

  그저 성범죄자에게는 무조건 강도높은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국가가 해주지 않아 그 억울한 마음을 자신의 손으로 복수함으로써 푸는 것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고, 그렇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선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문제를 조망하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일깨워줬던 소설 <비스트>가 있었다. <비스트>의 마지막을 덮고 난 뒤의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책 속에 녹아있던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메시지에 그리고 성범죄자와 그를 둘러싼 감옥 생활의 끔찍함에 치를 떨며 읽었던지라 정작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경찰과 검사와 교도소장 등의 등장인물들은 까먹고 있었나보다. 한참 책을 읽어나가던 중 <비스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상황이 문득 언급되는 것에 황급히 <비스트>를 뒤적이며 등장인물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리 세컨즈>는 <비스트>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벌어진 이야기이다. 잊고 있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쓰리 세컨즈>에서 또 다른 사건에 맞닥뜨린다. 앞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또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그리고 또 거기에 무슨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약 운반책들에게 마약을 토해내게 하고 한편으로는 구매자와 거래를 시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약 판매를 책임졌던 피에트 호프만은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고 현장을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베트 그렌스를 포함한─은 사건 발생 현장을 꼼꼼히 분석하고 용의자를 물색하지만 쉽사리 꼬리가 밟히지 않는다. 윗선에서는 파헤쳐야 할 다른 사건이 많이 있으니 수사가 여의치 않은 이 사건 역시 크게 파헤치지 않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형사, 에베트 그렌스는 끈질기게 신고 전화의 목소리와 주변을 분석하며 사건 현장은 마약 거래 현장이었음을 추리해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약상과 형사의 추격전이 그려지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뿐이라고? 루슬룬드, 헬스트럼 콤비가 그려낸 이야기가? 바로 그 <비스트>를 써냈던 그들이?


  처음에는 이뿐이리라 생각했다. 경찰은 마약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경찰이 마약 거래 현장에 위장 잠입을 해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 한다,는 줄기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생각했다. 범죄 조직에 경찰 대신 경찰과 손을 잡은 범죄자가 잠입한다는 것만이 그들이 색다르게 설정한 소재라 하기엔 너무 단편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안전하긴 하겠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뭔가 너무 아쉽다.






  경찰의 끄나풀이 되어 제발로 교도소에 들어간 '파울라' 피에트 호프만이 어떻게 임무를 마친 다음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가 아니다. 호프만은 과연 살아서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가 이 소설의 주요한 줄기다.


  범죄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려는 대단하신 '윗분들'의 결정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하면서 호프만은 그야말로 언제 죽을 지 모를 위기에 처한다. 한편, 호프만의 그림자를 끝내 발견해내고야만 에베트 그렌스 역시 상부의 결정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피에트 호프만과 호프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에 휘말리게 된 에베트 그렌스. 그 때부터 <쓰리 세컨즈>는 그야말로 '3초'의 시간 속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어마어마하게 긴박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 3초의 순간과 하룻밤을 바꿔버렸다.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쓰리 세컨즈>는 초반 인물들의 등장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이야기가 조금 더디게 흘러간다. 그리고 1권의 말미에 이르러 피에트 호프만이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펼친 2권에서는 '여기까지만 읽어야지'라는 다짐과는 달리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입하게 된다. '3초'라는 순간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하지만 생생하게 그려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하룻밤과 바꿀 가치가 있었던 '3초'라는 시간은 <쓰리 세컨즈>라는 소설을 단순한 스릴러 그 이상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전직 기자로서, 또 실제 범죄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생생함은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그저 픽션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시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범죄자로서의 삶을 보냈던 버리에 헬스트럼은 누구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낼 적임자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들은 <비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에트 호프만과 에베트 그렌스를 지켜보면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범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범죄자를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그저 잘라낼 수 있을까. 아무리 범죄자라 한들 그 정도의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일까(라고, 또 이 콤비는 나의 평소의 가치관을 또 한 번 뒤흔들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타 등등. 더 많은 의문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질문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꾼 '3초'가 무엇인지, 그 '쓰리 세컨즈'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마어마한 긴박함과 통쾌함을 안겨다 주는 것은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범죄자와 경찰의 거래, 술수와 배신은 사실이다. 마약의 늪에 빠져 평생을 마피아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마약 거래 역시 사실이다. 또 다른 '피에트 호프만'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에베트 그렌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벤 순드크비스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안나 헬만손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나트 오스카숀이라는 교도소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쓰리 세컨즈>는 끝을 향해 달려갔건만, 여전히 현실은 이 모든 일이 횡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비스트>는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첫 합작품이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그들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비스트>에서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던 에베트 그렌트 형사가 <쓰리 세컨즈>에서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베트 그렌트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요 형사님.

