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우울한 일요일의 너무도 멋진 세 사람 (Gloomy Sunday)

영화를 읽어내는 법도 다양하겠지만, 이번에 나는 영화 속에서 내가 반했던 사람들에 대해 얘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이 영화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영화를 세 번째 다시 보면서 나는 더 깊이 그들에게 매혹되었다.

구도는 이를테면 삼각관계이다. 아름다운 여인 일로나가 있고, 그 여자를 깊이 사랑하는 두 남자, 레스토랑의 주인 자보와 레스토랑의 연주자 안드라스가 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참 특별하다. 그들은 일로나를 독차지하려는 자신들의 갈등을 극복해내고, 삼각형의 세 꼭지점처럼 한 점도 뺄 수 없게 서로를 받쳐주는 기막힌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낸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관계가 영화를 보는 동안 절로 이해가 되는 건 이 인물들의 특별한 매력 때문이다.

일로나는 그녀가 즐겨 드는 보랏빛 아이리스처럼, 빨려들 듯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미인, 영혼을 그대로 훔쳐갈 것 같은 검고 커다란 눈, 뇌쇄적이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아름답고 풍만한 몸, 솔직한 사랑 표현, 자연스레 흘러나와 모든 행동에 배어있는 우아함..... 자보의 말대로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에, 순수한 마음, 분명히 당신을 빠져들게 하고 미치게 하는' 여자이다. 야비한 독일인 한스까지 일로나에게 매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스 따위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일로나의 진정한 매력은 무엇일까? 안드라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가는 그녀의 모습은 관능적이면서도 청순하다. 그런가 하면 자보의 헌신적인 애무를 받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그 발 밑에 무릎 꿇고 싶게 만들 것만 같은 카리스마가 있다. 그뿐인가. 두 남자를 양팔에 안은 채 누워 있는 저 근사한 피크닉 장면에서는 두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마저 엿보인다. 죽음의 위협에 처한 애인을 구하기 위해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노래를 부르는 일로나와 마지막 복수를 끝내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약병을 씻고, 아들을 안는, 뒷모습만 보이는 노년의 일로나는 또한 그지없이 용기 있고, 당당하다. 이렇듯 관능과 모성과 청순함과 용기가 다 섞여 있는, 그러면서도 천진무구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여인이 일로나이다. 그런데도 천상이 아닌 이 지상에 꼭 존재할 것만 같은, 피와 살이 도는 매혹적인 일로나!

안드라스는 고독한 격정의 음악가이다. 그의 영혼은 천상의 음률처럼 격하고도, 순수하다. 그 쓸쓸하고도, 맑은 눈을 보는 순간, 일로나의 영혼이 흔들린 것은 당연했다. 죽어도 속물이 될 수 없는 남자,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결벽한 남자, 일로나를 보호하기보다는 일로나가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상처받기 쉬운 영혼의 남자. 이를테면 그는 심장을 떨리게 하는 남자이다.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어른스런 남자 자보가 있다. 안드라스가 일로나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남자인데 반해, 자보는 보잘것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는 평범한 남자이다. 그러나 이 남자의 멋은 결코 안드라스에 뒤지지 않는다. 유대인 사업가인 자보는 레스토랑의 감자 값을 흥정하듯이, 안드라스의 음반 저작료도 대신 나서 멋지게 흥정해준다. 그는 모든 것을 격한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일로나가 안드라스에게 반한 것을 알자 그는, 나는 신경 쓸 거 없어, 중요한 건 당신 의지니까, 하고 말하며 일로나를 보내준다.

혼자 남아 강물을 내려다보는 자보, 눈이 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한 남자의 고독보다 훨씬 더 마음을 울리는 온화하고 선량한 남자의 쓸쓸한 모습. 또한 삶을 바라보는 여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의 위트는 따뜻하면서도 날카롭다. 자살을 시도한 한스에게는, 실연이 생의 전부는 아니야. 삶에는 우리 식당의 맛있는 비프롤도 있지, 라고 말해주지만, 재미난 이야기를 하라는 독일군 장교 앞에서는 '의안이 실제 눈보다 다정한 수용소 교관'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 해낸다. 자보에게는 세상의 아름답고 순수한 남자가 결코 가질 수 없는, 자신의 자아까지 내던지며 상대를 사랑하는 헌신과 동시에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짓밟혀도 다시 툭툭 털며 일어나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멋'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멋진 남자. 주인공 세 사람 모두에게 흠뻑 도취됐지만 자보에게 나는 조금 더 이끌린다.

하지만 일로나가 아니라면, 자보나 안드라스도 세상에 흔히 널린 연적으로만 머물렀을 것이고, 안드라스가 아니라면, 아무리 자보라도 연적에게 형제애까지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벽한 안드라스야 말할 것도 없다.

