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어벤져스
조스 웨든 감독,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외 출연 / 월트디즈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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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의 슈퍼히어로는 히어로로서의 정체성과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둘 모두를 갖고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역시 그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명의 히어로가 있으면 백개의 가면이 있는 법. 각자의 가면이 갖는 의미는 각자의 히어로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어벤저스] 개봉에 맞추어 마블코믹스의 히어로들의 가면과 그 뒤에 숨겨진 정체에 대해 짤막한 감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단 나의 마블코믹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여기서는 영화화된 작품들만을 다루겠다.



1.스파이더맨은 돌연변이 거미에 물려 거미의 신체적 특징과 강력한 힘을 얻게 된 소년이다. 자신이 아무 생각없이 놓아준 범죄자의 손에 삼촌이 목숨을 잃고 자신의 힘에 어울리는 책임을 지기로 다짐해 영웅이 되었다. 스파이더맨은 마블 계열의 히어로 중 최초로, 또 장기적으로 성공한 시리즈일만큼 영웅들의 이중성을 잘 잡아낸 히어로이다. 어쩌면 가장 전형적이었기에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영웅으로서의 삶과 소시민으로서의 현실 간의 괴리가 중요한 테마였다. 1편의 악역 그린고블린은 가면을 씀으로써 내면의 욕망을 드러내었지만 그와 반대로 스파이더맨은 가면을 쓰는 것과 동시에 초인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의 책무를 (뒤집어)쓴다.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이라는 표현은 어느 동네의 시장 선거 카피로도 쓰일 법 하다. 공적/사적 경계에서 괴로워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업무와 가족-친지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혔던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의 행복이 더 기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가장 대표적인 명장면은 역시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에게 MJ가 복면을 반쯤 벗긴 뒤 입을 맞추었던 장면일 것이다. 과장을 좀 보태면 이 장면만이 스파이더맨이 자신 스스로로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키스라는 포상은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의 경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가능했다. 히어로물 시리즈에서 이보다 더 로맨틱한 키스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2.아이언맨은 군수산업체의 대부, 토니 스타크가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되었을 때 그 테러단의 기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낸 강화갑옷이다. 이후 군수산업에 회의적이 된 토니 스타크에 의해 아이언맨은 신형병기와 친환경에너지라는 이중적인 최첨단 기술의 집결체로 떠오른다. 아이언맨은 갑부와 가난뱅이라는 대조 외에도 스파이더맨의 훌륭한 대척점이 될 수 있는 인물이다. 아이언맨의 슈트(강화갑옷)는 가면이 아니다. 슈트는 일종의 정장이고, 남자의 옷차림은 전략이다. 아이언맨은 일종의 최신형 스포츠카와 같은 매력을 가진 도구에 가깝다. 히어로계의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라고나 할까? 세계적 재벌의 아낌없는 사치와 무한한 권력의 상징인 셈이다. 아이언맨 슈트는 상황에 맞게 여러벌이 제작되어있으며 그 조종자의 정체가 숨겨진 것도 아니다. 그저 도구일 뿐인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사이를 마스크로 구분해야 하는 것과 달리 아이언맨에게 공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엄청난 갑부고, 그가 사적으로 입은 빤쓰는 공적(세계적) 유행이 되는 빤쓰다. 파파라치가 초고속 제트기에 올라탄 재벌의 얼굴 사진을 클로즈샷으로 찍지 못한다고 해서 그 정체가 가려지던가? 오히려 그 부유함의 과시만 될 뿐이다. 아이언맨2에서 토니 스타크의 비서 페퍼 포츠는 키스를 해달라는 토니 스타크의 제안에 아이언맨 마스크에만 키스를 한다. 차 창문 열고 뽀뽀해달랬더니 차 엠블렘에다 입을 맞춘 셈. 물론 페퍼 포츠가 돈만 보는 사람이라가 아니라 일종의 유머를 던진 것이다. (나의 페파 따응은 돈에 환장한 사람이 아니야) 스파이더맨의 마스크 반쯤 벗긴 키스와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익살스러운 장면이다.



3.캡틴 아메리카는 애국심 가득한 청년 스티브 로저스가 자원입대를 해 슈퍼솔져 프로젝트-약물을 통한 강화인간 계획-에 참가해 초인적인 힘을 얻어 탄생한 히어로이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 캡틴 아메리카는 초인적인 힘을 얻었다고 슈퍼 히어로가 된 것은 아니었다. 테러 습격으로 실험실에 사고가 일어나 이후의 슈퍼솔져 프로젝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정부는 유일한 성공작인 그를 일종의 차력쇼를 통해 군 사기 진작을 위한 홍보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티브 로저스는 친구를 위해 자진해서 전장에 뛰어듬으로써 2차대전의 진정한 히어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쟁 당시 빙하에 갇혀 2차대전으로부터 70년이 지난 현대에 다시 깨어나 여러가지 시차적인 문제를 겪으면서도 올드패션한 윤리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매력인 인물이기도 하다. 재미난 것은 캡틴 아메리카의 가면이 필요한 것은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군인이고, 그의 정체따위야 군대 및 정부에서 당연히 파악하고 있다. 거기다 유니폼을 입든 입지 않든 그는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한다. 그럼에도 그는 마스크를 쓰고 유니폼을 입는다. 작게 보면 이는 정부의 홍보정책에 따르기 위함이지만 크게 보면 그의 가면이 그 자신이 아닌 그를 바라보는 타인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캡틴아메리카를 지켜보는 이들은 그 가면을 통해 스티브 로저스 개인이 지워짐으로써 캡틴 아메리카가 일개 시민인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작중에서도 그는 일개 요원인 콜슨의 이입 대상이었다.



