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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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9월 22일, 427쪽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유독> 전문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기념사진> 전문

 

 

:

300페이지 즈음이다. 저자가 4부에서 시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나열하다 '시는 어떤 특별한 무지의 상태를 포착하는 작업'이라며 이들을 함께 수록한 그 지점에서 서평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혼자 곰곰 어떤 생각을 하다, 책을 읽다, 문득, 생경하게 그려지면서도 특별히 어떤 단어로 얽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이 두 편의 시와 함께 신형철 선생님은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 파트를 다 읽은 나는 단말마 같은 '아' 소리를 작게 한 번 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첫 번째 시에서는 어떤 '냄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너'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바라보면서 '네가 아는 것을 나는 모르는구나' 하는 '나'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저 자신이 아는 것을(나는 그 냄새를, 너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서로 모르고 있으니, 또 '웃음을 멈추면 슬픈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웃음을 마저 즐기기로 한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연인이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함에도 부득불 손안에 들어찬 어둠을 느끼면서 걷고 있다. 이 두 편의 시에서처럼 우리는 삶이 나라는 사람으로 현신하기에 그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로 존재하는, 손안의 어둠과도 같은, 죽음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건 꼭 배우지 않아도 안다. 거미의 노래에서도 '이별은 사랑 뒤를 따라와 떠날 땐 사랑까지 데리고 간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행복의 이면엔 슬픔이 있다. 그리고 우린 그 슬픔을 인지해도 행복하기로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선생님만의 스타일로 비평문과 에세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은 진중함과 솔직함, 문학성이 골고루 배어 있는 글로 대한민국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건드리고 있었다. 올곧게 제 목소리를 내는 한 명의 지식인이 쓴 자기반성의 글이자 현상(現狀)을 짚어 독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돋보기로, 반짝이는 문장들이 가득한 보고(寶庫)로 다가온 이 책을 읽는 내내 아껴 읽는 즐거움이 나를 따라다녔다.

책이라는 건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떤 기준이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다만 삶의 고민과 맞물리는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책 자체로만, 내 감정은 감정 자체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최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내 마음에 집중하고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차례 했으나, 내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자문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책에서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요즘의 나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내가 나에게 한계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다. 동시에 '내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상정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그 모습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하지 말자. 적어도 누군가에게 (무심하게라도) 상처주지는 말자. 나 한 사람의 몫은 제대로 해내자와 같은 마음들.

그런 신념을 잘 지키며 살아도, 나와 가까운(혹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가끔 그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확신을 주기도, 활력을 얻게도 했다. 실은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계에 부딪혀가며 알아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나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 이건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또 타인을 위해서도 꾸준하게 슬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도 이런 마음과 맞닿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폭력에 대한 정의'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다. 신형철 선생님은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마음이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그 반대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타자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마다치 않고 하는 사람이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섬세함으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손쉽게 재단하고 판단하는지 가끔 잊고 살 때가 있다. 내 기준으로 상대의 진심을 호도하는 경우도 많다. 내 아픔이나 슬픔에는 예민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또 이렇게 둔감할 수가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함을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순간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며 톺아보게 된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만 했다고. 그렇게 나를 방어하기 전에 솔직하게 돌아보면 나에게만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 무심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한다. '자기반성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 '나의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흩어지기 직전의 임계점은 어디인가.' 하고. 확신에 차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그 고통스러운 지점에서 상처에 대한 아묾도 성찰도 시작된다고. 나의 지난 27년을 돌아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시절보다 혼자 고민하고 아팠던 시간 동안 성장도 했구나 싶어 외로움에 떨던 그 시간과 감정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고통까지도 부드럽게 만들어 준 시간의 힘에 기대어 나 자신을 반추한다.

