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 시인선 140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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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김혜순을 피해 왔었다. 지나치게 난삽하며 어렵다는 생각에 일부러 외면하고 읽지 않았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제는 함부로 남의 영향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선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정도는 되었으므로 그녀의 시집들을 훑기로 했다. 사실 그녀의 시 세계에 들어가기로 마음 먹게 된 것은 거기에서 내 문학의 새 방향을 얻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그녀의 건조하고 삭막하지만 급진적 상상력이 넘쳐나는 시편들이 어쩌면 내가 찾는 내 시의 새로운 길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가장 첫째 느낌은 의외로 읽기에 재밌다는 것이다. 김혜순 시의 재미는 먼저 어떤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이라도 거기에 전혀 새롭고 참신한 의미와 감각을 부여해버리는 발상법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내 가슴속, 즉 내 심리 상태를 호텔로 표현한다든지(「참 오래된 호텔」), 도시인의 삶 자체를 차체와 나란히 놓는다든지(「서울 3느 9916」), 재개발을 위하여 오래된 터전들을 파괴하는 과정을 벤야민이 진행하는 테트리스 게임처럼 비유하는 것(「벤야민의 테트리스」) 등이 바로 그 예다. 전혀 시적이지 않거나 시가 되기엔 너무나 어려운 것들이 정말로 시가 된다. 비시적인 상황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힘은 모두 그녀의 도대체 겁이 없이 무참한 상상력 탓이리라. 

  그러나 막상 책장 한 귀퉁이를 접어서 표시해 놓은 것은 서너 편 정도 뿐이었다. 상상력이 너무도 지나친 탓인지, 또는 하려는 말 가운데서도 무엇을 참고 덜어대거나 걷어낼 줄을 모르는 탓인지. 드문드문 눈이 밝아지고 군데군데 머리가 환해지는 착상과 표현을 찾을 수 있지만, 한 편의 시 자체로 오롯한 짜임새나 흠이 없는 완벽에 이르기엔 번번히 실패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중 건진 작품들은 「벼랑에서」, 「블라인드 쳐진 방 1」, 「서울 길」, 「서울」 등이었다. 「벼랑에서」는 매끈한 서정시다. 일반적으로는 좋은 작품이지만 김혜순만의 냄새는 덜 하다. 그래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발생한다. 다만 2연의 목소리가 절박하고 절절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뿌리째 흔들어놓는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벼랑 아래 파도가 밤새껏 내게 묻는다. 땅 끝까지 달려온 풀들이 몇 개 안 남은 손톱으로 벼랑을 움켜쥐고 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내가 풀잎을 하나씩 쥐어뜯는다. 내 머리칼도 저 밑은 허방이에요 내 얼굴을 움켜쥔 채 악착같이 떠밀리지 않으려 버틴다. 머리 끝까지 차오른 눈물도 눈 속 뿌리를 꽉 잡고 눈동자 밖으로 뛰어내리지 않는다. 바람에 떠밀리던 그림자는 내 발목을 잡은 채 벼랑을 혼자 더듬어 내려가다가 더 이상은 안 돼요 멈취 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파도는 숨골 속을 두드리고 차가운 별이 눈물 심지에 가끔씩 부딪힌다. 밤늦도록 벼랑에서 파란 인광을 내뿜는 내가 모르스 부호처럼 깜빡거린다.

 
   

   벼랑 끝에 있다는 것은 생사를 결정할 만큼 묵중하고 막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지금 벼랑 끝의 상태다. 그런 시인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이 다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벼랑 아래 파도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벼랑 끝에 돋아난 풀들도 아슬아슬하고, 머리칼도 머리 끝에서 간당간당하고, 눈물도 눈가에서 달랑달랑하다. 전부 다 무언가를 악착같이 움켜 쥐었다. 여기서 파도나 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머리칼과 눈물이이 무슨 의미인지 묻는 것은 쓸모 없는 짓이다. 다만 그런 하부(파도와 풀)와 상부(머리칼과 눈물) 모두들은 그 사이에 서 있는 시인과 병렬적으로 벼랑 끝에 있는 존재들임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이 시의 목소리에 강렬한 힘을 불어넣는다. 