4.토르는 아스가르드의 신이자 신들의 왕인 오딘의 장남이기도 하다. 여기서 신이라고는 해도 절대자나 창조주로서의 신은 아니며, 우주의 지배세력의 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올바를 것이다. 교묘한 말솜씨와 냉철한 지략을 가진 동생 로키 때문에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같이 싸우기도 하는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포스팅에서 토르를 다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토르는 마스크를 쓰고 있지도 않거니와 인간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도 이중적인 면은 있었다. 그의 영화 첫 작품에서 토르는 신이지만 너무나 인간다웠고, 절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지구로 추방되어 인간으로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이면서도 신으로서의 책임의식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신으로 돌아와 지구를 구하게 된다. 신일 때 인간답고 인간일 때 신다웠던 토르의 모습은 분명 특기할만하나 이후 어벤저스나 여타의 시리즈에서도 이런 이중성을 유지할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어벤저스에서 토르는 일관되게 절대자로서의 책무를 지키려 노력한다. 그나마 로키와의 관계가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왕으로서 국민을 보호함과 동시에 같은 왕족을 보호하려는 태도라고 보면 그렇게 모순되어 보이지도 않는다. 원작 코믹스에서 토르는 인간이자 의사인 도날드 블레이크와 아스가르드의 신인 토르가 한 몸에 공존하는 이중성을 가졌다지만 이 설정이 이어질 것 같지도 않는다.



5.헐크는 인간에게 초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감마선 실험에서 연구원 브루스 배너가 막대한 양의 감마선을 쬔 결과 나타난 브루스 배너의 이중인격이자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괴인이다. 헐크는 여타의 작품과 달리 몇번이고 주연 배우를 바꿔가며 새로운 영화 시리즈로 재촬영이 되어야 했다. 이는 헐크라는 캐릭터가 갖는 개성을 살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라는 증거다. 헐크의 특징은 그의 이면의 정체성이 유니폼이나 마스크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격노한 상황에서 일종의 발작과 같이 나타나는 제 2의 인격이라는 점이다. 분노가 터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발적인 힘을 쏟아붓는 것이 헐크다. 그러니 헐크가 되기 전의 인격, 브루스 배너가 어떻게 자신의 화를 제어하고 다스리느냐가 이 인물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에드워드 노튼의 브루스 배너는 아쉽게도 그 매력을 전달하는데 실패했다. 그는 분노를 참는 모습만, 신경질적인 모습만 보여줬다. 헐크는 타일러 더든이 아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천성적으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매력을 가진 배우이지만 헐크와는 다르다. 반면 마크 러팔로의 브루스 배너의 분노는 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억압받고 천대시 당하는 인물, 그 억울함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분노를 견디는 모습이야말로 더 큰 파괴력을 예상하게 한다. 분노는 물을 막는 둑과 같아 그 막는 힘이 커질수록 터져나오는 힘이 더 거세진다. '내가 화나면 너 죽는데 내가 참는다.'라는 쾌감은 에드워드 노튼의 신경질적인 얼굴보다는 마크 러팔로의 순하고 착한 얼굴에 더 어울린다.



6.엑스멘은 뮤턴트들의 결사다. 돌연변이로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이들이 모여 단체를 이룬 것이다. 이들의 적들 역시 뮤턴트다. 엑스멘은 뮤턴트가 아닌 인간들과의 화합을 위해 활동하며 그들의 적은 뮤턴트가 지배하는 세상을 위해 암약한다. 엑스멘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마스크는 없다. 다만 유니폼을 입는다. 엑스멘 본 시리즈도 그렇고, 엑스멘의 프리퀄이자 리붓인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그렇고 최종결전에 앞서 이들은 유니폼을 맞춘다. 엑스멘 시리즈는 언제나 소수자들의 담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특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든 동성애든 장애인이든 어떤 이유로든 사회적 차별을 받았던 이들이 스스로 연대하고 억압에 맞서나간다는 테마는 공통되게 나타났다. 이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은 NGO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유니폼은-퍼스트 클래스의 노락색 쫄쫄이가 나찌가 유대인에게 붙인 노란색 별과 색이 같다는 비약도 한번 섞어주면-그들을 구속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실제로 엑스멘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능력을 봉인하고 있다. 싸이클롭스는 특제 선글라스로 자신의 레이저빔을 감추고, 울버린은 재생능력 속에 아다만티움 칼날을 숨긴다. 진 그레이는 피닉스 포스를 감추고 있으며 로그는 피부접촉을 막는다. 이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은 사회적/법적 제어 하에서 자신의 힘을 개방하겠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들의 적대세력 브라더후드 오브 이블 뮤턴트가 복장자유라는 것도 나름 대조적이다.