 

 

 


 

 

 

맨 처음 언급했던 슬픔과 기쁨은 역설적이게도 항상 함께 한다. 책에서는 '깨어 있음'과 '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짚어내고 있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남이라는 사태를 체험할 수 없'으므로 '자는 사람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 수없이 시행 착오를 겪는 것처럼, 깨어있는 시간을 예비하기 위해 잠드는 건 필수 불가결이다. 슬픔이 따를 것을 알고 있지만 행복하는 데 망설이지 않기로 하듯, 나 역시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나의 슬픔과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일을 미루지는 않기로 했다.

더불어 고백한다. 괴롭고 힘들 때 타인의 상처와 힘들었던 시간을 전해 듣고 위로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그 상처를 되돌아 보아야 했던 상대방은 나와 함께 눈물 흘렸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마음에 큰 위로를 받고 그(녀)와 깊은 유대감을 느꼈음을. 또 나 역시도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힘들어 할 때, 상처를 받은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마음에 깊이깊이 묻어두었던 묵은 감정을 꺼내어 돌아보았던 적이 있었음을. 

 

 

 

 

슬픔을 공부한다는 건 그래서 숭고한 일이고, 세상을 살아가며 아주 당연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라는 생각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 것인가, 듣는 이의 마음에 남아 어떤 형태로 발현될 것인가 곰곰 고민하여야 한다. 나의 삶의 궤적과 맞지 않는다 하여 저 이의 궤적과 맞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도 버리고, 내가 잘 모르는 고통이라 하여 남도 잘 모를 것이라 섣부르게 결론 내리지도 말고.

친한 동생이 말한 적이 있다. '언니는 정말 심지 있는 사람이에요. 강한 사람이고. 누군가를 위해서 슬퍼하듯 언니 자신을 위해서도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털고 앞으로 나가요.' 그래. 같은 맥락 아닐까. 삶으로 슬픔을 공부한 만큼, 고통 공감 능력도 커지리라. 그래서 다른 이의 슬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또 그(녀)의 마음 자리에 가 닿고, 또 그(녀)는 다시 누군가의 마음 자리에 가 닿으리라고. 또 희망을 가져 본다. 진심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또 그 진심의 힘을 전연 부정하는 이도, 느끼지 못할 이도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의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고야 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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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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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폴 맥어웬 지음, 조호근 옮김, 허블, 초판 1쇄 발행: 2018년 9월 5일, 520쪽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Spiral>로, 외국에서는 2011년에 출간되었다. 책 표지의 그림과 글씨체의 조합을 보면 (그리고 외국에서 발간한 책과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책의 디자인의 차이를 비교하다 보면)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은 SF 스릴러라는 분야와 약간 색채가 다르게도, 또 다른 시선에서 보면 잘 어울리게도 느껴진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디자인은 제목이었다. 소용돌이에 휩쓸리는듯 빨려드는 글씨. 그리고 소용돌이를 관조하는듯 올려다 보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는 아주 적합한 디자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디자인에 어떤 상념을 가지지 않고 가볍게 책을 편 후, 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배를 향해 노를 저어 오는 구명 보트에 탄 사람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깨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을 만큼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책을 읽을 당신도 이에 공감하리라고, 또는 책을 읽은 당신도 그리 생각했으리라고 본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일련의 사건들과 대화에 집중하게 되는 데에는 (작가가 설정한) 캐릭터가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그런 면에서 작가가 캐릭터 하나하나에 애정을 쏟았다고 단언한다.

왜냐, 작가가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 그려낸 덕분에 그 인물의 생김새, 성격, 신념, 취미, 습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함께 떠올리며 이야기의 흐름에 보폭을 맞춰가며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릴러물은 이러한 심리를 잘 따라서 밟아갈수록 더욱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리암 코너 교수의 젊은 시절부터 손녀와 함께하는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럴 법 하다'며 별 어려움 없이 그의 마음에 공감했고, 신념을 지키는 강단 있는 모습에 그를 자연스레 응원하게 되었다. 비록 여러 균류를 수집하는 그의 손에 굉장히 위험한 '무기들'이 쥐어져 있었기에(그가 일명 '부패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곳에 속한) 그것들이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했지마는.