  <비스트>를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리얼리티 속에 그려진 성범죄자, 특히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었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허구인 듯 실제인 듯 모호하게 꿰어놓고 독자에게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쓰리 세컨즈>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스릴러적 요소에서부터 캐릭터의 완성도 역시 훨씬 탄탄해졌음이 자명하다. 나만 해도 <비스트>에서는 기억못했던 이 형사님, 확실히 알아보지 않았는가. 작품 역시 콤비의 집필이 계속 될수록 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리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리얼리티와 스릴러적인 재미까지 함께 갖추며 나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쓰리 세컨즈>는 세계 28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영화 판권이 계약되었다. 영국 범죄추리소설작가협회가 선정하는 대거 상 해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오직 범죄자만이 범죄자 연기를 할 수 있다._1권, p.309


지금 우리가 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야. 원래 그런 거라고. 우리가 할 유일한 일, 그리고 우리가 한 유일한 일은 그저 현재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 생활을 하는 보이테크 조직원들의 변호사에게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넨 것뿐이라고._1권, p.415


법이라……. 빌어먹을 법이라니, 이보쇼, 스텔넬. 그 법이라는 건 책상 뒤에 숨어서 끼적거리는 인간들이 만든 거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오._2권, p.145


이봐, 헬만손. 내가 이상해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야?_2권, p.222


범죄자가 경찰수사를 돕는다니,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사님. 정작 그 인간들이 벌인 범죄는 위장되고 묻혀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또 다른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니, 이런 젠장, 이게 민주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형사님?_2권,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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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세컨즈 1 - 생과 사를 결정짓는 마지막 3초 그렌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버리에 헬스트럼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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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성범죄자에게는 무조건 강도높은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국가가 해주지 않아 그 억울한 마음을 자신의 손으로 복수함으로써 푸는 것도 너무나도 이해가 된다고, 그렇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선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문제를 조망하며 그러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일깨워줬던 소설 <비스트>가 있었다. <비스트>의 마지막을 덮고 난 뒤의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책 속에 녹아있던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메시지에 그리고 성범죄자와 그를 둘러싼 감옥 생활의 끔찍함에 치를 떨며 읽었던지라 정작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경찰과 검사와 교도소장 등의 등장인물들은 까먹고 있었나보다. 한참 책을 읽어나가던 중 <비스트>에서 만날 수 있었던 상황이 문득 언급되는 것에 황급히 <비스트>를 뒤적이며 등장인물들이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리 세컨즈>는 <비스트>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른 뒤 벌어진 이야기이다. 잊고 있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고, <쓰리 세컨즈>에서 또 다른 사건에 맞닥뜨린다. 앞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또 다른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는 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그리고 또 거기에 무슨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궁금해 몸이 근질근질하다.

 

 

 

 

  마약 운반책들에게 마약을 토해내게 하고 한편으로는 구매자와 거래를 시도하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약 판매를 책임졌던 피에트 호프만은 자신의 흔적을 지워내고 현장을 경찰에 신고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베트 그렌스를 포함한─은 사건 발생 현장을 꼼꼼히 분석하고 용의자를 물색하지만 쉽사리 꼬리가 밟히지 않는다. 윗선에서는 파헤쳐야 할 다른 사건이 많이 있으니 수사가 여의치 않은 이 사건 역시 크게 파헤치지 않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형사, 에베트 그렌스는 끈질기게 신고 전화의 목소리와 주변을 분석하며 사건 현장은 마약 거래 현장이었음을 추리해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약상과 형사의 추격전이 그려지리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뿐이라고? 루슬룬드, 헬스트럼 콤비가 그려낸 이야기가? 바로 그 <비스트>를 써냈던 그들이?


