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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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와 정신적 삶

홍승진 편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윤미애 역,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현대의 삶에서 가장 심층적인 문제들은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립과 개성을 사회나 역사적 유산, 외적 문화 및 삶의 기술의 압도적인 힘들()부터 지켜내려는 요구에서 유래한다. 이는 원시 인간이 육신의 실존을 위해 치러야 했던 자연과의 투쟁에서의 마지막 단계에 속한다. 18세기 사람들이 국가와 종교, 도덕과 경제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속들로부터의 해방을 외친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선한 본성이 방해 받지 않고 발전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19세기 사람들은 단순한 자유 이외에 노동 분업에서 개인 및 개인 업적의 특수성, 즉 개인을 남과 비교될 수도, 또한 대체될 수도 없는 존재로 만들고, 그런 만큼 더욱더 다른 사람들과 보완 관계를 맺도록 하는 특수성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개인의 처절한 투쟁이, 사회주의는 일체의 경쟁의 제거가 개인이 완벽하게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어느 경우든 이 모든 것에는 동일한 근본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다름 아닌 사회적•기술적 메커니즘 속에서 평준화되고 소모되는 데 대한 개인의 반항이 그것이다. 현대 특유의 삶[36]의 산물들에서 그 내면적 측면에 대한 질문, 즉 문화라는 신체에 담긴 영혼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들에서 삶의 개인적 내용들과 초개인적 내용들 사이에 어떤 등식이 성립하는지, 그리고 개인의 인격이 외부의 힘들과 화해하는 적응 능력들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인데, 이는 외적•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임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 인간은 차이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때그때의 인상이 선행하는 인상과 구분되는 차이에 의해 촉발된다. 우리의 의식은 인상들이 고정된 경우, 혹은 그 차이가 경미하거나 대립적 인상들이라도 규칙적이고 익숙한 흐름에 따라 교체되는 경우보다,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드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우에 더 큰 부담을 갖는다. 이러한 심리적 조건들은 대도서의 거리를 걸을 때나 빠르고 다양한 경제적•직업적•사회적 삶을 경험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정신적 삶의 감각적 기반, 다시 말해 차이에 입각한 우리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식의 총량을 비교해보면, 대도시는 소도시나 시골의 삶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에서는 감각적•정신적 생활의 리듬이 더 느리면서 더 익숙하고 더 평탄하게 흘러간다.

여기서 특히 대도시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해서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도시적 삶에 비해 지적 성격을 띠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소도시의 정서적 관계들이 정신의 더 무의식적인 층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꾸준하고 지속적인 습관들을[37] 통해서 가장 잘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의 오성은 우리의 정신에서도 투명한 층, 즉 가장 상층에 자리 잡고 있다. 오성은 우리의 내적 힘들 중에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나다. 오성은 대립적으로 변화하는 인상들에 적응하는 데에 어떠한 충격도, 내적 동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보수적 성향을 지닌 사람만이 이러한 인상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충격과 내적 동요를 겪는다. 물론 수천 가지의 개별적 경우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대도시인은 외부 환경의 흐름이나 그 모순들에 의해서 삶이 뿌리째 위협받는 상황에 대해 방어 메커니즘을 만들어낸다. 대도시인은 그러한 외부 환경에 대해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적인 반응을 보인다. 동일한 원인의 결과로 의식이 고양되면 지성이 정신적 우선권을 지니게 된다. 이로써 외부 현상들에 대한 반응은 가장 덜 민감하면서도 인격의 심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신적 기관에 이양된다. 개인의 주체적 삶을 대도시의 억압적 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러한 이성적 태도는 대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고 다양한 개별 현상들과 얽혀 나타난다.

