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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일본 미스터리에 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두 거장이라 하면 역시 일본의 국민 탐정이자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낸 '요코미조 세이시' 그리고 정작 작품보다는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 덕에 잘 알려진 '에도가와 란포'다. 심지어 국내에 소개된 <소년탐정 김전일> 덕분에 '긴다이치'라는 성은 굉장히 잘 알려진 반면 또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쉽사리 와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존재를 알고난 뒤 다시 뜯어본 <명탐정 코난>에서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건방진 안경잡이 꼬마의 성이 바로 란포의 것을 따 왔음을 깨달았으니.
추리문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비틀어 창조해낸 이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추리 소설 작가이자 평론가였고, 일본 추리작가협회의 초대이사장을 역임했다. 그가 기부한 기금으로 하는 '에도가와 란포상'은 현재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작가의 수상작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과 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기리노 나쓰오의 <얼굴에 흩날리는 비>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시체를 사는 남자>는 바로 그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우타노 쇼고의 애정과 존경이 듬뿍 담겨 있는 소설이다. 극중극 형식을 취해 「백골귀」라는 작품과 그 중간 중간 「백골귀」의 작가 스스로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그 다른 시점의 두 이야기는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말로 이끌고 있다. 역시 우타노 쇼고라고 할지─사실 '역시'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많이 읽지 않아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두 개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을 취하면서도 그 이음새가 상당히 매끄럽게 연결되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시체를 사는 남자>의 주를 이루는 이야기이자 액자 속을 담당하고 있는 「백골귀」는 에도가와 란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에도가와 란포와 실제로 그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에도가와 란포의 주변에서 일어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를 모방한 한 남자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아냈다.
추리 작가가 실제로 사건에 휘말려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은 낯설지 않지만(실제 요코미조 세이시도 그렇고, 에도가와 란포의 패턴도 흡사했다 한다)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을 그 주인공으로 내세워 창작의 고통보다 더한 추리의 고뇌에 빠진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그래도 역시 추리소설 작가라고 해야 할지, 바쁜 업무에 그냥 넘어갈 업무에 의문을 느끼고 그에 동원된 트릭을 하나하나 간파해나가는 에도가와 x 하기와라 콤비의 활약은 상당히 앙큼하다. 조수랍시고 '오난도 이로'라는 이름을 내민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셜록 홈스를 패러디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에도가와 란포보다 앞서나가 추리를 펼친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치켜세워준 우타노 쇼고의 의도는 현실과 소설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존경하는 추리소설 작가를 돋보이게 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우타노 쇼고의 에도가와 란포를 향한 오마주다. 에도가와 란포가 실제로 살았던 193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친분이 있었던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등장시켜 사건을 해결해 나가고, 그들의 대화 속에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백골귀」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나 작품에 사용된 트릭 역시 시대에 걸맞는 수준으로 상당히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어 실제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를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에 휩싸였다. 우타노 쇼고는 「백골귀」의 작가의 이름을 빌려 이러저러하게 소설을 썼노라 밝히고 있다. 그저 내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읽어보고 그의 작풍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그의 작품을 어느 정도 더 알고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한게 참으로 아쉽다. 실제로 「백골귀」의 문체는 에도가와 란포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하다는데 내가 알 길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 속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활약과 그가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밝혀지는 추악한 진실을 파헤쳐가는 액자 속 이야기와 그 틀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 <시체를 사는 남자>는 한 권의 작품으로, 우타노 쇼고의 재기 넘치는 오마주가 완성된다. 그것이 그저 우타노 쇼고의 손끝에서 피어난 꿈같은 이야기면 어떠한가. 이렇게나마 나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거장의 일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작중에서 에도가와 란포는 숙박부에 자신의 이름을 '히로 라이타'로 기입한다. 'Hero Writer'를 조금 비틀었던건가 싶었는데(실제로 그런 의도도 있으리라 보지만) 알고보니 그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다. 이렇게 글자를 재배열해 새로운 말을 탄생시키는 애너그램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소설 그 자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역자 후기를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지만 우타노 쇼고가 숨겨둔 소설의 장치는 분명히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이구, 뭘 그리 놀라십니까. 진정하시지요. 장황하면서도 조금씩 깊숙한 곳으로 끌어들이는 문장, 의성어나 의태어와 함께 빈번하게 사용되는 부사. 게다가 그걸 가타카나로 표기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잖아요. 이건 란포의 작품이 분명해요. 그리고 첫머리 부분도 란포가 즐겨 쓰는 패턴이고요. 이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굉장히 무서운 이야기다, 라는 식의 독백으로 서막을 여는 패턴이요._p.42~43
하하하, 선생님은 역시 눈치 채셨군요. 아까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사실 제가 대책 없는 란포 중독자라서 백골귀 안에 란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을 집어넣었죠. 목차 제목들도 대부분 란포 작품에서 따왔고, 단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 이름도 란포 작품에서 골라냈어요. 아카마쓰 몬타로라는 경감도 사실은 「엽기의 끝」에서 악당에게 쫓기는……._p.81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과연 근대문학사는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생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진다._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