  처음에는 이뿐이리라 생각했다. 경찰은 마약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경찰이 마약 거래 현장에 위장 잠입을 해 그들의 뿌리를 뽑으려 한다,는 줄기를 중심으로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는 있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생각했다. 범죄 조직에 경찰 대신 경찰과 손을 잡은 범죄자가 잠입한다는 것만이 그들이 색다르게 설정한 소재라 하기엔 너무 단편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에 '안전하긴 하겠다'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뭔가 너무 아쉽다.






  경찰의 끄나풀이 되어 제발로 교도소에 들어간 '파울라' 피에트 호프만이 어떻게 임무를 마친 다음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가 아니다. 호프만은 과연 살아서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가 이 소설의 주요한 줄기다.


  범죄자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려는 대단하신 '윗분들'의 결정으로 상황은 순식간에 급변하면서 호프만은 그야말로 언제 죽을 지 모를 위기에 처한다. 한편, 호프만의 그림자를 끝내 발견해내고야만 에베트 그렌스 역시 상부의 결정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다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린 피에트 호프만과 호프만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에 휘말리게 된 에베트 그렌스. 그 때부터 <쓰리 세컨즈>는 그야말로 '3초'의 시간 속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어마어마하게 긴박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나는 그 3초의 순간과 하룻밤을 바꿔버렸다.

 

 

 

 

 

  총 2권으로 이루어진 <쓰리 세컨즈>는 초반 인물들의 등장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이야기가 조금 더디게 흘러간다. 그리고 1권의 말미에 이르러 피에트 호프만이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펼친 2권에서는 '여기까지만 읽어야지'라는 다짐과는 달리 끝까지 책을 놓을 수 없었을 정도로 엄청나게 몰입하게 된다. '3초'라는 순간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속도감으로, 하지만 생생하게 그려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의 하룻밤과 바꿀 가치가 있었던 '3초'라는 시간은 <쓰리 세컨즈>라는 소설을 단순한 스릴러 그 이상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전직 기자로서, 또 실제 범죄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철저한 취재와 조사를 통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생생함은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이 그저 픽션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역시 기자였던 안데슈 루슬룬드와 범죄자로서의 삶을 보냈던 버리에 헬스트럼은 누구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려낼 적임자였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그들은 <비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피에트 호프만과 에베트 그렌스를 지켜보면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과연,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범죄의 뿌리를 뽑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범죄자를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그저 잘라낼 수 있을까. 아무리 범죄자라 한들 그 정도의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일까(라고, 또 이 콤비는 나의 평소의 가치관을 또 한 번 뒤흔들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기타 등등. 더 많은 의문과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질문들, 그리고 모든 것을 바꾼 '3초'가 무엇인지, 그 '쓰리 세컨즈'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읽으면서 확인해 보시라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어마어마한 긴박함과 통쾌함을 안겨다 주는 것은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범죄자와 경찰의 거래, 술수와 배신은 사실이다. 마약의 늪에 빠져 평생을 마피아에게 이용당할 수 밖에 없는 범죄자들의 이야기도 사실이다. 교도소에서 이루어지는 끔찍한 폭력과 마약 거래 역시 사실이다. 또 다른 '피에트 호프만'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에베트 그렌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벤 순드크비스트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리안나 헬만손 같은 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렌나트 오스카숀이라는 교도소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있어 <쓰리 세컨즈>는 끝을 향해 달려갔건만, 여전히 현실은 이 모든 일이 횡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가장 안타깝다.

 

 

 

 

 

  <비스트>는 루슬룬드 + 헬스트럼 콤비의 첫 합작품이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그들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비스트>에서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던 에베트 그렌트 형사가 <쓰리 세컨즈>에서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베트 그렌트는 그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요 형사님.