 이렇게 간략히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들과 그 각각의 개성에 대해 짧게 평을 남겨보았다. 판타스틱4는 보지도 않았고 어차피 리붓된다니까 볼 생각도 안들어서 적지 않았다. 막상 포스팅을 다 쓰고보니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할지 막막하다. 되게 뻘쭘하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막상 포스팅 쓰기 시작했을 땐 패기로 가득 찼는데 끝맺는 법을 모르겠다. 히어로의 이중성의 중요함과 한국의 메타히어로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모든 결론을 한국의 장르적 특성과 그 미래로 마무리하는 찌질함을 되풀이하고 싶지가 않아 관뒀다. 어쩌지. 앞으로의 슈퍼히어로 시리즈를 기대한다, 같은 말이라도 할까? 내가 기대하면 뭐 누가 좋아라도 해주나? 다 필요없다. 아무 얘기나 하겠다. 김꽃비는 참 예쁜 것 같다! 뭘 먹으면 그렇게 예쁠까. 하루만 예쁘게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렇게 매일 예쁘게 살면 힘들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된다. 그냥 그렇다. 김꽃비가 예쁘면 됐지 이딴 포스팅 결론을 잘 낸다고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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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D]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이세야 유스케 출연 / 기타 (DVD)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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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펑펑 울며 봤다. 두번인가 세번인가 봤는데 다 울었다. [자학의 시]도 봤다. 그럭저럭 괜찮았다. 관련 리뷰를 옛날에 읽은 적이 있어서 마지막의 감흥이 덜하기는 했지만 좋은 작품이다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집]을 봤다. 이때부터 슬슬 이게 뭔가 아니지 않나 싶은 기분이 들었다. 세 작품은 모두 일본에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한 여성이 인생 다 그런거 아니냐며 쇼부치고 끝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나는 세번이나 이 판 박힌 패턴에 농락 당한 뒤에야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야. 퉁칠 걸 퉁 쳐야지.

 위 세 작품을 보는 도중 불편함을 없던 것은 아니다. 이 작품들을 깔 수 있는 방향이 대부분 꼰대스러운 방식으로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펑펑 울기는 했으니까 뭐라 말은 못하겠어서 침묵하고 있었지만, 비록 나의 논리가 꼰대스럽더라도 가려운 곳은 긁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이나 [자학의 시], [우리집]의 등장인물들의 슬픔과 눈물이 사실은 기쁨과 웃음이라고 느낀다. 그들이 받는 아픔만큼 그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그들은 비극적인 현실을 견디어낸 것이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을 향유하고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자백을 하자면 나 역시 그 고통을 쾌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마츠코라는 한 여성이 수많은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거나 버림 받거나 이용 당하거나 죽어버리던가 해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한 여성이 애정관계에 있을 법한 대다수의 불운을 다양하게 섭렵한다. [자학의 시]는 깡패 남편과 자신을 사랑하는 식당 주인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아내의 일상을 다룬 4컷 만화-영화화도 되었다-로 거의 매 에피소드마다 밥상 뒤집는 장면이 명물처럼 등장할 정도로 가정내폭력이 일상처럼 다뤄진다. [우리집]은 가난한 마을의 3남매의 이야기로 위 두 작품과는 달리 어린 소년이 주인공 역을 맡았으며 돈독한 가족상이 그려지지만 뽕 맞고 칼 휘두르고 삥 뜯고 폭력의 강도는 가장 강하다.

 처음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을 봤을 때는 마냥 새롭기만 했는데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을 세 개나 보니 그냥 하나의 패턴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다. 아니, 패턴이나 클리셰를 가진다는게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단 어떤 전형이 있음을 모르고 봤을 때와 알고 봤을 때 느낌이 100%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들 모두 고통 받는 여성이 있고 괴롭히는 남자가 있으며 고난으로 가득 찬 삶과 그렇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세상에 숱한 상처에도 웃음 짓는 여성의 웃음으로 끝이 난다. ([우리집]은 소년이긴 하다) 여기서 묻고 싶은건, 그럼에도 웃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에 웃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있고 그 남자를 바라보며 그래도 알고 보면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다워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 가정내폭력을 정당화하는 피해자들의 모습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는 불륜에 주먹질에 강제적인 성매매에 폭력 한번 버라이어티하고 [자학의 시]에서는 자기를 강간하려고 한 식당 주인과 별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내지를 않나 [우리집]은 여성 주인공인 누나는 그나마 겪은 풍파가 잘 묘사되지 않지만 동생들은 약하고 뿅가고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희생 뒤에서 증발하고 만다.

 나는 저들의 사랑이 과연 사랑인지도 의심스럽다. 많은 남성향 작품들에서 여성들이 한명의 인간적인 주체가 아닌 악세사리처럼 주변의 질시와 흠모를 받기 위한 쟁취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을 받듯이 이 작품군에서 남성들의 위치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어떤 주체적 인물로는 다뤄지지 못한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여성들이 소유해야 할 존재로 대상화가 되는 것과는 달리 남성들은 하나의 비장미를 이끌어내는 풍경처럼 주인공과 그 주변을 맴돈다는 정도일 것이다. 무수한 불행들 중 하나로 말이다.

 저들의 삶이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희생은 그것이 강요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손에 꼽히게 윤리적이자 아름다운 행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희생이라는 것이 일종의 쾌락의 도구로, 악세사리로 이용된다면 그게 정녕 희생인가? 애초에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기 위해 주변인물들을 가해자의 위치로 유혹하기까지 한다면 그것이 진정 피해자의 위치일 수 있을까?