 

 

 

 

생생함을 주기 위한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스파이, 범죄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일본 731 부대의 실험으로 배양된 최악의 균 '우즈마키(소용돌이라는 뜻으로,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 끔찍한 환각 증상을 보이고 광기에 시달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균류)'가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으로 미군 함대 한 척 전체에 퍼지는 장면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사로잡은 일본의 가미카제 '히토시 기타노'에게서 얻은 우즈마키 균이 든 실린더 하나. 그것이 리암 코너 교수의 손에 있으니 더욱 불안할밖에.

그 실린더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내는 (것만 같은) 리암 코너 교수. 독자 입장에서는 그가 모으고 있는 저 균류의 바다가 지레 불안하고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나. 초반 자세하게 묘사되는 우즈마키의 위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을 목도하고도 저들과 공생할 수 있을까. 두렵지 않을까.

새초롬하게 움직이던 마이크로 크롤러(리암 코너 교수가 일할 때 손을 빌리던 기계명)들이 결국 부검을 통해 본인의 위장에서 발견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조용한 공간에서 일하던 코너 교수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위험에 처하리라는 사실을 아는 독자들은 숨죽여 그 때가 오기만을 손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결국 리암 코너 교수는 다리 위에서 투신한다. 자살할 동기가 없는 사람이 처음 보는 여성과 함께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작스레 달리다 뛰어내려버린 상황이다.

손녀인 '매기 코너'와 리암 코너 교수의 동료이자 제자인 '제이크 스털링'은 함께 유언장을 살피며 단서를 찾아 나간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 앞에 실마리가 하나씩 나타나고, 그 와중 듣게 된 리암 코너 교수의 부검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진실을 향해 한발씩 나아갈수록 어룽거리던 암살자의 그림자는 더욱 진하고 뚜렷해진다. 숨겨진 비밀, 우즈마키의 행방, 그리고 레터 박스와 모스 부호까지. 이 모든 소재가 얽히고 설켜 참혹한 진실로 나아가게 하는 책,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

 

 

 

이 책의 매력은 '과학 스릴러'만이 줄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한 추리 과정과 상세한 설명으로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다는 점이다. 스쳐지나가는 설명이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하고, 과정과정을 이해하며 읽어나가는 데서 오는 지적 충족감이 상당하다. 아래는 그와 관련한 페이지들을 일부 담은 사진들.

 

 ***

 

 

***

 

 

실험체로 사로잡힌 이들을 가장 빨리 죽인 균류를 수집해 배양을 거듭하여 만들어 낸 '우즈마키', 그리고 그 위험한 무기를 막는 것은 결국 사람. 사람이 만들어낸 비극과 그 비극을 수습하는 사람 간의 숨막히는 관계 속에서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긴장하고 추리하고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코넬 대학에서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폴 맥어웬의 소설, <소용돌이에 다가가지 말 것>은 '기술 특유의 명암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써낸 한 편의 근사한 이야기로 접할 수 있다'는 점(책 소개에서 발췌)에서 흥미롭다. '과학 스릴러'라는 단어에 끌린 독자라면 과감하게 이 책을 집어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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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웨이안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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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녕, 웨이안>,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3월 23일, 198쪽

 

책의 뒤표지에서부터 평범한 결혼을 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는 이 책이 전달하는 전반적인 정서는 '쓸쓸함'이다. 어떤 공간에 머물 때 내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공간을 제외하면 남는 그 공백들, 숨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무생물이 주는 차가운 감각, 인생을 살아가며 생기는 허무한 감각이 책을 뒤덮고 있다. 이 책 역시 앞서 서평을 썼던 <칠월과 안생>과 같이 여러 편의 짧은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가 '칭산'으로 동일해서인가 책을 덮을 때 느꼈던 씁쓸한 뒷맛이 아직까지도 생경하다.