  <비스트>를 읽는 동안 나를 지배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리얼리티 속에 그려진 성범죄자, 특히 아동성범죄자에 대한 분노와 충격이었다. 그리고 <쓰리 세컨즈>는 허구인 듯 실제인 듯 모호하게 꿰어놓고 독자에게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쓰리 세컨즈>에서는 그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스릴러적 요소에서부터 캐릭터의 완성도 역시 훨씬 탄탄해졌음이 자명하다. 나만 해도 <비스트>에서는 기억못했던 이 형사님, 확실히 알아보지 않았는가. 작품 역시 콤비의 집필이 계속 될수록 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리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리얼리티와 스릴러적인 재미까지 함께 갖추며 나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던 <쓰리 세컨즈>는 세계 28개국에 판권이 팔렸고, 영화 판권이 계약되었다. 영국 범죄추리소설작가협회가 선정하는 대거 상 해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오직 범죄자만이 범죄자 연기를 할 수 있다._1권, p.309


지금 우리가 는 일이 잘못된 일은 아니야. 원래 그런 거라고. 우리가 할 유일한 일, 그리고 우리가 한 유일한 일은 그저 현재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 생활을 하는 보이테크 조직원들의 변호사에게 그저 몇 마디 말을 건넨 것뿐이라고._1권, p.415


법이라……. 빌어먹을 법이라니, 이보쇼, 스텔넬. 그 법이라는 건 책상 뒤에 숨어서 끼적거리는 인간들이 만든 거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이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오._2권, p.145


이봐, 헬만손. 내가 이상해지는 거야, 아니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야?_2권, p.222


범죄자가 경찰수사를 돕는다니, 이런 빌어먹을 시스템이 또 어디 있습니까, 형사님. 정작 그 인간들이 벌인 범죄는 위장되고 묻혀버린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또 다른 범죄수사를 위해 경찰이 거짓말을 하고, 정작 수사를 담당하는 경찰에게는 진실을 숨기고 있다니, 이런 젠장, 이게 민주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형사님?_2권,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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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에 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두 거장이라 하면 역시 일본의 국민 탐정이자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낸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정작 작품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덕에 잘 알려진 '에도가와 란포'다. 심지어 국내에 소개된 <소년탐정 김전일> 덕분에 '긴다이치'라는 성은 굉장히 잘 알려진 반면 또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쉽사리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존재를 알고난 뒤 다시 뜯어본 <명탐정 코난>에서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건방진 안경잡이 꼬마의 성이 바로 란포의 것을 따 왔음을 깨달았으니.


