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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개인적 사족이지만 하루키의 저서 중 보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학생 시절부터 용돈을 쪼개가며 한권 두권 사모았던 절반의 콜렉션은 나처럼 하루키를 좋아하며 하루키의 문장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면서 완전해졌다. 노르웨이의 숲이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혹은 해변의 카프카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동은 이제 솔직히 잊어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보이면 별 고민과 망설임도 없이 우선은 사고 본다. 일종의 타성인 것 같지만 그래도 실망한 적은 딱히 없다. 아, 그래서 대가는 대가구나, 라는 생각을 나는 이번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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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소설은 취향을 많이 탄다. 나와 나의 반려는 모두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이 극명하게 갈린다. 다 사서 읽기는 하지만 괜찮았다, 나쁘진 않았다 선에서 그치는 소설도 많다. (예로 나는 아직 여자없는 남자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에 한해서는 이견이 없다. 어떤 때엔 소설보다 하루키의 에세이가 더 좋아보이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내 안에 쑤셔 넣기가 벅찰 때, 사는 게 정신이 없어서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기가 힘겨울 때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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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소설만큼 좋은 에세이를 쓴다. 소설과 에세이를 다 잘 쓰기는 퍽 어려운 일이다. 소설에 대한 기대로 에세이를 사서 펼쳐봤다가 자신의 필력과 감성 과잉에 젖어 글이 난잡해지는 경우를 나는 더러 봤었다. (대체적으로 소설가가 쓰는 에세이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 물론 나는 그런 에세이도 싫어하진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을 뿐이지.) 하루키는 꾸밈이 별로 없다. 유려한 문장을 뽐낸다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을 과장되게 치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는 늘 사소하다. 낯선 이국의 경험을 탐미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스케일이 좀 째째해보일 수도 있겠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여행지 TOP 10> 같은 타이틀이 하루키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곳에 있건 그는 조깅을 하고, 렌트카를 타고 여행지를 돌면서 보았던 풍경보다도 렌트카를 빌리던 당시의 사소한 에피소드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화려한 경험보다는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 식당 주인과의 추억, 여행지 곳곳을 어슬렁거리는 개나 고양이 (말과 양도 있었다)에 대한 이야기에 하루키는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문장은 담담하고, 때문에 꼭 옆집 아저씨가 여름 밤에 우리집 평상에 앉아 뻘쭘함을 이기고자 괜히 부채를 펄럭이며 늘어놓는 사설처럼 수다스럽다. 그래도 정신이 사납지는 않다. 하기야,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에세이니 오죽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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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거의 모두 빠짐없이 읽었다. 첫 문단과 같은 이유에서다. 여행을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하기엔 제약이 많았던 십대 시절부터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통해 여행하는 방법을 배웠다. 숙소를 잡고, 자주 걷고, 자주 말을 걸고, 자주 발견하고, 자주 사소해지고, 무리하지 않고. 그러다 우연히 좋은 식당을 발견해 맛있는 식사를 하는 일. 먹는 것과 듣는 일에 하루키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여행은 그래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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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평을 객관적으로 얘기하자면 사실 새롭지는 않다. 내가 하루키를 그만큼 오래 본 탓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정직하게 별은 세 개만 줬다) 하루키가 여태 써왔던 여행 에세이와 딱히 다르지도 않고, 몇몇 지역은 어쩐지 예전에 이런 글을 읽어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스와 보스턴 여행이 특히 그렇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왜냐면 하루키는 이미 이전에 이 지역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썼기 때문에.) 그래도 하루키의 에세이이기 때문에 부담은 없고, 언제나 그래왔듯 중박은 친다. 다 읽으면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진다. 이 에세이는 딱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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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는 절과 승려와 개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만약 라오스를 찾아간다면 나는 또 하루키가 보았던 것들과 다른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걸 알게 하는 책이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처럼 각자의 여행이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