 

 

 

책은 <칠월과 안생>, <안녕, 웨이안> 모두 제본 형식이 특이하여(단순히 책등 디자인이 별도로 붙지 않고 풀을 발라 말려놓은 데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세트 구성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다. 최근 북디자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어서,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가지의 색감을 다르게 하되 책 제본 방식을 통일하여 세트 구성의 느낌과 (간접적이나마) 중국 고서의 느낌을 동시에 살릴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이 책을 소개받았을 때 중국 저자가 쓴, (한국의 인터넷 소설과 같은 개념의) 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시선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의 인터넷 소설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소설이라 하면 어느 직업군이건, 어떤 사람을 만나건 사랑에 빠지고 갈등을 겪고 위기를 맞고 헤어질 위기에도 놓이고 한 번쯤은 헤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일도 성공하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중국의 인터넷소설이라는 이 책, <안녕, 웨이안>은 손쉬운 결말이 하나도 없다. 이별을 고하거나, 마음 속 갈등이나 고독은 그대로인데도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고뇌하고 번민하다가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세상은 계속 돌아간다. 그리고 저자는 다시 외로운 누군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그를 재조명한다. 아, 또 슬프고 외로운 누군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이 끝은 결코 행복하진 않으리라. 곱씹으며 다음 장을 펼친다.

 

 

 

안: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은 보통사람보다 행복 호르몬이 덜 나온대요.
그: 당신은 어떤데요?
안: 내 마음은 어떤 때는 꽉 차고, 어떤 때는 텅 비어요.
14p, 「안녕, 웨이안」

"정말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지금껏 이해한 적도 없지만."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해하려고 하는 거야? 우린 언제나 외로워.
그냥 함께 있으면 되는 거지, 사랑할 필요는 없어."
42p, 「안녕, 웨이안」

 

안, 너는 꼭 식인 식물 같아. 생긴 건 위협적이지 않은데 누가 너에게 다가서는 순간 독을 쏘잖아.
상대방이 아예 손쓸 새가 없도록.
56p,「상처」

 

 

그의 도시에 왔다. 직접 와본 적은 없지만, 한때 사랑한 사람이 살았던 조그마한 도시.
그녀는 그가 자주 짓던 표정을 가만히 그려보다
불현듯 자신이 한순간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그는 그녀 마음속의 작은 주름으로 접혀 있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도 다시 반듯하게 펴지지 않는 주름이었다.
69p, 「텅 빈 도시」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하철 플랫폼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늘 차가운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바삐 가고 있어.
다들 외로움이라는 투명 외투를 걸치고서.

그 모습이 꼭 심해를 가르는 물고기처럼 보여. 제각각 자기 일을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들이지.
75~76p,「텅 빈 도시」

 

단편마다 순간 순간 저들이 느꼈던 외로움과 고독, 경계와 공허, 허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는데, '이 감정,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던 거였는데' 싶기도 하고 최근에 받은 상처들로 내면이 많이 다치고 가라앉아 있어 '내가 모르다가 새로 이해하게 된 감정인가' 싶기도 했다. 책에 나온 글귀처럼 '내 마음이 차츰차츰 사위어 차가운 먼지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어서 그런가, 또 그런 생각도 했다.

슬픔은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주고 한다 해서 공유되는 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아파본 경험이 있고 울어본 경험이 있어야지 그 순간을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나의 그 아픈 경험을 상대에게 털어놓으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바쁘게 일하다 집에 오면 그 적막에 파묻혀 멍하니 있어본 사람만이, 불 꺼진 집의 불을 직접 켜 '누구 없나' 하고 허공에 말을 걸어본 사람만이, 속상하고 슬플 때 혼자 속울음을 삼켜본 사람만이 아마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점차 줄어들었으면.