  추리문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비틀어 창조해낸 이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추리 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였고, 일본 추리작가협회의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기부한 기금으로 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은 현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작가의 수상작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과 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시체를 사는 남자>는 바로 그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우타노 쇼고의 애정과 존경이 듬뿍 담겨 있는 소설이다. 극중극 형식을 취해 「백골귀」라는 작품과 그 중간 중간 「백골귀」의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 다른 시점의 두 이야기는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로 이끌고 있다. 역시 우타노 쇼고라고 할지─사실 '역시'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많이 읽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두 개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도 그 이음새가 상당히 매끄럽게 연결되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시체를 사는 남자>의 주를 이루는 이야기이자 액자 속을 담당하고 있는 「백골귀」는 에도가와 란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에도가와 란포와 실제로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에도가와 란포의 주변에서 일어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를 모방한 한 남자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추리 작가가 실제로 사건에 휘말려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지만(실제 요코미조 세이시도 그렇고, 에도가와 란포의 패턴도 흡사했다 한다)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을 그 주인공으로 내세워 창작의 고통보다 더한 추리의 고뇌에 빠진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그래도 역시 추리소설 작가라고 해야 할지, 바쁜 업무에 그냥 넘어갈 업무에 의문을 느끼고 그에 동원된 트릭을 하나하나 간파해나가는 에도가와 x 하기와라 콤비의 활약은 상당히 앙큼하다. 조수랍시고 '오난도 이로'라는 이름을 내민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셜록 홈스를 패러디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에도가와 란포보다 앞서나가 추리를 펼친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치켜세워준 우타노 쇼고의 의도는 현실과 소설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존경하는 추리소설 작가를 돋보이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우타노 쇼고의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오마주다. 에도가와 란포가 실제로 살았던 193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친분이 있었던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사건을 해결해 나가고, 그들의 대화 속에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백골귀」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나 작품에 사용된 트릭 역시 시대에 걸맞는 수준으로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어 실제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를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다. 우타노 쇼고는 「백골귀」의 작가의 이름을 빌려 이러저러하게 소설을 썼노라 밝히고 있다. 그저 내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읽어보고 그의 작풍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더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게 참으로 아쉽다. 실제로 「백골귀」의 문체는 에도가와 란포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데 내가 알 길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활약과 그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밝혀지는 추악한 진실을 파헤쳐가는 액자 속 이야기와 그 틀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 <시체를 사는 남자>는 한 권의 작품으로, 우타노 쇼고의 재기 넘치는 오마주가 완성된다. 그것이 그저 우타노 쇼고의 손끝에서 피어난 꿈같은 이야기면 어떠한가. 이렇게나마 나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작중에서 에도가와 란포는 숙박부에 자신의 이름을 '히로 라이타'로 기입한다. 'Hero Writer'를 조금 비틀었던건가 싶었는데(실제로 그런 의도도 있으리라 보지만) 알고보니 그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다. 이렇게 글자를 재배열해 새로운 말을 탄생시키는 애너그램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소설 그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역자 후기를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지만 우타노 쇼고가 숨겨둔 소설의 장치는 분명히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이구, 뭘 그리 놀라십니까. 진정하시지요. 장황하면서도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문장, 의성어나 의태어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는 부사. 게다가 그걸 가타카나로 표기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잖아요. 이건 란포의 작품이 분명해요. 그리고 첫머리 부분도 란포가 즐겨 쓰는 패턴이고요.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다, 라는 식의 독백으로 서막을 여는 패턴이요._p.42~43


하하하, 선생님은 역시 눈치 채셨군요. 아까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사실 제가 대책 없는 란포 중독자라서 백골귀 안에 란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을 집어넣었죠. 목차 제목들도 대부분 란포 작품에서 따왔고, 단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도 란포 작품에서 골라냈어요. 아카마쓰 몬타로라는 경감도 사실은 「엽기의 끝」에서 악당에게 쫓기는……._p.81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과연 근대문학사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진다._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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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그래도 역시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히 박혀 있는 단편소설은 초등학생 시절 <세계 우수 단편 모음>에 실려있던 단편들이다. 어느샌가 집에서 사라져버린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가볍게 구글링을 하니 표지가 바로 나오는구나. 덩달아 그 때 내가 무슨 단편을 읽었나 목차를 살펴보니 모파상의 「목걸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별」, 톨스토이의 「바보이반」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다. 그러고보니 「검은 고양이」를 읽고 상당히 충격을 받은 기억도 난다.