  "바람에 떠밀리던 그림자는 내 발목을 잡은 채 벼랑을 혼자 더듬어 내려가다가 더 이상은 안 돼요 멈춰 있다"는 구절에서는 어떤 신운같은 것마저 감도는 듯하다. 여기서 '그림자'는 '바람에 떠밀리던'이라는 수식을 받아서 시인의 속내를 드러내는 분신이 된다. 그런데 그 그림자는 마치 암벽등반가처럼 발목을 로프의 고정점으로 삼아 벼랑 밑을 내려간다. 이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두 결론 사이에서 번민하는 시인의 심리(그림자)가 벼랑 아래를 탐지하려는 정도의 아슬한 절박함을 담고 있다는 놀라운 표현이다. 그러나 곧 더 이상 못 내려간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그림자는 제 몸이 곧 암벽등반가이자 동시에 그 등반가의 로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은 끝없이 기로에 서서 갈라지지만, 한없이 갈라질 수만은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은 구절들이 2연 전체의 완성도를 훼손한다. 파도가 숨골 속을 두드리는 것은 낭떠러지의 이미지와 어떤 연관도 가지지 못한다. 눈물을 '심지'에 비유한 것도 의아하다. '인광'과 '모르스 부호'는 앞의 '심지'와 연결되는 심상인데, '심지' 자체가 생경한 비유이므로 문제는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 물론 나머지 부분 역시도 그 자체로는 빼어난 문장들이다. 그러나 시라는 게  어찌 부분만 좋다고 전체가 좋다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작품은 김혜순의 시에서도 그나마 내가 지적한 부분을 빼면 잘 짜여있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 대부분이 이런 문제에 걸려 넘어져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씨앗들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깝게 낭비되거나 안타깝게 버려진다. 

  「블라인드 쳐진 방 1」은 뛰어난 묘사를 보여준다.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1연 3행까지는 평이한 서술이다. 그런데 4행에서 탁자 위에 쏟아진 설탕가루를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로 묘사하면서 갑자기 입체의 시적 국면 전체가 평면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효과가 일어난다. 그리하여 방이 좌우 날개가 납작히 눌린 책이라는 평면적 묘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양쪽으로 나뉜 책이 방안에 앉아있는 둘 사이의 단절감을 은연중 돋보이게 만든다. 평면의 공간으로 묘사한 것은 둘 사이의 인간적 관계의 답답함이나 깊이 없음, 또는 풍부함의 결여를 도드라지게 한다. 

  이 시집에서 '서울' 연작 시편들은 시적 화자의 내면과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실체를 과감하게 겹치는 데에서 그 고유하고 독특한 어법을 획득한다. 이는 바로 시집의 뒷표지글에서 시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심장으로 만든 만다라"의 방식을 취한 것이다. '만다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에 가득 찬 진리의 길들을 그려놓은 지도이자 동시에 우리의 마음 한 가운데의 자리를 향하여 파고 들어가는 경로를 기하학적으로 표시한 도상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 연작을 통해 "전경화된 마음의 참혹한 풍경화들에 폭풍처럼 구멍의 길을 낼 언술(시집 뒷표지글)"을 성공적으로 실험하였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들은 도시를 노래한 시 가운데에서도 지극한 성취를 이룩한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늘어나요 길 속에 길이 있어요 지금 막 도착한 저 빌딩의 몸 속을 좀 들여다보세요 층계와 층계 사이로 불켠 실핏줄들이 보이잖아요? 저 길을 언제 다 지나 당신에게 당도하지요? 서울이 서울을 낳아요 마음이 제 몸을 한껏 부풀려 또 마음을 낳아요(「서울 길」)" 여기서 당신을 찾을 수 없이 미궁인 내 마음의 내부와, 하루가 다르게 길이 놓이고 건물이 들어서는 대도시의 풍경은 둘이 아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 있다. (중략) 꿈속에 있으면서 꿈속에 전령을 보내려고, 헛되이 허공중에 고운 얼굴을 새기고 있구나. 미로는 날마다 골목 끝에 유리문을 세운다. 이 몸을 깨뜨리고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내 몸 밖에서 누가 나를 아직도 부르고 있는데……(「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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