예로부터 대도시는 화폐 경제의 본거지였다. 왜냐하면 다양한 경제적 교역으로 북적대는 곳에서는 교환 수단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골처럼 교역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 교환 수단은 대도시에서만큼 중요하지 않다. 화폐 경제와 이성의 지배는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기서는 흔히 형식상의 정의와 몰인정한 엄격성이 짝을 이룬다. 순수하게 이성적인 사람은 개별적은 모든 것에 대해 냉담하다. 그 이유는 개별적인 것 안에서는 논리적 이성으로 다 포착될 수 없는 관계와 반응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화[38]폐 원칙에 현상의 개별성이 자리 잡지 못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화폐는 모든 현상들에 공통적인 것, 즉 모든 성질과 특성을 단지 수량적인 문제로 평준화시키는 교환 가치만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관계는 모두 그들의 개체성에 기초하는 반면, 이성적 관계는 사람들을 마치 숫자를 대하는 것처럼, 즉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업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자체로는 무관한 요소들처럼 다룬다. 대도시인이 배달원이나 고객, 심부름꾼, 혹은 의무적 인간관계의 범위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각자의 개체성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풍부한 감정이 묻어나게 되는 소규모 집단과 다르다. 이 집단에서는 상호 급부에 대한 객관적 계산은 중요하지 않다.

경제심리학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은, 단순한 사회에서 생산은 상품을 주문하는 고객을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자와 고객이 서로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의 대도시는 거의 전적으로 시장을 위한 생산, 즉 생산자가 보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생산에 의해서 유지된다. 이렇게 되면 고객과 생산자 양측의 이해관계는 몰인정한 객관성을 띠게 되고 이성적 계산에 입각한 경제적 이기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개인적 관계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대도시에서 자가 생산과 직접적 상품교환의 잔재를 몰아내고 맞춤 고객을 위한 노동을 하루가 다르게 축소시키는, 대도시에 지배적인 화폐 경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런 만큼 아무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신적•지적 기조가 먼저 형성되고 여기서 화폐 경제가 파생된 것인가, 아니면 거꾸로 화폐 경제가 정신적, 지성주의적 기조를 형성하기 위한 결정적 요소였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39]이다. 확실한 것은 대도시적 삶의 형식이 이러한 상호 작용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점을 영국의 유명한 헌법사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입증하고 싶을 따름이다. 영국의 역사 전체를 통해 런던은 결코 영국의 심장이 아니라, 종종 영국의 이성으로, 또는 언제나 영국의 돈주머니로 행세했다는 것이다.

삶의 표면에 나타나는 일견 미미한 움직임에는 동일한 정신적 흐름들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위의 사실 못지않게 특징적이다. 현대적 정신은 점점 더 계산적인 정신이 되어왔다. 실제 삶의 계산적 정확성은 화폐 경제가 이룩한 것으로, 이는 세계를 계산 문제로 환원하고 세계의 모든 부분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하려는 자연과학의 이상에 부합한다. 화폐 경제는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저울질하고, 계산하고, 숫자로 규정하고, 질적 가치를 양적 가치로 환원하는 일로 소진하게끔 만들어버렸다. 화폐가 지닌 계산적 본질을 통해 삶의 요소들 간의 관계에서 동일한 것과 동일하지 않은 것을 규정하는 정확성과 확실성, 약속과 협정의 명확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외적으로는 회중시계가 널리 보급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이 나타나게 된 원인이자 그 결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대도시의 조건들이다. 전형적인 대도시인의 인간관계와 업무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보통이다.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관심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한 결과 그들의 관계나 활동들은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약속이나 업무 추진에 있어서 정확을 가하지 않으면 사회 전체는 수습하기 어려운 혼동 상태로 붕괴될 것이다. 만약 베를린에 있는 모든 시계 바늘이 단 한 시간 동안이라도 느닷없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간다면, 베를린 전체의 경제적 관계와 그 밖의 모든 관계는 오랜 기간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40] 게다가, 외적인 요소로 보일지는 모르나, 대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다리거나 헛걸음질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 낭비를 의미하게 된다. 이렇게 대도시에서 사는 기술은 모든 활동과 상호 관계가 확고하고 초주관적인 시간의 도식을 아주 정확히 따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도 지금까지 행한 모든 고찰의 총괄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난다. 존재의 표면에 있는 하나의 점은 일견 그 표면에 속하거나 표면에서 생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점으로부터 정신의 심연으로 추를 드리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또한 외적으로 아주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모두 궁극적으로는 일정한 지침에 따라 삶의 의미와 양식에 대한 최종적 결정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 삶이 팽창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정확성, 계산 가능성, 치밀성은 대도시의 화폐 경제적, 지성주의적 성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내용들에도 반드시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다. 또한 그것은 외부로부터 보편적이고 도식적인 정확성을 지닌 삶의 형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삶의 형식을 규정짓고자 하는 비합리적, 본능적 그리고 지배적 기질과 충동들을 배제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기질과 충동들을 특징으로 하는 자기 주권적인 존재들 역시 도시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경우 그러한 존재는 도시의 전형적 존재와 대립하게 된다. 러스킨이나 니체 같은 인물들이 대도시에 대해 느낀 깊은 증오는 여기서 설명된다. 이들은 도식화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 따라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삶에서만 삶의 가치를 발견한다. 따라서 이들은 대도시를 증오하는 것과 똑 같은 이유에서 화폐 경제와 지성주의적 존재를 증오한다.