  그런데 나의 기억은 상당히 와전되어 있었는지 모파상의 「목걸이」도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도 오 헨리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더랬다. 오 헨리 단편선이라면 이 정도 작품은 당연히 있겠지 생각했는데 뒤늦게 다른 작가의 단편을 혼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튼 그 정도로 '오 헨리'라는 이름은 단편 소설 하면 바로 그의 이름을 떠올릴 정도로 어린 마음에도 상당히 강렬한 기억에 남아 있었나보다. 실제로 상당히 강렬한 반전으로 기억되는 것이 바로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 그리고 모파상의 「목걸이」인데, 나도 모르게 그 정도로 유명한 단편을 읽었으니 나는 오 헨리의 단편은 거의 다 알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랍시고 혼자서 납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 헨리를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유이하게 알고 있었던 두 작품이 아니라 그의 단편 중 서른 편을 골라 모아둔 단편집이란다. 그러고 보니 새삼 오 헨리 단편선이라는 이름 아래 상당히 많은 단편들이 이미 소개되고 있었음에도 나는 어찌나 오만하게 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건지 새삼 부끄러워진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역시 가장 유명한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작되는 그의 단편들은 뉴욕 시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새삼 다시 읽는 두 이야기는 어찌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느낌과는 상당히 색다르다. 가난하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는 어찌나 감성을 자극하는지. 실로 이렇게 감성을 자극받은 것도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 밖에는 아예 그야말로 아예 처음 보는 이야기들뿐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 오 헨리의 단편은 비록 1900년대 초반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당연히 내가 모든 것을 공감할 수는 없지만서도 역시 시대를 초월해 함께 공감하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의 삶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가 팍팍한 생활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웃음과 행복을 찾아낸다. 그리고 오 헨리는 그 모습을 따스하고 세심한 시선으로 일관되게 그려내면서 독자에게도 일상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오 헨리의 단편에는 마음을 훈훈하게 만드는 그의 따스한 시선과 더불어 함께 웃을 수 있는 유머가 가득하다. 이야기의 말미에는 어느정도 읽다보면 패턴을 알게 되어 예측가능하지만서도 살포시 미소를 짓게 하는 반전을 마련해 두었고,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에도 잊을만 하면 간간히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귀여움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뿐 아니라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 당시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실제 그들의 생활상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너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성으로 그들의 삶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 헨리가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게 그의 주변을 살아가는 이들을 관찰한 덕분일 것이다.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 헨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따뜻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뜻하지 않게 우울할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휴식처를 발견한 기분이다. 즐겁게 읽었던 단편도, 새로운 만남이 너무 즐거웠던 단편도 한동안은 나의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어줄 것 같다. 그리고 오 헨리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라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냐고, 나의 약한 면모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작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웃음이 너무 아름답지 않냐고.

 

 

 

 

 

 

 

 

  서른 개의 단편 모두 주옥같지만, 특히 나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웃음을 주며 날 즐겁게 해 줬던 단편 몇 개를 소개해 본다. 워낙 유명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일상에서 벗어나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두 남녀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낙원에 들른 손님」, 돈 그리고 사랑을 믿는 부자(父子)의 청혼 프로젝트를 그려내고 있는 「재물의 신과 사랑의 신」, 인생은 돌고 있는 것을 기막히게 그려낸 「경찰관과 찬송가」와 「인생은 회전목마」, 그리고 돈을 좋아하는 노부인의 한결같은 취향을 그려내고 있는 「매혹의 옆모습」, 말썽꾸러기를 유괴한 2인조의 고생담이 담긴 「붉은 추장의 몸값」 정도로 해 둘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반전이라거나 도중도중 오 헨리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며 화자로서 개입을 하고 심하디 심한 우연에서 비롯된 해피엔딩 등 어느 정도 부자연스러운 요소 역시 담겨 있지만서도, 그런 점에 대해서는 오 헨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다. 그저 그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자, 창밖을 내다봐. 벽에 붙어 있는 저 마지막 담쟁이 잎새를 말이야. 바람이 부는데 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지 이상하지 않아? 아, 존시, 저건 버먼 할아버지가 그린 걸작품이야.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 그분이 저기에 그려놓으신 거거든._p.19, 「마지막 잎새」


델러, 우리, 크리스마스 선물을 당분간 치워두기로 하지. 지금 당장 사용하기엔 너무 훌륭한 것들이니. 당신에게 빗 사줄 돈을 구하기 위해 난 시계를 팔았어. 자, 이제 고기 토막을 올려놓지._p.29, 「크리스마스 선물」


이제 알겠어요. 당신은 증권일을 하는 중에는 다른 일은 모두 까맣게 잊어버리나 봐요. 처음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여보, 기억나세요? 우리는 어젯밤 여덟시에 저 길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잖아요._p.128, 「어느 바쁜 브로커의 로맨스」


신사 양반들, 나는 오늘 우편으로 내 아들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들이 조금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 같소.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당신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바이니, 이런 제안이라면 당신들도 수락하리라고 믿소. 당신들이 조니를 집으로 데려와서 현금으로 250달러를 내게 지불한다면 나는 당신들 손에서 조니를 인수하는 데 동의하겠소._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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