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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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초판 1쇄 발행: 2018년 9월 22일, 427쪽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을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유독> 전문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어느 일본 시인의 시에서 읽은 말을, 너는 들려주었다 해안선을 따라서 해변이 타오르는 곳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며 걸었고 두 손을 잡은 채로 그랬다

멋진 말이지? 너는 물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대답을 하게 되고

해안선에는 끝이 없어서 해변은 끝이 없게 타올랐다 우리는 얼마나 걸었는지 이미 잊은 채였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 슬픈 것이 생각나는 날이 계속되었다

타오르는 해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타오르는 해변이 슬프다는 생각으로 변해가는 풍경,

우리들의 잡은 손안에는 어둠이 들어차 있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걷고 있었다.

―<기념사진> 전문

 

 

:

300페이지 즈음이다. 저자가 4부에서 시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나열하다 '시는 어떤 특별한 무지의 상태를 포착하는 작업'이라며 이들을 함께 수록한 그 지점에서 서평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혼자 곰곰 어떤 생각을 하다, 책을 읽다, 문득, 생경하게 그려지면서도 특별히 어떤 단어로 얽어지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이 두 편의 시와 함께 신형철 선생님은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이 파트를 다 읽은 나는 단말마 같은 '아' 소리를 작게 한 번 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첫 번째 시에서는 어떤 '냄새'에 대해 이야기하는 '너'라는 사람이 있고, 그를 바라보면서 '네가 아는 것을 나는 모르는구나' 하는 '나'라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저 자신이 아는 것을(나는 그 냄새를, 너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서로 모르고 있으니, 또 '웃음을 멈추면 슬픈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웃음을 마저 즐기기로 한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걷는 연인이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함에도 부득불 손안에 들어찬 어둠을 느끼면서 걷고 있다. 이 두 편의 시에서처럼 우리는 삶이 나라는 사람으로 현신하기에 그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로 존재하는, 손안의 어둠과도 같은, 죽음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건 꼭 배우지 않아도 안다. 거미의 노래에서도 '이별은 사랑 뒤를 따라와 떠날 땐 사랑까지 데리고 간다'고 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행복의 이면엔 슬픔이 있다. 그리고 우린 그 슬픔을 인지해도 행복하기로 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 선생님만의 스타일로 비평문과 에세이를 적절하게 조화시킨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은 진중함과 솔직함, 문학성이 골고루 배어 있는 글로 대한민국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건드리고 있었다. 올곧게 제 목소리를 내는 한 명의 지식인이 쓴 자기반성의 글이자 현상(現狀)을 짚어 독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돋보기로, 반짝이는 문장들이 가득한 보고(寶庫)로 다가온 이 책을 읽는 내내 아껴 읽는 즐거움이 나를 따라다녔다.

책이라는 건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어떤 기준이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다만 삶의 고민과 맞물리는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오랜만이었다. 아마도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을 책 자체로만, 내 감정은 감정 자체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을 한다. 최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내 마음에 집중하고 나를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차례 했으나, 내 마음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자문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책에서는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라고 말하고 있지만, 요즘의 나는 자신의 슬픔에 대해서도 내가 나에게 한계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다. 동시에 '내가 이런 사람일 것이라'고 상정하면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그 모습대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하지 말자. 적어도 누군가에게 (무심하게라도) 상처주지는 말자. 나 한 사람의 몫은 제대로 해내자와 같은 마음들.

그런 신념을 잘 지키며 살아도, 나와 가까운(혹은 한때 가까웠던) 사람들이 내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가끔 그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확신을 주기도, 활력을 얻게도 했다. 실은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한계에 부딪혀가며 알아낸 모습과는 조금 다른 나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 이건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또 타인을 위해서도 꾸준하게 슬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도 이런 마음과 맞닿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폭력에 대한 정의'와 '폭력에 대한 감수성'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다. 신형철 선생님은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마음이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럼 그 반대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타자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마다치 않고 하는 사람이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섬세함으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손쉽게 재단하고 판단하는지 가끔 잊고 살 때가 있다. 내 기준으로 상대의 진심을 호도하는 경우도 많다. 내 아픔이나 슬픔에는 예민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는 또 이렇게 둔감할 수가 없다. 나를 지키기 위함을 명목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뒷전으로 미루어두었던 순간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며 톺아보게 된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만 했다고. 그렇게 나를 방어하기 전에 솔직하게 돌아보면 나에게만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 무심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한다. '자기반성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 '나의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 흩어지기 직전의 임계점은 어디인가.' 하고. 확신에 차 있을 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결국 그 고통스러운 지점에서 상처에 대한 아묾도 성찰도 시작된다고. 나의 지난 27년을 돌아보니 부드럽고 따뜻한 시절보다 혼자 고민하고 아팠던 시간 동안 성장도 했구나 싶어 외로움에 떨던 그 시간과 감정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고통까지도 부드럽게 만들어 준 시간의 힘에 기대어 나 자신을 반추한다.

 

 

 


 

 

 

맨 처음 언급했던 슬픔과 기쁨은 역설적이게도 항상 함께 한다. 책에서는 '깨어 있음'과 '잠'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짚어내고 있다.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은 깨어남이라는 사태를 체험할 수 없'으므로 '자는 사람만이 깨어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해내기 위해 수없이 시행 착오를 겪는 것처럼, 깨어있는 시간을 예비하기 위해 잠드는 건 필수 불가결이다. 슬픔이 따를 것을 알고 있지만 행복하는 데 망설이지 않기로 하듯, 나 역시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나의 슬픔과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는 일을 미루지는 않기로 했다.

더불어 고백한다. 괴롭고 힘들 때 타인의 상처와 힘들었던 시간을 전해 듣고 위로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그 상처를 되돌아 보아야 했던 상대방은 나와 함께 눈물 흘렸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 마음에 큰 위로를 받고 그(녀)와 깊은 유대감을 느꼈음을. 또 나 역시도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힘들어 할 때, 상처를 받은 그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마음에 깊이깊이 묻어두었던 묵은 감정을 꺼내어 돌아보았던 적이 있었음을. 

 

 

 

 

슬픔을 공부한다는 건 그래서 숭고한 일이고, 세상을 살아가며 아주 당연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라는 생각도 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이 어떤 결과를 빚어낼 것인가, 듣는 이의 마음에 남아 어떤 형태로 발현될 것인가 곰곰 고민하여야 한다. 나의 삶의 궤적과 맞지 않는다 하여 저 이의 궤적과 맞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도 버리고, 내가 잘 모르는 고통이라 하여 남도 잘 모를 것이라 섣부르게 결론 내리지도 말고.

친한 동생이 말한 적이 있다. '언니는 정말 심지 있는 사람이에요. 강한 사람이고. 누군가를 위해서 슬퍼하듯 언니 자신을 위해서도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고 털고 앞으로 나가요.' 그래. 같은 맥락 아닐까. 삶으로 슬픔을 공부한 만큼, 고통 공감 능력도 커지리라. 그래서 다른 이의 슬픔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또 그(녀)의 마음 자리에 가 닿고, 또 그(녀)는 다시 누군가의 마음 자리에 가 닿으리라고. 또 희망을 가져 본다. 진심이 언제나 통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또 그 진심의 힘을 전연 부정하는 이도, 느끼지 못할 이도 없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의 노력이 아주 헛되지는 않고야 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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