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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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상화 시 전집 리뷰에서 상화 시를 통틀어 '우주적 리얼리즘'이라 명명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홍승진,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의 노래」,  『이상화시전집』 알라딘 마이리뷰, 2011. 8. 2.). 거칠게 요컨대, 거기에는 사람살이를 유현한 깊이로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목소리 그 자체를 세상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바꾸려는 리얼리즘 정신의 본질 속에다 생의 현실과 운명을 자아내는 우주적 스케일의 환경을 부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 서정시의 역사를 크게 소월 시의 전통과 상화 시의 전통으로 나눠볼 수 있다면, 전자는 유약하고 내향적인 눈물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우렁차게 뻗어나가는 눈물이 특징이다. 그런데 전자의 힘에 눌려 후자의 흐름은 이상하게 은폐되어 오거나 가려지고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증발이 아니라 지하의 심층으로 흘러들어 다시 한 번 솟구쳐오를 때를 기다리는 수맥이었음을 김혜순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다. 

  이 시집의 서시 격인 「지평선」은 다소 거칠고 투박한 흠이 없지 않지만, 또 그만큼 시인의 시 세계 전반의 창작 원리와 구현 의도에 대한 훌륭한 소개라 볼 수 있다. '지평선'을 하늘과 땅이 갈라져 노을이라는 붉은 피가 스며 나오는 상흔으로 읽은 시적 상상은 곧바로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이 쪼개져 눈물이 흐르는 화자 자신의 상처와 나란히 이어진다. 노을과 눈물 서로 붉게 스미듯 결국에는 나의 아픔이 곧 우주의 그것이며 우주의 통곡 모두 내 슬픔임을 여실히 밝히는 게 그녀 시의 작업이다. 이게 대체 상화 시의 숨통이 탁 트여 터져나오는 계승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시인이 숨 쉬며 사는 그곳의 아픔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정언명령이 그 아픔 모두를 품어내는 우주의 품을 지니고야 마는 것. 

  우주적 아픔에 국경이 무슨 의미이며, 생사가 어찌 구분되랴? 「모래 여자」에서 시인은 이국의 사막에서 발견된 미라의 목소리로 노래하기를 마다 않는다. 참신한 소재를 다루는 데에서 시를 읽는 재미가 발생하지만, 그럴 경우 참신함만 추구하다가 자칫 잘못 생경함만 남기가 쉽다. 그러나 시의 흐름은 전혀 어설프지 않으며 극도로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또한 무척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그가 전장에서 죽고 /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는 이 4연은 아름답니다. 미라는 죽은 채 살아있고 산 채 죽은 사물이다. 눈을 감고 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표현은 적확한 문장이며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물이다. 온몸이 해부용 칼에 베이고 갈라지는 아픔이  '그'를 잃어 목숨만 붙은 채로 살아있는 '그녀'의 슬픔에 대한 적나라한 실체이며 등가물이다. 거기에 '그'가 '그녀' 곁을 떠난 사연이 살풋 얹힌다. 그 사연엔 오늘날에도 만연해있는 전쟁이라는 문제와 또한 국경의 사이에서 오가는 참극이 절제된 표현이지만 빼곡한 내용으로 구구절절히 박혀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모래 여자인 '그녀'와 시인 자신을 교묘하고 노련하게 포개놓으며 사막의 밤하늘을 언급하는데, 이는 마치 상화 시가 모래 여자와 같이 이토록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완벽하게 복원, 아니 부활하는 순간이다. 

  「별을 굽다」 또한 대도시의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들의 얼굴 속에서 별을 읽어내는 우주적 리얼리즘의 위대한 성취이다. 지하철 역 에스컬레이터에 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붉은 흙으로 빚어낸 가면을 닮았다고 시인은 연상한다. "뒤돌아보다 마주친 저 수많은 얼굴들 / 모두 붉은 흙 가면 같다 / 얼마나 많은 불가마들이 저 얼굴들을 구워냈을까" 그와 같은 발상은 그 자체로 타당한 것으로 동의할 수 있다. 왜냐면 도시인들의 성격은 대부분 근대 산업체제가 부단히 재촉하는 시간 싸움에 쫓기며 몰아세워지기 때문에 급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어디로 향하든지 언제나 숨이 차서 얼굴이 붉게 달궈지기 쉽상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얼굴을 흙 가면에 한정시키는 상상력은 환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흙 가면은 무표정이며, 무표정이란 고정이며, 고정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도시인의 사실적 얼굴 표정에서 읽어낸 환멸적 상상력은 그러나 2연에서 시인의 더 깊은 상상력에 의해 전복이 된다. "무표정한 저 얼굴 속 어디에 / 아침마다 두 눈을 번쩍 뜨게 하는 힘 숨어 있었을까" 정말로 현대인의 얼굴이 가면이면 저녁에 눈을 감고 아침에 눈을 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얼굴은 실제로 가면이 아니다. (위대한 리얼리즘!) 가면을 닮아버린 오늘날 우리들도 언제나 아침이면 눈을 뜨지 않는가? 이는 매우 사소한 일상이지만, 사실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생의 감각을 상실하였으나 우리를 그래도 살게 하는 생의 약동이 우리 내부에 꿈틀거리고 있다고 시인은 역설한다. 이는 사람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얼마나 연민어린 것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정한 리얼리즘!) 그리고 그렇게 가면의 틈을 비집고 번쩍 뜨이는 사람의 눈은 흙가마에서 구워져 나온 반짝반짝 별이다. 3연에서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면서 밤하늘에 뜨는 자연적 별과 땅 밑의 지하철 역에 뜨는 인간적 별 사이의 아득한 먼 거리를 헤아리는 동시에 무마시킨다. 

  김혜순을 오해해서 정말로 미안하다. 나는 그녀가 우리 리얼리즘 시단의 적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리얼리스트라고 천명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는 누가 뭐래도 한국 리얼리즘 시 전통의 도저한 흐름 한 가운데 서서 상화의 어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언제나 리얼리즘의 내용은 시대현실에 따라 바뀌어야만 옳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를 보다 정확히 드러낼 수록 보다 훌륭한 리얼리즘이 탄생한다.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감옥인데 그 창살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혜순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시를 썼다니!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다. 「산들 감옥이 산들 부네」라는 시를 보라. 출근시간을 수감기간으로, 자신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독방으로 번역한다. 은폐된 모순을 감각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내는 것, 그것을 나는 시적 상상력의 혁명적 기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진정한 시의 정치성이며, 시와 정치가 한 몸으로 만나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 존재한다. "유리창이 있다고 바람이 분다고 별빛이 샌다고 감옥을 모르네 / 퇴근 후 내가 잠자리용 감옥에 몸을 누이면 / 감옥 밖의 감옥 밖의 감옥들 모조리 달려와 / 붉디붉은 핏길로 내 몸을 결박하네" 그러나 끝끝내 김혜순의 시가 매혹적인 건, 그녀에겐 그녀만의 어법이 있기 때문이다. 감옥 밖 겹겹이 둘러싸인 감옥과 내 몸을 가득 얽은 핏줄들을 오버랩시키는 호방한 어조. 그 어조는 상화 시를 그녀 나름의 것으로 흡수하고 소화시킨 데에서 가능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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