 '저년이 꼬신거야! 저년이 나빠!'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랬기에 그들이 그런 아픔을 겪었다는 인과적인 문제를 거론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폭력을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일곱글자 뒤에 숨겨놓고 그에 대한 저항을 정지한 자포자기와 미화화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피해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도피가 아니냐 묻고 싶은 것이다. 그 미소 뒤에는 가해자의 폭력만이 아니라 피해자를 자처하는 모습마저 숨겨져 있다. 이것이 인생을 긍정하는 것인가?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길인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너무나도 기쁘다는 듯이 불운을 탐미하는 저들의 쇼의 관객이, 혹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들어내는 범죄의 공모자가 되고 싶지 않다. 파국도 구원도 없이 인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며 그래서 인생이 아름답다 말하는 것에서 무력함만을 느낀다. 파국도 구원이 없음을 미화하는 것은 파국도 구원을 기대하는 것보다도 끔찍하고 황폐한 풍경이다. 삶의 구원은, 그러니까 자신의 과오에 대한 긍정과 용서는 저렇게 불의와 일그러짐에 대한 응시를 포기하고 타성에 떠밀려 자신을 희생자라 마스터베이션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위치에 있다. 멋대로 쇼부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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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평행우주물이나 시간여행물, 루프물과 같은 소재는 눈에 띄다 못해 질릴 정도로 우려진 것 같다. 굳이 SF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고서도 연애물이나 학원폭력물 같은 영역에서도 흔히 이 세가지 세계관이 다루어지니 말이다. 그래도 이중 가장 최신의 유행은 평행우주물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야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야 원소스멀티유즈의 다양한 상업적 전개를 모두 정당화하고 정사라는 딱지를 붙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욕망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며 과대해석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우선 평행우주물에 대해서는 [래빗홀]을, 시간여행물은 [빽투더퓨쳐1]와 [터미네이터2]를, 루프물에서는 [12 몽키즈]와 [사랑의 블랙홀]을 대표작으로 꼽을까 한다. [래빗홀]은 정면으로 평행우주가 나오지는 않고 소재로 다뤄질 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평행우주물의 환타지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골랐다. 또한 [빽투더퓨쳐]와 [터미네이터]는 시리즈가 전개되며 평행우주의 설정을 끌어오지만 전자는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시간여행물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후자는 3 이후는 망했다는 점에서 각각 1편과 2편에 한정해서라도 시간여행물의 대표작이라 주장하고 싶다.


 [래빗홀]은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다. 그 아들은 한 학생이 모는 자동차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여기서 아내는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 학생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다 그 학생이 그린 만화를 보게 된다. 토끼굴/래빗홀이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평행우주에 대한 내용이다. 아내는 학생에게 그 만화를 빌려읽고 자신이 잃은 아들과 과거에 학생이 잃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세상이 어딘가 있으면 좋겠다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바로 평행우주물의 욕망이다. 이 세계는 글렀다. 이 세계는 답이 없다. 이 항복선언이 평행우주물의 결론이다.

 평행우주물의 인물들은 일종의 탈주를 겨냥한다. 탈주라고 해도 거창할 것 없이 이 세계를 벗어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세계든 나의 적이 없는 세계든 부유하고 멋지고 강한 나로 존재하는 세계든 튀고 보자는 거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공간. 자신이 태어난 공간에 대한 애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평행우주물이 이런 결말로 끝이 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행우주물이 '집만큼 좋은 곳은 없지'라는 도로시의 말처럼 끝이 나지 않고서 긍정적인 엔딩을 맞이한다면 도피의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더욱이 다른 세계의 나, 다른 세계의 너라는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다른 세계면 다 다른 거지. 평행우주에서 어디까지 같아야 동일인물이고 어디까지 달라야 타인인가? 이름? 얼굴? 기준은 불가능하다. 평행우주는 매우 편리한 소재이지만 편리하면 할 수록 그 의의를 찾기 힘들어진다. 도피가 아닌 무엇일 수 있을지, 다른 세계에서 찾은 무엇이 원 세계와 동일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이 없다면 평행우주물은 그저 상업적 전개를 위한 다양성의 확보나 수습할 수 없을만큼 꼬인 상황을 잘라버리기 위한 임시방편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시간여행물은 보다 개척적인 태도다. [빽투더퓨쳐]의 마티 맥플라이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자기 가족에게) 이롭게 뒤바꾸는 모습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 3편이 서부개척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터미네이터2]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며 응원해주는 영화니까 말이다. 평행우주물과 달리 시간여행물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어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달리 말하면 시간여행물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신적인, 전지전능한 권능을 부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를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은 자기가 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마티 맥플라이가 자니 비 굿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예시로는 어쩌면 [빽투더퓨쳐]보다는 [엑설런트 어드벤처]의 주인공들이 더 좋은 예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는 '생각해봐. 우리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미래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처한 곤경을 해결해줄 거야!'라고 생각하자마자 문제가 전부 해결된다.

 물론 이런 어찌보면 유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태도가 시간여행물의 전부는 아니다. 우선 시간여행물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임머신]은 시간여행의 실패를 다루고 [나비효과] 역시 한 인간이 모든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짓기, 실패를 다룬다고 해서 시간여행물의 개척적인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척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며 어쨌든 평행우주물이 주인공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시공간을 영원히 상실하는 반면 시간여행물은 고향과 같은 시간대에 다시 돌아옴으로써/책임짐으로써 끝이 나니까 말이다.


