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평행우주물이나 시간여행물, 루프물과 같은 소재는 눈에 띄다 못해 질릴 정도로 우려진 것 같다. 굳이 SF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고서도 연애물이나 학원폭력물 같은 영역에서도 흔히 이 세가지 세계관이 다루어지니 말이다. 그래도 이중 가장 최신의 유행은 평행우주물이 아닌가 싶다. 여기에야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야 원소스멀티유즈의 다양한 상업적 전개를 모두 정당화하고 정사라는 딱지를 붙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욕망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며 과대해석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우선 평행우주물에 대해서는 [래빗홀]을, 시간여행물은 [빽투더퓨쳐1]와 [터미네이터2]를, 루프물에서는 [12 몽키즈]와 [사랑의 블랙홀]을 대표작으로 꼽을까 한다. [래빗홀]은 정면으로 평행우주가 나오지는 않고 소재로 다뤄질 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평행우주물의 환타지가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골랐다. 또한 [빽투더퓨쳐]와 [터미네이터]는 시리즈가 전개되며 평행우주의 설정을 끌어오지만 전자는 근본적으로는 계속해서 시간여행물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 후자는 3 이후는 망했다는 점에서 각각 1편과 2편에 한정해서라도 시간여행물의 대표작이라 주장하고 싶다.
[래빗홀]은 어린 아들을 잃은 부부간의 갈등을 다룬 영화다. 그 아들은 한 학생이 모는 자동차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여기서 아내는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 학생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다 그 학생이 그린 만화를 보게 된다. 토끼굴/래빗홀이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평행우주에 대한 내용이다. 아내는 학생에게 그 만화를 빌려읽고 자신이 잃은 아들과 과거에 학생이 잃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세상이 어딘가 있으면 좋겠다며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바로 평행우주물의 욕망이다. 이 세계는 글렀다. 이 세계는 답이 없다. 이 항복선언이 평행우주물의 결론이다.
평행우주물의 인물들은 일종의 탈주를 겨냥한다. 탈주라고 해도 거창할 것 없이 이 세계를 벗어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세계든 나의 적이 없는 세계든 부유하고 멋지고 강한 나로 존재하는 세계든 튀고 보자는 거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공간. 자신이 태어난 공간에 대한 애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모든 평행우주물이 이런 결말로 끝이 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행우주물이 '집만큼 좋은 곳은 없지'라는 도로시의 말처럼 끝이 나지 않고서 긍정적인 엔딩을 맞이한다면 도피의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다.
더욱이 다른 세계의 나, 다른 세계의 너라는 것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다른 세계면 다 다른 거지. 평행우주에서 어디까지 같아야 동일인물이고 어디까지 달라야 타인인가? 이름? 얼굴? 기준은 불가능하다. 평행우주는 매우 편리한 소재이지만 편리하면 할 수록 그 의의를 찾기 힘들어진다. 도피가 아닌 무엇일 수 있을지, 다른 세계에서 찾은 무엇이 원 세계와 동일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고민이 없다면 평행우주물은 그저 상업적 전개를 위한 다양성의 확보나 수습할 수 없을만큼 꼬인 상황을 잘라버리기 위한 임시방편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시간여행물은 보다 개척적인 태도다. [빽투더퓨쳐]의 마티 맥플라이가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자기 가족에게) 이롭게 뒤바꾸는 모습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 3편이 서부개척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아니다. [터미네이터2]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며 응원해주는 영화니까 말이다. 평행우주물과 달리 시간여행물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주인이 되어 모든 사건의 원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달리 말하면 시간여행물은 주인공에게 일종의 신적인, 전지전능한 권능을 부여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과를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은 자기가 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마티 맥플라이가 자니 비 굿의 원인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예시로는 어쩌면 [빽투더퓨쳐]보다는 [엑설런트 어드벤처]의 주인공들이 더 좋은 예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는 '생각해봐. 우리에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미래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처한 곤경을 해결해줄 거야!'라고 생각하자마자 문제가 전부 해결된다.