[41]삶의 형식의 정확성과 치밀성으로 가장 비인격적인 구조를 만든 바로 그 요소들이 다른 한편에서 가장 인격적인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마 둔감함처럼 절대적으로 대도시에 해당되는 정신적 현상은 없을 것이다. 우선 둔감함은 대도시의 지성주의를 고양시킨다고 생각되는 신경 자극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대립적 형태로 밀려들기 때문에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무기력한 둔한 사람들은 둔감해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마치 무절제한 향락 생활이 신경을 더 이상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극도로 자극하면서 결국 우리를 둔감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은 인상들도 그 변화가 급격하고 대립적인 경우 신경에 무리할 정도의 반응을 요구하게 된다. 즉 신경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축적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혹사당한다. 이렇게 되면 새로운 자극에 대해 거기에 합당한 에너지를 가지고 반응하는 능력이 없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무능력이 한적하고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보다 대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바로 그 둔감함이다.

대도시의 둔감함의 이와 같은 생리학적 원천에는 화폐 경제에서 유래하는 다른 원천이 합세한다. 둔감함의 본질은 사물의 차이에 대한 마비 증세이다. 그렇다고 우둔한 사람에게처럼 그것이 전혀 지각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사물의 차이들이 지닌 의미나 가치, 나아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둔감해진 사람에게 그러한 차이들은 모두 똑같이 침침하고 음울한 색조로 나타나며 다른 것보다 선호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영혼의 이러한 심정은 철저하게 대도시 안에 침투된 화폐 경제에 대한 충실한 주관적 반영이다.

[42]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것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 만한 평준화 지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 사물들은 부단히 흐르는 돈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비중에 따라 부유하면서 동일한 수준에 놓이게 되고, 다만 이 수준 위에서 얼마나 큰 범위를 차지하는가에 따라서만 구분된다. 개별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사물이 돈과의 등가 관계 속에서 채색되거나 퇴색되는 정도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대상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아니 아마도 이미 대중들이 어디에서나 이러한 대상들에 공적으로 부여하는 전반적인 성격을 통해서, 돈에 의한 사물의 평가는 이제 확연히 인식할 수 있는 현상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화폐 순환의 본거지이면서 사물의 구매 가능성에 있어 소도시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대도시는 또한 둔감함의 고유한 터전이 된다. 어떻게 보면 사람과 사물이 몰려 있기 때문에 개인들이 고도의 신경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의 결과가 둔감함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조건이 양적으로 팽창하면 그러한 상황의 결과는 그 반대, 즉 둔감함이라는 고유한 적응 현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응 현상을 통해 신경은 대도시 삶의 내용 및 형식에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을 그에 대한 반응을 중단하는 데서 찾는다. 이는 일정한 성격의 자기 보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객관적 세계 전체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대가가 따른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지게 되는 인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인간 주체는 전적으로 자신을 삶의 이러한 존재 형태와 타협시[43]키는 반면에, 그에게는 대도시에 대항하는 자기 보존 과정에서 이에 못지않게 부정적인 성격의 사회적 태도가 요구된다. 서로에 대한 대도시인들의 정신적 태도는 형식적 측면에서 속내 감추기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무수한 사람들과의 쉴 새 없는 만남에 대해서 매번 내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면—만나는 사람 거의 대부분을 알고 그와 긍정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소도시라면 몰라도—사람들은 내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상상하기 어려운 정신적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혹은 이러한 심리학적 사정 때문에, 혹은 대도시 삶에서 스쳐 지나가는 요소들에 대해 당연히 갖게 되는 불신 때문에, 우리는 그처럼 속내 감추기의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이웃들의 얼굴조차 알지 못하고 지낼 수 있으며, 또한 소도시 주민들이 보기에 차갑고 감정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잘못 알고 있지 않는 한, 외적으로 속내를 감추는 이러한 태도 속에는 단지 냉담함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더 자주 은밀한 반감, 상호 적대감과 반발심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심적 상태는 어떤 계기에서든 가깝게 접촉하는 순간 당장 증오와 투쟁으로 번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관계의 범위가 확장된 삶은 내적으로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동정심, 냉담, 반발심이라는 다양한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냉담함이 작용하는 영역은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 우리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거의 모든 인상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특별한 감정으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의식되지 않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며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곧 무관심에 빠진다. 사실 이러한 무관심은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암시가 견디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다.

