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사고를 치는 만큼 딸들은 자란다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혼자 사는 '늙은' 어머니가 '늙은' 아저씨와 재혼을 한다고 해도 놀라 나동그라질 우리 사회에서 스무 살이나 아래, 그것도 '여자'를 애인이랍시고 딸들에게 소개하는 이 영화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영화의 겉 줄거리는, 그런 충격적인 사건 앞에 당황한 세 딸들이 그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공작을 벌이다 결국은 '엄마'를 이해하고 그 사랑을 도와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동성애란 이를테면,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세 딸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나온 시험 문제 같은 것이다. '오, 자유로운 딸들이여, 너희 엄마가 이래도 너희는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하고 묻는 질문.
실제로 이 영화를 공동으로 만든 이네스 파리스와 다니엘라 페허만이라는 두 여성 감독의 고민의 지점은 바로 '모던하고 지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녀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한다. 부모의 영향 아래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큰 자녀들이 실제 현실에서는 오히려 혼란을 더 겪을 수 있다는 점에 두 감독은 주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규율과 전통의 준수 아래 억압적이고 순종적으로 자란' 대다수 사람들의 '높은 편견' 에 대해 단계를 밟아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산수 문제도 다 풀지 못한 상태에서 고등 수학 문제를 받은 듯한 혼돈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영화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이토록 심각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극히 불쾌할 수 있는 소재가 톡톡 튀는 탁구공처럼 발랄할 수 있는 건 감독과 배우들의 역량일까, 정열적인 스페인 사회의 저력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현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얘기라 그 자체가 환상적으로 보이는 까닭일까?
각설하고, 나는 어쨌든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유쾌하고 행복했으며, 가슴속이 탁 트이는 통쾌함까지 맛보았다. 거기다 이 영화에는 나를 사로잡은 인물들이 우글거렸다. 우선, 저런 여자라면 나도 반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하는, 엄마의 연인 앨리스카(영화를 본 많은 여성들이 입을 모아 그녀를 매력적이라고 칭송했다.)가 있다. 그녀는 진실하면서도, 감성이 넘치며, 신비로운데, 그러면서도 여자들이 의젓한 남성에게 품는 묘한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자기 선택에 당당하며, 딸들보다 더 자유롭고, 용감한 어머니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가 딸은 도와주지 않고, 애인에게만 돈을 쏟아 부을 때, '한국의 어머니이며 딸'인 나는 내심 그녀를 얄미워했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서도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되자 단호하게 애인을 뿌리치는 그 쓰라린 자존심 앞에는 다시금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존심이란 때론 열등감의 외투에 불과할 때도 있지만(지극히 초라한 자존심!), 스스로 존엄성을 지키는 그녀의 그것에는 '노욕(老慾)'이 스며들 틈이 없어 아름답고, 싱싱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매력이 나와는 다른 이질감에 매혹 당하는 것이었다면, 어딘가 비슷한 동질감에서 내가 반한 인물로 아버지(소피아의 전 남편)와 둘째 딸인 엘비라가 있다. 책을 사람보다 더 좋아하고, 세상의 모든 현상을 책에서 얻은 잣대로 해석하는 그 아버지는 그 탓에 정열적인 아내와도 헤어진다. 하지만 동시에 아내의 그 놀라운 연애에 대해서도 지극히 쉽게 받아들인다. '아빠는 놀라지도 않냐?'는 딸의 반박에 그는 그리스의 레즈비언 시인이었던 사포의 시를 읽어준다. 사포를 통해 아내의 연애를 이해하는 그 천진무구한 모습, 시를 읽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에 딸이 얼굴을 묻는 그 장면이 나는 잊혀지지 않는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면서도 다 이해하는 그 순진하고도 복잡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연민과 찬탄을 동시에 나타내는 그 장면.
둘째 딸 엘비라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섞어서 만들어 놓은 인물 같다. 아버지처럼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아버지처럼 사람보다 책을 더 사랑하지는 못하는, 어쩔 수 없이 뜨거운 어머니의 피를 함께 가진 딸. 피가 뜨거운 어머니는 그래서 행복하고, 피가 차분한 아버지는 책과 함께 있어 또한 평화롭지만 두 사람의 합작품인 엘비라는 온통 뒤죽박죽인 삶을 사는 것이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은 많아서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그 탓에 모든 것을 미리 재단해버리고, 실전에서는 늘 초를 치고 마는 엘비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마음과는 달리 일부러 더 삐딱하게 굴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지고 싶으면서도 그 상처를 유아적으로 두려워하고.... 그래서 결국 인생이, 사랑이 늘 꼬이고 마는, 스스로 만든 '콤플렉스의 감옥' 안에 갇힌 채 불행을 자초하는 한심한 엘비라, 자연스럽게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혼자서 부풀려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다가온 사랑을 악착같이 물리치려고 하는 우스꽝스런 엘비라..... '내가 또 삐딱선을 타면 말해줘요.'라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부탁까지 해야 하는 엘비라..... 이런 엘비라를 보며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는 여자들이 나만은 아니리라.
그래서 엘비라가 행복해지는 마무리에 우리는 함께 쾌재를 부르게 된다. 엄마가 여자를 좋아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아니, 엄마가 여자를 좋아하는 정도의 사고를 쳐야 우리도 비로소 그만큼 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