 

:

에밀리 브론테는 섬에 있는 교도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자신 앞에 항상 혼자 있을 곳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기 전에는 충분히 혼자여야 하거든요. 그것이 무엇인지,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저는 그저 사랑을 기다릴 뿐입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해도 말이지요. 그 기다림이 바로 사랑이니까요." / 94p, 「텅 빈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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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과 안생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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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과 안생, 칭산 지음, 손미경 옮김,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1월 29일, 287쪽

 

 

사랑하는 사람을 나눌 수 있는 우정은 도대체 뭘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또 다시 앞서 읽었던 <체공녀 강주룡>에 대한 서평에서 언급한 영화, <해어화>를 떠올렸다.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도 (고증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품과 복장의 섬세함과 영상미 때문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섬세한 연출력에 감탄하고는 한다. 그러나 유연석이 분한 캐릭터가 보여주는 우유부단함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무책임함, 천우희가 분한 캐릭터가 보여주는 사랑에 대한 욕망에 반감이 들어, 이 영화를 떠올리면 항상 양가 감정이 들었다.

왜 그 남자는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너는 그저 귀여운 동생일 뿐이니 나를 포기하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왜 그 여자는 단짝 친구의 연심을 긴 시간 지켜보았음에도 무심히 짓밟고야 말까. 정말, 정말로 친구의 진심을 몰랐을까? 왜 제 마음을 친구에게 먼저 말해 주지도 않은 채 휩쓸리듯 격정적으로 감정을 발산하고야 말았을까. 제 감정에는 솔직했을지 몰라도 누군가의 감정에는 너무나 폭력적이었다고, 영화를 본 지 한참이 흘렀는데도 그때 느낀 감상이 생생하다.

실은 내가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직 덜 자란 것일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과 이 책, <칠월과 안생>을 읽는 지금의 감정이 비슷한 걸 보면 내가 한결같은 건가 싶은 생각도 해 본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감정을 발산하는 것. 참고 억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49쪽
"가명, 잘 생각해. 나인지, 안생인지. 시안에 남을지, 돌아올지. 넌 하나만 선택해야 해."
칠월은 손목에 차고 있던 연청색 옥팔찌를 풀어 가명에게 건넸다.

"이거 우선 네가 가지고 있어. 안생은 어릴 때부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았어. 사실 나도 안생이 이 연청색 팔찌를 더 좋아한다는 거 짐작하고 있었어."

 

 

 

 

 

 이 책은 총 열 가지의 단편으로 묶여 있다. 그리고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그 안에 사랑, 우정, 충족되지 않는 허무와 공허의 감정을 녹여 넣었다. 책의 제목이자 첫 번째 단편이기도 한 <칠월과 안생>의  주인공 '칠월'과 '안생' 외에도 다른 단편에 나오는 린, 안란, 안, 란, 징, 차오 등의 인물은 이 이야기의 맥이 흐르는 듯 흐르며 겹치는 듯 겹치지 않게 한다.

이름도, 그들의 삶도 묘하게 겹치는 느낌이 들지만 각 단편의 인물의 삶이 겹치지 않고 누구 하나의 이야기도 똑같지 않다. 아, 접근이 잘못 된 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똑같은 삶'이란 없는 거다. 그러나 이들을 관통하는 굵은 줄기에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고야 마는 쓸쓸함이 짙게 배어 있다. 왜 그들은 행복하지 못하고 자신을 내몰기만 할까.

그러나 실은 나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거다!'라고 정확히 설명은 못 해도, 제 마음을 들쑤시는 무언가를 잠재울 방법을 그들 자신이 모르는데 타인이 노력하여 잠재울 수는 없다는 걸 말이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기분들이 왜 하나 같이 이리도 씁쓸한지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 정착할 수 없는 인간이야.' '나는 행복할 수 없는 인간이야.' '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우리는 결코 영원하지는 못할 거야.' 열기에 들떠 서로를 탐하면서도 '아, 그때 말고는 그와 소통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구나.'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띠는 그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 풍파를 다 겪었기에, 일에 치이고 사람에 상처 받았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느낀다. 그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감정에 마음을 기울이고 읽고 또 읽으면 왠지 나도 모르게 침잠하는 느낌이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현실 부적응자는 누가 판단할까? 누구의 기준과 잣대일까?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현실 부적응자이지 않을까? 잘 정착하고 한 계단씩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롯이 나의 기준일 뿐 다른 이에게는 미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남들의 시선이 중요할까? 책을 죽 읽어가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 삶, 하나뿐인 내 인생. 상처도 결핍도 내가 끌어안고 가는 것. 허무한 선택도 기쁨도 평안도 방랑도 다 제 선택이라고. 다른 이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열망도 탐색도 방랑도 저를 알기 위한 과정일 수 있겠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부적응'으로 비춰진대도 그들의 눈에 비친 내 삶은 아주 작은 조각일 수 있겠다고.