이 멋진 세 사람을 보고 있으면, 두 사람끼리만 서로 순정을 바치라는 지상의 계율이 오히려 빈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신은 이렇게 멋진 사람들끼리 만나는 경우를 자주 만들어 놓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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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사고를 치는 만큼 딸들은 자란다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혼자 사는 '늙은' 어머니가 '늙은' 아저씨와 재혼을 한다고 해도 놀라 나동그라질 우리 사회에서 스무 살이나 아래, 그것도 '여자'를 애인이랍시고 딸들에게 소개하는 이 영화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영화의 겉 줄거리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 앞에 당황한 세 딸들이 그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공작을 벌이다 결국은 '엄마'를 이해하고 그 사랑을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동성애란 이를테면,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세 딸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나온 시험 문제 같은 것이다. '오, 자유로운 딸들이여, 너희 엄마가 이래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하고 묻는 질문.

실제로 이 영화를 공동으로 만든 이네스 파리스와 다니엘라 페허만이라는 두 여성 감독의 고민의 지점은 바로 '모던하고 지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한다. 부모의 영향 아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큰 자녀들이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혼란을 더 겪을 수 있다는 점에 두 감독은 주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규율과 전통의 준수 아래 억압적이고 순종적으로 자란' 대다수 사람들의 '높은 편견' 에 대해 단계를 밟아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산수 문제도 다 풀지 못한 상태에서 고등 수학 문제를 받은 듯한 혼돈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영화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이토록 심각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극히 불쾌할 수 있는 소재가 톡톡 튀는 탁구공처럼 발랄할 수 있는 건 감독과 배우들의 역량일까, 정열적인 스페인 사회의 저력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라 그 자체가 환상적으로 보이는 까닭일까?

각설하고, 나는 어쨌든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유쾌하고 행복했으며, 가슴속이 탁 트이는 통쾌함까지 맛보았다. 거기다 이 영화에는 나를 사로잡은 인물들이 우글거렸다. 우선, 저런 여자라면 나도 반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하는, 엄마의 연인 앨리스카(영화를 본 많은 여성들이 입을 모아 그녀를 매력적이라고 칭송했다.)가 있다. 그녀는 진실하면서도, 감성이 넘치며, 신비로운데, 그러면서도 여자들이 의젓한 남성에게 품는 묘한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자기 선택에 당당하며, 딸들보다 더 자유롭고, 용감한 어머니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가 딸은 도와주지 않고, 애인에게만 돈을 쏟아 부을 때, '한국의 어머니이며 딸'인 나는 내심 그녀를 얄미워했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서도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되자 단호하게 애인을 뿌리치는 그 쓰라린 자존심 앞에는 다시금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란 때론 열등감의 외투에 불과할 때도 있지만(지극히 초라한 자존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는 그녀의 그것에는 '노욕(老慾)'이 스며들 틈이 없어 아름답고, 싱싱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매력이 나와는 다른 이질감에 매혹 당하는 것이었다면, 어딘가 비슷한 동질감에서 내가 반한 인물로 아버지(소피아의 전 남편)와 둘째 딸인 엘비라가 있다. 책을 사람보다 더 좋아하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책에서 얻은 잣대로 해석하는 그 아버지는 그 탓에 정열적인 아내와도 헤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아내의 그 놀라운 연애에 대해서도 지극히 쉽게 받아들인다. '아빠는 놀라지도 않냐?'는 딸의 반박에 그는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이었던 사포의 시를 읽어준다. 사포를 통해 아내의 연애를 이해하는 그 천진무구한 모습, 시를 읽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에 딸이 얼굴을 묻는 그 장면이 나는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면서도 다 이해하는 그 순진하고도 복잡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연민과 찬탄을 동시에 나타내는 그 장면.

둘째 딸 엘비라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섞어서 만들어 놓은 인물 같다. 아버지처럼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아버지처럼 사람보다 책을 더 사랑하지는 못하는, 어쩔 수 없이 뜨거운 어머니의 피를 함께 가진 딸. 피가 뜨거운 어머니는 그래서 행복하고, 피가 차분한 아버지는 책과 함께 있어 또한 평화롭지만 두 사람의 합작품인 엘비라는 온통 뒤죽박죽인 삶을 사는 것이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은 많아서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 탓에 모든 것을 미리 재단해버리고, 실전에서는 늘 초를 치고 마는 엘비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마음과는 달리 일부러 더 삐딱하게 굴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지고 싶으면서도 그 상처를 유아적으로 두려워하고.... 그래서 결국 인생이, 사랑이 늘 꼬이고 마는, 스스로 만든 '콤플렉스의 감옥' 안에 갇힌 채 불행을 자초하는 한심한 엘비라, 자연스럽게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혼자서 부풀려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다가온 사랑을 악착같이 물리치려고 하는 우스꽝스런 엘비라..... '내가 또 삐딱선을 타면 말해줘요.'라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부탁까지 해야 하는 엘비라..... 이런 엘비라를 보며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여자들이 나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엘비라가 행복해지는 마무리에 우리는 함께 쾌재를 부르게 된다. 엄마가 여자를 좋아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엄마가 여자를 좋아하는 정도의 사고를 쳐야 우리도 비로소 그만큼 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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