[44]대도시의 전형적인 이러한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반감이다. 반감은 잠재적 또는 실제적 적대심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반감은 거리를 두면서 회피하는 태도를 가져온다. 이러한 태도가 없이는 대도시적 삶은 영위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반감의 정도, 방향, 그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주기, 반감을 표명하는 형식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대도시 삶의 분리 불가분한 전체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한정된 의미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모티브들이 동시에 작용한다. 대도시적 삶을 형성함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는 불협화음으로 보이는 것이 실상은 그 안에 깔린 기초적 사회화의 형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현저한 반감을 숨기면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태도는 다시금 대도시의 훨씬 보편적인 정신적 삶의 형식 혹은 외관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러한 태도는 개인들에게 일정한 방식의 자유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데, 다른 상황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은 없다. 이러한 자유는 사회적 삶 전반의 커다란 발전 경향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도 거의 모두에게 통용되는 공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발전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 삶이나 현재 형성되는 삶에서 발견되는 가장 초기 단계의 사회적 조직은 상대적으로 작은 집단이다. 이 집단은 이웃 집단이나 낯선 집단, 혹은 어떤 식으로든 적대적인 집단에 대해서 강한 폐쇄성을 지니는 반면에, 내부적으로는 그럴수록 더 긴밀한 결속력을 지닌다. 이러한 결속력은 개개 구성원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들을 펼치거나 자유롭게 스스로 책임을 지는 일을 할 여지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허용한다. 이런 식으로 정치 집단, 가족 집단, 정당 조직 그리고 종교 공동체가 생겨난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단체는 자기 보존의 필요에서[45] 강력한 경계 설정과 구심적 통일성을 요구하며 따라서 개인에게는 내적•외적 발전을 위한 어떠한 자유나 특수성도 허용할 수 없다. 이러한 단계에서 사회적 진화는 동시에 두 가지 상이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 일치하는 측면을 따라서 일어난다. 집단이 수적으로 공간적으로 그 의미나 삶의 내용들이 커지는 정도에 따라 집단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은 느슨해지고, 다른 집단에 대해 엄격히 설정되었던 원래의 경계는 상호 관계와 결합에 의해서 완화된다. 이와 동시에 개인은 처음에 그어진 한계를 훨씬 넘어 행동의 자유를 얻으며 보다 규모가 커진 집단 안에서의 노동 분업의 기회와 필요성에 따라 주어진 개성과 특수성을 획득한다. 물론 개별 집단들의 특수한 조건 및 세력들에 따라서 일반적인 도식이 수정되기는 하지만, 국가, 기독교, 길드, 정당 그리고 여타 무수한 집단들이 이 같은 공식에 따라 발전해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러한 일반적 도식은 대도시적 삶 안에서 개체성이 발전하는 모습에서도 인식될 수 있다. 고대나 중세 소도시의 삶은 개인에게 외부를 향한 이동과 관계를 제한하고, 내부에서의 자립심과 분화에 제한을 가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제한 속에서는 숨도 쉴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도시인은 소도시에 가면 적어도 비슷한 종류의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환경에 속하는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에서 경계가 해체될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집단은 더욱더 치밀하게 개인의 업적들, 생활양식 및 사고들을 감시하게 되고, 어떠한 양적, 질적 변종도 전체의 틀을 깨뜨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고대의 폴리스는 이러한 방향에 따라 전적으로 소도시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멀거나 가까운 적들에게 끊임없이 존재를 위[46]협받는 상황 때문에 정치적•군사적 유대는 긴밀해질 수밖에 없으며, 시민의 시민에 의한 감시가 이루어지고 독자적 삶을 살려는 개인은 모든 사람의 시기를 받게 된다. 개인의 독자적 삶은 기껏해야 자기 가족에 대해 폭군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억압된다. 아테네의 삶이 보여주는 대단한 역동성과 자극, 독특한 다채로움은 탁월한 개성을 지닌 몇몇 인물들이 개성을 말살시키는 소도시가 부단히 행사하는 외적•내적 압력에 대항해 싸워나갔던 사실로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긴장된 분위기가 생성되는데 이러한 분위기에서 약한 자들은 억압되고, 강한 자들은 자신을 열정적으로 지켜나가도록 고무되었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아테네에서는 다른 식으로 표현하기 힘든, 우리 식의 정신적 발전에 비추어 보편적인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싹텄다. 여기서 주장하려는 것은 삶의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내용과 형식들은 가장 개별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연관성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타당성을 지닌다.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개별적인 것은 모두 공통적인 단계를 거친다. 다시 말해 이 양자는 모두 결집력이 강한 조직과 집단을 공동의 적으로 갖는다. 이러한 조직과 집단은 자기 보존을 위해서 외부에 있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것뿐 아니라 내부에 있는 자유롭고 개별적인 것을 모두 자신의 적으로 보면서 그에 맞서 자신을 방어한다.