똑같아지려고, 평안해지려고, 남들만큼 하려고, 쥐어 가지려고 애를 쓰던 삶에 한 번 폭우가 내리고 씻겨 내려간 것처럼 일렁이던 마음을 꼭꼭 다져주는 책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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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지음,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7월 18일, 253쪽, 정가: 13,000원

 

강렬한 저 표지를 보라.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가?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표지 디자인을 보며 내용을 추측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책 역시도 그렇게 내용을 먼저 추측했는데, 표지만 보며 든 생각은 당당하고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절개를 지닌 여인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어 강주룡이라는 분의 삶을 다룬 일대기이리라 싶었다. 연이어 강주룡이라는 분의 이름도 내 이름과 비슷하게 중의적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네 이름은 성별을 알 수 없어 좋은 것 같구나. 이 이름은 좋은 이름이다.' 첫 날 출석부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르시며 말씀하던 교수님의 말씀에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던 대학 시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85~186쪽

내가 강주룡이오.
주룡은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자기소개를 이렇게 불친절하게 해보기는 또 처음인 듯하다. 남자는 주룡의 얼굴을 얼마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름만 듣고 영락없이 남직공인 줄 알았건만.
그짝 함자는 얼마이나 잘났기로 남의 이름 듣고 웃으시기요?
주룡이 쏘아붙이자 남자는 웃음을 그치고 목을 가다듬는다.
실례했소, 나 정달헌이라는 사람이오. 조선공산당에서 노동조합 연구합니다.
:
옳소. 하여간 이름도 성품도 걸작이군요. 듣던 대로요.
남의 이름 웃음거리 삼지 마시요. 두루주에 용룡 자입네다. 내 한 몸으로 이 세상 다 안아주는 용이 되라는 이름입네다.

 

 

 

 

강주룡은 실제 인물이다. 책의 맨 마지막에 그녀가 혼자 을밀대 지붕에 올라앉아 홀로 노동 운동을 하는 기사가 실려 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 그려진 그녀는 그 기사 하나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당시 여느 여성의 삶이 그랬듯)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으로 가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물동이로 물을 여러 차례 길어 오며 부지런하게 일했던 사람. 일제 강점기에 남편을 따라 독립군 기지 중 하나에서 반 년간 지내며 그들을 위해 산모로 분하고 무기를 나르기도 했던 대담한 이. 남편을 잃은 죄로 시댁에서 머리채를 쥐여 잡히고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무고한 아내. 공장에서 고무공(工)으로 일하면서도 모단 껄(modern girl)이 된 자신을 꿈꾸기도 했던 천상 여자. 권리 신장을 위하여 두려움을 억누르고 동지들과 고무 공장 파업 운동을 하던 노동자. 그 모두가 강주룡이다.

 

 

 

65쪽
서방 따라 독립군 한다 나서지 않았으면 공은 머인 공을 세웠갔네. 기러니 나의 공이 내 서방 공이지. 안 그러네?
애초 하고 싶던 말과는 딴판이지만 이 또한 참말이다. 주룡은 공을 독차지하고 이름을 떨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전빈이 언젠가 했던 말처럼 주룡이 독립을 원하는 것은 제 임자 때문이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

 

148쪽
대체로 조선인 자본으로 운영되는 고무 공장과 달리 제사 공장은 공장장도 일본인, 관리인도 일본인인 경우가 흔했다. 옥이네 공장도 잠사 애들만 조선인이고 간부급부터는 죄다 일본인이라는 모양이다.
욕봤구나야.
일없대두. 욕 몇 마디 듣는 거야 참말 아모것도 아니오. 니혼고가 촘 되는 아새끼들을 표 나게 예뻐하구 밥도 잘 주구 하는 거이 서럽지. 순 차별 대우다.
실 뽑는 공장 주제에 머인 일본말까지 하라구 야단이네?
내 말이 그 말이오. 어차피 공순이들이라고 무시에 무시를 하면서.