 같은 시간대가 무한히 반복되는 장르인 루프물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의 입장에 따라 인물의 태도 역시 위 두 태도의 양극단으로 나뉘는 것 같다. [12 몽키즈]와 같은 경우는 시간여행으로 과거에 돌아가며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나고 [사랑의 블랙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대가 반복되나 자신의 인생을 되찾은 순간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결말이다.

 [12 몽키즈]는 뭘 해도 안된다, 라는 심플한 결론이다. 이런 식의 무한루프물의 경우는 하려고 한 것 자체가 망한 것의 원인이다, 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간 것 자체가 현실이 있게 만든 원인이며 그렇기에 타임패러독스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니까 말이다. 반면 [사랑의 블랙홀]처럼 돌파가 가능한 루프물의 경우에는 개척적이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를 요구하는 세계관이다. 내일을 갖고 싶다면 오늘을 죽어라 몇번이고 공략해야 하니까.(여기서 [마마마]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돌파 가능한 루프물은 인물들에게 루프 자체를 깨부술만큼 강한 동력을 짦은 기간 내에 찾아내는, 일종의 치트키에 가까운 극단을 요구하는 셈이다.

 즉 루프물은 평행우주물처럼 '이 세계는 글렀다 못해 다른 세계마저 글렀어'라는 염세적인 테리 길리엄스러운 태도이거나 시간여행물처럼 '이 세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존나게 개고생을 해야해'라는 낙관적이지만 그만한 노력을 요구하는 극단을 달린다. 이외의 선택지는 [터미네이터1]처럼 미래의 미래를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는 정도말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터미네이터1]을 온전한 의미의 루프물이 아니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사라 코너는 자신의 아들의 아들(부하)을 사랑하게 되고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상관)가 되는 루프를 겪지만 미래와 현재 사이의 공백에서 미래의 미래를 대비해야하는 책임을 지기에 비관도 낙관도 아닌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예언적, 묵시록적인 성격이 더 강하니까.


 평행우주는 의미가 없다. 모든 가능성이 가능해지는 세계관이란 모든 가능성이 무의미해지는 세계관이라는 말도 된다. 무한이 된 순간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시간여행은 철이 없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 하에 놓게 된다. 하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루프는 그 루프의 내용따라, 루프하는 시공간의 설정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가 180도로 휙휙 변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설정들은 모두 인물의 욕망에 의해 성격이 정해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니, 평행우주/시간이동/루프는 모두 인물의 욕망 그 자체를 설명한다.

 평행우주로 떠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에 다른 평행우주에 김꽃비가 없으면 절망이다. 김꽃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우주의 김꽃비와 다른 김꽃비면 큰일이다. 시간여행은 어떨까? 10년 후의 김꽃비와 10년 전의 김꽃비를 모두 다 만날 수 있다. [시간여행자의 아내]의 시간여행자는 남편이 아니라 신적인 스토커다. 유치하지만 부럽다. 일정한 시간대만을 반복해 살게 되는 루프에 빠지면? 문제는 루프가 아니라 루프 도중 김꽃비를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있다면 천국이고 없다면 지옥이다. 이 욕망 속에서 어떤 길을 고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구원일지는 이 예시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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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우유신화 1
MASA, JOANA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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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만화, 그 중에서도 능력자 배틀로 분류되는 장르는 필연적으로 구도자적인 성격을 가진다. 초능력이든 스탠드이든 넨이든 능력자 배틀의 화두는 주인공이 어떻게 최강의 자리에 오르느냐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르에서는 물리학적 이론에서 오컬트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지식을 통해 어떤 것이 가장 강한 것이며 이 경지에 오르는 수련법을 연마해 절대적이라고 생각되는 악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데 어찌 이 장르의 주인공이 구도자가 아니겠는가.

 얼마 전 완결된 마사토끼와 조안나의 [커피우유신화]는 이 능력자 배틀에 있어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마사토끼는 이 작품으로 신의 존재나 운명의 문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하여 철학적으로 명쾌하면서 알기 쉽게 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이과적인 작가라고 한계를 짓지만 이는 너무 겸손한 태도다. 마사토끼는 사랑에 대하여 그저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을 뿐이나 그 집요함을 통해 자연스레 철학으로서의 깊이를 이끌어내었다. 운명과 자유, 신과 인간 그리고 윤리와 이윤의 대립되는 화두를 마사토끼는 철두철미한 논지와 개드립을 통해 자연스레 하나의 결론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커피우유신화]는 두뇌배틀을 주로 그렸던 마사토끼답게 세계관이 복잡하니 정리하고 넘어가자. [커피우유신화]의 세계에는 세 가지 '힘'이 존재한다. 첫째는 '신'이다. 신이라고 하여도 전능한 초월자를 일컫는 것은 아니며 일정 조건을 클리어하여 자신이 믿는 것이 현실이 되는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을 가리킨다. 지금의 시대에는 커피의 신과 우유의 신이 있으며 미래에 이 둘이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아 커피우유라는 새로운 존재가 세계에 편입되며 신들은 그 능력을 잃고 인간으로 돌아올 운명이 주어져 있다.

 둘째로 신들을 음지에서 보좌하는 '회원'과 이들이 모여 이룬 단체인 '협회'가 존재한다. 이들은 인간을 초월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원근감을 무시해 물리력을 펼치거나 중력을 무시하는 식의 다양한 초능력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우주의 법칙이 있다. 이 법칙에는 두 신은 반드시 사랑에 빠지게 된다거나 신의 힘은 회원과 상대방 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등이 있다.