물론 이런 어찌보면 유치하다고도 할 수 있는 태도가 시간여행물의 전부는 아니다. 우선 시간여행물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임머신]은 시간여행의 실패를 다루고 [나비효과] 역시 한 인간이 모든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짓기, 실패를 다룬다고 해서 시간여행물의 개척적인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개척은 성공할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며 어쨌든 평행우주물이 주인공 자신이 원래 살고 있던 시공간을 영원히 상실하는 반면 시간여행물은 고향과 같은 시간대에 다시 돌아옴으로써/책임짐으로써 끝이 나니까 말이다.
같은 시간대가 무한히 반복되는 장르인 루프물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고, 각각의 입장에 따라 인물의 태도 역시 위 두 태도의 양극단으로 나뉘는 것 같다. [12 몽키즈]와 같은 경우는 시간여행으로 과거에 돌아가며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역사는 바꿀 수 없다는 것으로 끝이 나고 [사랑의 블랙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대가 반복되나 자신의 인생을 되찾은 순간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결말이다.
[12 몽키즈]는 뭘 해도 안된다, 라는 심플한 결론이다. 이런 식의 무한루프물의 경우는 하려고 한 것 자체가 망한 것의 원인이다, 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과거로 돌아간 것 자체가 현실이 있게 만든 원인이며 그렇기에 타임패러독스는 불가능하다는 관점이니까 말이다. 반면 [사랑의 블랙홀]처럼 돌파가 가능한 루프물의 경우에는 개척적이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를 요구하는 세계관이다. 내일을 갖고 싶다면 오늘을 죽어라 몇번이고 공략해야 하니까.(여기서 [마마마]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돌파 가능한 루프물은 인물들에게 루프 자체를 깨부술만큼 강한 동력을 짦은 기간 내에 찾아내는, 일종의 치트키에 가까운 극단을 요구하는 셈이다.
즉 루프물은 평행우주물처럼 '이 세계는 글렀다 못해 다른 세계마저 글렀어'라는 염세적인 테리 길리엄스러운 태도이거나 시간여행물처럼 '이 세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존나게 개고생을 해야해'라는 낙관적이지만 그만한 노력을 요구하는 극단을 달린다. 이외의 선택지는 [터미네이터1]처럼 미래의 미래를 미지의 영역에 남겨두는 정도말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터미네이터1]을 온전한 의미의 루프물이 아니라고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 사라 코너는 자신의 아들의 아들(부하)을 사랑하게 되고 존 코너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상관)가 되는 루프를 겪지만 미래와 현재 사이의 공백에서 미래의 미래를 대비해야하는 책임을 지기에 비관도 낙관도 아닌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예언적, 묵시록적인 성격이 더 강하니까.
평행우주는 의미가 없다. 모든 가능성이 가능해지는 세계관이란 모든 가능성이 무의미해지는 세계관이라는 말도 된다. 무한이 된 순간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시간여행은 철이 없다.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지배 하에 놓게 된다. 하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기도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루프는 그 루프의 내용따라, 루프하는 시공간의 설정에 따라 이야기의 주제가 180도로 휙휙 변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설정들은 모두 인물의 욕망에 의해 성격이 정해짐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니, 평행우주/시간이동/루프는 모두 인물의 욕망 그 자체를 설명한다.
평행우주로 떠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에 다른 평행우주에 김꽃비가 없으면 절망이다. 김꽃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우주의 김꽃비와 다른 김꽃비면 큰일이다. 시간여행은 어떨까? 10년 후의 김꽃비와 10년 전의 김꽃비를 모두 다 만날 수 있다. [시간여행자의 아내]의 시간여행자는 남편이 아니라 신적인 스토커다. 유치하지만 부럽다. 일정한 시간대만을 반복해 살게 되는 루프에 빠지면? 문제는 루프가 아니라 루프 도중 김꽃비를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있다면 천국이고 없다면 지옥이다. 이 욕망 속에서 어떤 길을 고르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구원일지는 이 예시로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