 

181쪽
생각거니 저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거이 분명합네다. 우리가 사람인 것을, 그것도 저들보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우리 손으로 보여주자면 저 강덕삼이 형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단결된 뜻을 총파업으로 보여주어야 됩네다.
:
총파업 선봉에 이 강주룡이가 설 것입네다.
내 동지, 내 동무, 나 자신을 위하여 죽고자 싸울 것입네다.

 

 

 

어떻게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디까지가 그녀의 실제 모습일까. 한편으로는 또 그것이 중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 인물을 책으로 그려낼 때 그녀의 세세한 모습 하나하나를 사실 확인할 수 없었겠다 싶으면서도, 이런 인물의 일생기를 엮으며 또 그런 사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진 않다.

책에서 그려지는 다정한 아내, 다정히 내 방 와서 자거라 하는 셋방 언니의 모습에서 주룡의 여리고 부드러운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러면서도 남편인 전빈을 잃고 가족을 떠난 이후로는 제 의사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며 점점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쉽지 않은 그 여정을 지켜 보며 나도 몰래 손에 힘을 주고 응원하게 된다. '비록 대단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주룡은 평생 처음으로 제가 고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을지 옷을 벗고 머리를 풀지를 선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부모를 따라서 이주하고, 시집을 가래서 가고, 서방이 독립군을 한대서 따라가고, 그런 식으로 살아온 주룡에게는 자기가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저 자신이 정하는 경험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다. 고무 공장 직공이 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일말 서러운 일일지언정.(153쪽)'
그래서 그녀는 곁에 잠든 주인집 딸애 '옥이'의 이마를 쓸어주며
'앞으로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201~202쪽
여러분은 자기 부인이 자기와 같은 사상을 가졌으리라구 보십네까?
:
비록 짧은 생각이지마는 내래 여러분의 배우자들은 여러분과 같은 사상을 가졌으리라구 생각하지 않습네다. 해가 저문 시방 이 시각에 여러분은 이 자리에 있구 그네들은 가정을 지키구 있는 탓입네다. 내처 한마디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그네들의 사상이 어떤지 궁금해본 적두 없을 거입네다. 내심 아녀자의 무학무식이 당연하구, 여러분이 공산자인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거이니 부인도 도매금으로 공산 부인인 거이 당연하다 여기시디요. 이 말이 옳지 않다면 시비 가려주시라요. 틀렸다 하신들 여러분이 부인에겐 이런 배움의 기회를 주지 않고 혼차서 예 와 있는 것은 변하지 않습네다. 부인들께선 아일 적부터 배운 법도대루 남편에게 순종하여 집을 지키고 있는 거이 아닙네까.

쥐 죽은 듯 고요해진다. 달헌이 손뼉을 친다. 눈치를 보던 젊은 회원들도 마지못한 기색으로 달헌을 따라서 손뼉을 부딪힌다.

 

 

왜 네가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많고많은 바람 중 하나였을까. 지금이야 여성 인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당시에는 인권이 뭔가, 여성들은 혼인하고 나면 출가외인으로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기에 바빴다. 이 모습을 잘 드러낸 것이 바로 202쪽, 노동 운동을 위한 모임에서 9할 이상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자리에 여성이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모습을 꼬집는 부분이다.

이 외에도 이러한 환경을 그려낸 대표적 인물로 주룡의 고무 공장 동기 홍삼녀, 애칭으로 부르자면 '삼이'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서 홍삼녀라는 이름 역시 여자아이의 이름을 신경써서 짓지 않는 시대상을 드러내는 소재로 등장한 것이다.)