 이 독특하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세계에 균열이 생긴다. 바로 가짜신의 등장이다. 앞서 말한대로 신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건을 클리어해야 한다. 커피신의 경우에는 커피를 한잔을 마시고 5년 동안, 정확히 1억 5776만 6400초가 될 때까지 1만 잔을 마셔야 한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알아낸 회원 '로우위'가 신이 되는 조건에 도전해 운명이 정한 신과는 달리 정화된 세계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신이 되겠다고 나선 것. 몇몇 회원들은 로우위의 의견에 동조하고 커피신이 될 예정으로 점지된 고등학생 '리하이'를 암살하기로 결정하면서 협회간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얼마전까지 평범했던 고등학생인 리하이는 한시바삐 우유의 여신 '오선지'를 만나 임신을 시켜 신의 능력을 지우지 않는 한 암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만 것이다.

 이렇게 주인공이자 원조 커피신 리하이가 해야 할 일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운명을 따라 우유여신 오선지와 사랑에 빠질 것. 다른 하나는 로우위의 위협에서 자신과 주변 인물들을 지킬 것. 그러나 이 두 문제 모두 해결이 녹록치가 않다. 우선 리하이는 우연으로 인해 우유여신 오선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오선지로 착각해 오선지 본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또한 로우위는 협회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슈톨렌이라는 강력한 회원의 도움을 받고 있다. 슈톨렌은 신이 된 로우위 덕에 능력을 개화한 회원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만을 선취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 슈톨렌이 로우위를 신처럼 여기기에 우주의 모든 것들이 로우위에게 최상의 결과만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마사토끼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는 화두는 바로 운명과 자유의 문제이다. 운명적으로 정해진 사랑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주제를 러브코미디식 능력자 배틀물로 엮어내는데 어찌 구도자적이 아니랄 수 있을까? [커피우유신화]는 이 화두를 리하이와 오선지의 사랑의 가치와 리하이와 로우위의 싸움의 의미를 통해 묻는 것이다.

 우선 리하이와 오선지의 사랑부터 다루어보자. 리하이는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유여신의 협력이 필수적이며 둘 사이의 사랑의 결실인 임신을 통해 이 세계에서 신의 능력을 지워야만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리하이는 다른 여학생을 오선지로 착각하고 오선지를 평범한 사람이라 착각한다. (실은 엑스트라)오선지에게 접근해야 자신의 생명과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음에도 리하이의 마음은 (실은 오선지)엑스트라에게 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우연에 의해서만 리하이의 사랑이 증명된다. 세계의 운명따위는 엿바꿔 먹으라고 하고 스스로가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리하이는 오선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목숨 때문에 한 여성의 마음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리하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의 생명마저도 포기함으로써, 운명을 저버림으로써 도리어 그의 운명과 진정성을 증명하는데 성공한다.

 둘의 사랑은 잘 되었다치자. 그렇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둘의 사랑이 결국 운명이 정해준 것이고, 스스로의 마음을 증명해내기 위해 운명의 장난으로 우연과 우연이 겹쳐 힘든 과정을 통해야 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저 운명이 모든 것을 정해놓았다면 인간의 선택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중인물인 C.발 렌타인의 입을 빌어 제기되는 이 문제는 또 다른 신 로우위와의 결착을 통해 해결된다.

 아닌게 아니라 로우위는 그 자체로는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를 보위하는 회원 슈톨렌의 능력은 절대적이다. 슈톨렌에게는 자신과 로우위에게 유리한 운명만이 남아있으며 그가 능력을 얻은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승리는 결정된 일방통행일 뿐이다. 실제로 리하이를 따르는 회원들이 로우위를 공격하려 했지만 말도 안되는 우연으로 습격은 실패한다. 그러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언제나 최상의 결과만을 알려주는 선지자를 둔 로우위는 리하이에게 패배하고 만다. 우유여신 오선지의 리하이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꿈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로우위가 얻은 최상의 결과라는 것은 그저 꿈 속의 이야기로 전락해버렸다. 그렇다. 인간은 운명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운명을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자질구레한 조건들이 아무 상관도 없게 느껴질 때. 모든 조건들을 저버리고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때 증명된다. 이 선택은 그 어떤 타율도 아닌 자율로만 가능하다. 자율이라고 하지만 이를 이기적인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감싸안는 새로운 법을 정립하는 것, 그것만이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로우위의(슈톨렌의) 능력은 미래를, 운명을 선택한다지만 실상 전혀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그런 상황이 되면 그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자유로운 일은 아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선택이 아니므로 자유도 아니다. 사랑은 당연히 당연이 아니다.

 사랑은 얼핏 모순으로 보인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만이 선택이라면, 상대방을 위한 윤리에 복종하는 것만이 자유로운 일이다. 이 복종은 자유에 복종하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자유로우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은 자유다. 사랑은 선택 가능한 단 하나의 것이다. 유일하지만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모든 것을 다 얻는다. 복종하지만 자유롭다. 다시 정리해보자. 유일하기에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바치기에 모든 것을 다 얻는다. 복종하기에 자유롭다. 최상이 아닌 최선의 길을 걷기에 최상의 결과를 얻을 자격을 가진다. 최강이다. 사랑은 모순이 아니다.