봉건 시대에 자유인은 국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 즉 가장 광범위한 사회 집단의 법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던 반면, 국법에서 배제된 채 봉건적 결사체로부터만 권리를 부여 받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좀더 정신적이고 세련된 의미에서 대도시인은 소소한 일들과 편견들에 얽매이는 소도시인들에 비해[47] ‘자유롭다’. 큰 집단의 정신적 행활 조건들인 상호 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는 개인의 독립이 성공할 경우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이는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협소함에서 비로소 정신적 거리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가장 외롭고 쓸쓸하게 느끼는 곳은 다름 아닌 대도시의 혼잡 속이라고 하는데, 이는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반드시 그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는 결코 없다는 사실은 대도시에서 가장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집단의 크기와 인격의 내적•외적 자유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 비추어 대도시는 자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행정 구역의 크기나 인구 수 때문만은 아니다. 그 밖에도 대도시는 그 가시적 범위를 넘어서 세계주의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이는 소유 재산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점점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저절로 늘어나는 것과 유사하게 도시의 시야, 경제적•인격적•정신적 관계들, 즉 도시의 관념적 행정권은 일정한 선을 넘어서자마자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이다. 도시의 범위가 역동적으로 확장되면, 이는 다음 단계에 그와 동일한 크기만큼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크기로 확장되는 발판이 된다. 마치 실이 짜일 때 실 마디마다 새로운 실들이 저절로 불어나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도시 내부의 교통이 촉진되기만 해도 지대가 증가해서 저절로 토지 소유자의 이윤이 늘어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삶의 양이 매우 직접적으로 질과 특성으로 전환된다. 소도시적 삶의 영역은 주로 소도시 안에 포함되어 있거나 소도시와 더불어 이미 결정된다. 대도시에서는 도시 내부의 삶의 물결[48]들이 도시를 넘어 보다 넓은 국가적•국제적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바이마르는 결코 그에 대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이마르가 앞에서 말한 대도시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몇몇 개인들에 의존한 것으로 이들이 죽으면서 소멸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도시는 심지어 가장 저명한 인사들에게서도 근본적으로 독립해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개인이 대도시 안에서 누리는 독립의 대응물인 동시에 그 대가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이처럼 그 기능의 크기가 물리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다시 내부에 영향을 주면서 대도시의 삶에 무게와 중요성과 책임감을 가져다 준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그의 신체적 경계나 직접적 활동 영역의 경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들의 총합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도시는 그 직접성을 넘어서는 작용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그 존재가 표출되는 도시의 실제적 범위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대도시의 크기에 대한 논리적•역사적 보충물인 개인의 자유는 비단 이동의 자유라든가 편견이나 고루함의 제거라는 소극적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또한 자유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어디서든 각자 소유하고 있는 특별하고 비교될 수 없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표출된다는 점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있음이—여기에 자유가 있다—확연하게 드러나는 때는 그 표출된 본성이 다른 사람의 본성과 구분될 때이다. 우리 각자가 다른 어느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도시는 무엇보다 경제적 분업이 최고로 발달한 장소이다. 도시[49]는 내부에 여러 가지 극단적인 현상들을 낳는데, 파리에 생긴 새로운 직업, ‘14번째 사람이라는 돈벌이 좋은 직업도 그 한가지이다. 이 직업은 사교 모임에 참석한 인원이 13()인 경우, 모자란 14번째 자리를 신속하게 채워주기 위해 모임에 적절한 복장을 하고 참석해주는 일인데, 사람들은 집에 간판을 달고 이 일에 종사했다. 도시는 규모가 커짐에 따라 더욱더 분업에 결정적인 조건들을 제공한다. 고도의 다양한 성과들을 수용할 만한 크기의 집단이 이 경우이다. 개인들이 몰려 있어 수요자를 둘러싼 경쟁을 벌이는 경우 각 개인은 다른 사람에 의해 쉽게 퇴출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도시의 삶은 생계를 위한 투쟁을 자연과의 투쟁으로부터 사람을 둘러싼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여기서 얻은 이득은 자연이 베푼 것이 아니라 사람이 베푼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미 암시한 것과 같은 전문화의 원천뿐 아니라 보다 더 심층적인 원천이 작용한다. 다시 말해 공급자는 수요자 안에 언제나 새로운, 보다 독특한 욕구들을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수입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 또한 쉽게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찾기 위해 자신의 성과를 전문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이 생기고 이는 나아가 일반 대중의 욕구를 분화•세련화시키고 풍부하게 만든다. 이로써 당연히 대중 내부에는 개별적 차이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좁은 의미에 있어서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특성들의 개별화로 이어진다. 도시는 크기에 비례해서 그러한 개별화를 촉구한다. 여기에는 명백히 일련의 원인들이 존재한다. 우선 대도시 삶의 차원에서는 고유한 인격을 펼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의미와 에너지의 양적 고양이 어느 한도에 이르면 사람들은 질적 특수화를 시도하는데,[50] 이는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주위의 사회 집단이 자신을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괴팍한 행동의 유혹을 받기에 이르는데, 이는 유별남, 변덕, 멋 부리기 등 대도시 특유의 과장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의미는 결코 그러한 행동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즉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다르고 남보다 돋보이며 이로써 주목 받는 존재라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많은 사람에게 이러한 존재 형식은 다른 사람의 의식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종의 자긍심과 자신도 한몫을 차지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획득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계기는 비록 사소하게 생각되지만 대도시적 존재 형식에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소도시의 관계와 비교해볼 때 대도시에서 개인들의 만남은 짧고 드물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주 그리고 오랜 시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격에 대해 분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소도시에서보다] 대도시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상대에게 다가가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려는 유혹이 훨씬 크다.