삼이는 '온 뼈마디가 쇠를 물고 있는 어금니처럼 시리다면서도 한 팔에는 애를 끼고 한 팔로는 고무형을 잘도 주물렀다. 집에서 애를 보자면 돈 버는 사람이 없어 곤란하고, 갓난애를 두고 일하러 오자니 시모도 남편도 믿을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173쪽)'고, 파업단을 나오지 않으면 이혼을 당해 아이와 헤어질 수도 있다는 위협을 받기도 한다.

또 모단 껄이 된 주룡의 모습을 상상해 솜씨를 부린 삼이의 그림을 발견했을 때, 작업 반장이 보인 행태도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모단 껄은 학생 아니면 기생이라고, 할라면 저하고 자유연애 한번 하자'는 막말을 퍼부으며 머리채를 잡고 마구 패는 모습에서 실제로 이런 시대가 있었구나,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했겠구나 싶다. 안타깝고 같은 여자로서 분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사이에 들어가 있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 라는 노래를 들을 때는 이 영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극중 천우희가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 함께 들어도 좋으리라는 생각.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었다는 대목에서는 이 영화와도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141~142쪽
또?
또 무어.
토끼 얘기 또 해주어.
글쎄 무어가 있으려나. 기래, 옥이 늬 거 아니?
무얼 말이오?
토끼는 외로워서 죽기도 하는 짐승이란다.
거짓말.
참말.
거짓말!
참말이다.
외로워서 죽는다니 순 거짓말이다. 사람도 아니면서.
옥이의 말에 주룡은 픽 웃는다.
사람이 외로워 죽는 것은 되는 말이구?
주룡의 물음에 옥이는 곰곰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사람두 마찬가지. 죽을 만치 외롭다는 거는 기양 하는 소리지. 참으루 외로워서 죽은 이가 있거든 나와보라지.
주룡은 뭐라 대꾸하려다 입을 다문다. 옥이는 외로워본 적이 없을 만하다. 동생들이며 부모하고 함께 지내는 방이 지겨워 셋방으로 건너와 주룡하고 자는 애니, 오히려 지독하게 외로워보고 싶을 것이다.

 

33쪽
모든 것이 손가락 한 마디보다도 작게 보인다. 작고 우습다. 무엇에 그토록 성이 났었는가도 잊힐 만큼 만사만물이 멀게 느껴진다. 다시 저 아래로 내려가면 나 또한 그렇게 작아지겠지. 다시 사소한 것에 화가 나고 사소한 일에 울고 웃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그 좋은 서방 생각도 나지 않는다. 주룡은 그것이 외로움인 줄도 모르고 외로움을 곱씹는다. 오래 골몰할 수는 없는 생각이다.

 

 

 

 아무리 단단해보이는 사람도 외로움을 느낀다. 본인의 선택이었으나 헤어진 가족이 그립고, 사별한 남편이 보고 싶다.  제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가 귀하다는 것은 그 손에서 흘러 나가 빠져 버린 이후에야 알 수 있다는 점. 잘 알고 있던 사실이어도 들을 때마다 슬퍼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강주룡이라는 한 사람의 일생기를 그리면서도 사이사이에 들어가 있는 문학적 표현에 감탄했고, 박서련이라는 작가를 궁금케 했던 작품, <체공녀 강주룡>. 체공, 공중에 머물며- 지붕에 올라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했던 여인. 그녀의 마지막은 외로웠을까?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긴 여인. 정말 그녀는 마지막까지 외롭지 않았을까? 책을 읽으며, 그녀의 마음 자리를 따라 가며 계속 씁쓸한 질문을 던져 본다.

*그리고 이 책의 이름은 끝의 끝까지 내 이름 옆에 놓일 것이다, 하였던 작가 박서련 님에게 한 번 더 경의를 표하며! 당신의 다음 책도 분명히 제 서가에 꽂힐 것이다,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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