 운명의 연인이라는 것은 운명이 정해준, 운명이 점찍어준 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모든 운명을 결정 짓는 그 연인이 바로 운명의 연인이다. 당신은 우주에서 최고인 사람을 찾아냈기에 그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연인으로 선택하였기에 그 사람이 우주에서 최고라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주의 중심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당신의 우주는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새로이 태어나니까.

 [커피우유신화]에서 '너는 나의 여신이야'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유치한 말이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진리를 적확하게 논리적으로 구성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외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은 행복의 방법이 아닌 조건이다. 최저의 전제이자 최상의 목표이다. 사랑하는 이를 여신이라고 숭배하는 것은 어린애 생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건 진리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서술일 뿐이다. 여신의 존재 아닌 전제 하에, 그 절대적 가치를 향해 매진하는 것 외에 어떤 윤리적 존재론적 선택지도 불가하다. 이제 김꽃비는 여신이라는 나의 주장은 털끝만한 논리적 결함도 없이 완벽하게 명증하다는 것을, 김꽃비를 향한 나의 사랑이 날카롭고도 냉철함으로 가득 찬 이성과 논리의 결과물임을, 김꽃비가 온 우주의 중심이라는 과학적 검증을 모두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만장하신 여러분. 김꽃비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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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 [초특가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 씨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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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다룰 주제는 '나쁜 남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만한 점은 저번 주제의 힙스터에 이어 연애 역시 나에겐 생소한 영역인데다 검색이나 책을 찾아봐도 그럴듯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애는 몰라도 연애를 못하는 남자는 매우 잘 알고 있다. 매우 잘 알고 있다. 이번에 다룰 이야기도 여기에 중점을 맞출 생각이다. 그러니 이 글의 주제는 정확히 말해 '나쁜 남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라는 가상의 존재를 꾸며내는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다.

 저번 글의 힙스터라는 주제에서는 분석 텍스트로 [2 broke girls]를 꼽았다. 이번에도 분석 텍스트와 병행해 주제를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 텍스트는 바로 [Mr. & Mrs. Smith]다. 한글로 번역하면 [갑남을녀] 쯤 될 제목의 영화. 단 착각하면 안될 것이,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가 나오는 첩보액션섹시코미디 [Mr. & Mrs. Smith]가 아닌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1년작 부부싸움이야기인 [Mr. & Mrs. Smith]이다. 아무리 나의 수많은 꿈 중 하나가 브란젤리나에게 입양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덕 리만 판 [Mr. & Mrs. Smith]는 착한 남자/나쁜 남자 이야기와는 무관하니까.

 1941년 판 [Mr. & Mrs. Smith]가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이라고 해서 그 내용을 스릴러나 서스펜스라고 짐작해서는 안된다. 히치콕이 잔인한 내용만 영화로 찍었다는 것은 편견이다. 이 영화는 히치콕 식의 로맨스코미디로 피가 흐르는 장면이야 코피가 나오는 정도밖에 없다. 그 분위기만 본다면 알프레드 히치콕이 아닌 빌리 와일더의 영화라고 착각해도 무리가 없을만큼 달달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반복되는 작품이다.


 스미스 부부는 정답다. 숨기는 것 없이 거짓말 하는 것 없이 지내자고 다짐하는 신혼 3년차. 그러나 어느날 업무행정상의 실수로 이 둘의 결혼은 법적으로 무효라는 것이 뒤늦게 밝혀진다. 큰일은 아니다. 다시 신고만 하면 되니까. 남편 데이빗은 부인 애니가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을 모르고 별말 없이 지내고, 이에 대한 애니의 불만이 폭발한다. 이 참에 자신을 버리고 떠날 셈 아니냐며 데이빗을 추궁하다 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지고 애니를 예전부터 흠모하던 남편의 친구 제프가 그 사이에 끼어들며 상황은 복잡해진다.

 똑같은 [Mr. & Mrs. Smith]이더라도 데이빗과 애니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브래드피트와 졸리의 해법과는 정반대다. 브란젤리나는 서로에게 숨겨온 첩보원의 삶을 밝히고 그제껏 품어온 불평과 불만을 터뜨려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갈등을 해소하여 제니퍼 애니스톤은 지붕만 쳐다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는)화끈한 정사씬을 연상케 하는 총기난사씬으로 무장한 2005년의 [Mr. & Mrs. Smith]와 달리 1941년의 [Mr. & Mrs. Smith]은 보다 교묘하고 앙큼한 두뇌싸움을 표방한다.

 히치콕의 [Mr. & Mrs. Smith]는 어떤 거짓과 숨김없이 완벽히 하나가 된 커플을 다루지 않는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게임에서 기만과 속임수는 상대방에게 바치는 찬사이자 전장에 임하는 기사의 덕목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1941년의 [Mr. & Mrs. Smith]인 것이다. 갈등의 발단은 데이빗이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자신과 결혼할 것이냐는 애니의 질문에 '아니'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것이었으며 그 봉합은 질투심 유발 작전에 동정심 유발 연극 등 능구렁이 같은 구라였다. 마지막에 이르러 데이빗은 주정뱅이를 연기하고 애니는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연기를 하지만 이 모두 상호 이해와 합의 하의 게임이었으며 이로써 사랑은 다시 결실을 맺는다.