대도시가 어떻게 해서 가장 개인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되는지에 대한 가장 심층적인 이유는—그것이 항상 옳은 것인지 또한 항상 성공할 것인지를 떠나—내가 보기에 다음과 같다. 현대 문화의 발전은 객관 정신이 주관 정신보다 더 우세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다시 말해 언어나 법률, 생산 기술이나 예술, 과학이나 가정용품들에 구현된 정신의 총합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비해 인간 주체들의 정신적 발전은 매우 불완전하며 점점 더 뒤쳐진다. 이를테면 수백 년 전부터 사물과 인식, 제도 및 편의 시설들에 구현된 엄청난 문화를 조망해보고, 이러한 문화를 동시대 개인들의—[51]적어도 상류 계층 사람들의—문화적 발전과 비교해보면 성장 속도에서 양자의 놀라운 차이점이 드러난다. 많은 점에서 개인들의 문화는 지성, 유연성, 이상주의에 있어서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으로 분업이 늘어난 결과이다. 왜냐하면 분업은 개인에게 점점 일면적인 업적만을 요구하게 되고, 그러한 일면적 업적이 증대하게 되면 개인의 인격 전체를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어쨌든 객관적 문화가 비대해지는 경우 개인은 점점 더 이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명백히 의식할 수는 없지만, 실제적인 삶에서 그리고 거기에서 느끼는 어렴풋한 전반적인 감정에서 개인은 이제 무시해도 좋은 존재로 격하된다. 곧 개인은 사물들과 세력들의 거대한 조직에 비해서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로 격하되는데, 이들 사물과 세력은 개인에게서 모든 진보, 정신력, 가치들을 점점 빼앗아가고, 그것들을 주관적 삶의 형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객관적 삶의 형식으로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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