 여기에서 데이빗에 반대되는 인물, 그러니까 애니를 흠모하던 데이빗의 친구 제프와의 비교가 중요하다. 제프는 '착한 남자'의 대명사라고 해도 좋을 인격자로, 가능한 모든 것을 애니에게 맞추며 헌신한다. 비가 오면 코트를 벗어주고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작별의 키스를 해줄 수 없다는 배려와 애니가 데이빗에게 마음이 기우는 모습을 보아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애니의 행복일 뿐이라며 기꺼이 이별을 받아들이겠다는 대인배적 풍모를 풍긴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배역의 인물은 로맨스코미디에서는 주인공의 관계를 응원해주는 멋진 친구, 이상 이하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만 증명하고 사라진다.


 [Mr. & Mrs. Smith]가 시사하는 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이 과연 애정의 문제에 있어 진실하냐는 질문이다. 애정의 문제는 수학답안지가 아니다. 옳고 그름, 정답과 오답을 결정해서 보여주는 것은 회사 보고서에서나 요구하는 영역이다. 애정의 문제는 자신이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를 증명하는 문제이고, 여기서 정직하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증명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애정은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 문제다. 척하니 답만 적어낼 것이 아니라 그 답을 증명해내는 실천과 풀이과정을 요구로 하는 것이다. 목적이 아닌 과정이 목적이다.

 예를 들어보자. 외계인의 침략으로 지구가 무한히 증식하는 버섯에 둘러싸여 인류 존폐의 위기에 처한 상황을 가정하고, 이 미증유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당신이 당신의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외계인이 조건을 제시했다고 해보자.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에서 인류는 당신이 연인에게 프로포즈를 하길 강요할 것이고 당신 역시 도덕적 책임감에 의해 세레나데를 준비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당신의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 당신의 연인은 그 고백에서 당신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없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진실은 언제나 실수에서 발견된다. 아니, 솔직한 고백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연인에게 당당히 사랑을 고백해서 즐거이 연애하는 커플 많이 봤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 마음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은 어떤 우연에서, 어떤 계획되지 않은 사건에서 크게 흔들리기 마련이라 말하고 싶을 뿐이다. 즉 사랑에 대한 가장 진실한 고백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기만과 의심 속에서 (정확히는 그 실패 끝에서) 발견되는 흔적에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Mr. & Mrs. Smith]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거짓말이야말로 어떤 밀어보다도 완벽하게 스스로의 애정을 증명하지 않던가.

 시사하는 점 두번째는 바로 착한 남자가 과연 착한 남자냐는 질문이다. [Mr. & Mrs. Smith]에서 제프는 흠잡을 곳 없는 인격자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는 언제나 애니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착한 남자가 과연 착한 남자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해서 제프라는 인물을 허풍섞인 선의로 가장한 위선적인 인물로 착각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제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냥하고 진실되게 행동한다는 점만은 보증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두번째 질문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주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여성을 숭배하고 그 모든 것을 따르는 것이 과연 대등한 관계일 수 있을까? 설마. 인간을 숭상하는 것은 인간을 처분하는 것만큼이나 타자화하는 것이다. 신으로 만드는 것이나 악마로 모는 것이나 인간 취급하지 않긴 매한가지다. 숭고한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그 대상이 된 여성은 박제되어 어떤 욕망도 용납되지 못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렇게 상대방의 관심사는 관심도 없이 자신이 상대방을 숭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착한 남자로 착각하는 경우다. 동시에 이렇게 희생하지 않는 자신과 다른 모든 남자들을 나쁜 남자로 몰고 가면서.

 물론 어떤 이미지로서의 '나쁜 남자'의 판타지야 존재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검은 가죽자켓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차도남을 연출하는 남자가 어디 100명 중 1명이라도 있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내가 이만큼 양보하고 위해줬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하며 나만이 진실하며 나머지는 나쁘다는 것은 그렇게 바른 일로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무조건 떠받드는 것은 상대방이 화내는 모습을 보기 싫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두려워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피하는 셈이다. [Mr. & Mrs. Smith]이 가리키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살면서 거짓말도 하고 싸움도 한다. 이것은 인생의 일탈이나 왜곡이 아니라 필연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는 히치콕과 브란젤리나 중 히치콕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입양은 브란젤리나에게 갈 거지만.


 혹시나 싶어 덧붙이자면, 진짜 착한 남자들은 걱정하지 말라. 진짜 착하면 연애 잘한다. 대신 얼마나 착해야 하냐면 그냥 문 열어주고 의자 당겨주고 이런 착함이 아니라, 주변에서 보기에 '저 사람은 진짜 저렇게 살다가 손해만 보고 너무 남만 살펴서 짜증날 정도야'라고 여길 정도로 착하면 된다. 그리고 내가 위에 제시한 자신말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나쁜 남자로 몰며 자신은 착한 남자로 착각하는 남자가 어디있냐고 따지지도 말아주길 바란다. 이거 다 내 얘기다. 내가 연애 못하는 이유 박사논문 700p로 쓰는 거 여기에 간단히 미리 개요만 잡아둔 거다. 그것도 이거 아직 1장이다. 8장까지 있는데 다 쓰면 너무 오래 걸려서 이쯤만 쓴 거다. 이 세상 많은 착한 남자들의 건승을 빈다. 비록 당신들이 진짜 착한 남자는 아니더라도 사랑과 행복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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