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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힘 1 ㅣ 밀리언셀러 클럽 124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날 열심히 보던 책, 영화가 그날 꿈에 나온 적이 있지 않은가? 나는 소위 '개꿈'을 잘 꾸는 편이다. 얼마나 잘 꾸냐면, 트위터에 따로 해쉬태그를 만들어 매일 기록할 정도. 그 꿈들은 보통 내가 본 영화나 소설, 혹은 드라마의 이상한 짜깁기가 되어 버린다.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 영화 피아노가 결합되기도 하고, 모바일 화이트 아일랜드 같은 배경에 영국 드라마 닥터후가 등장하기도 한다. '꿈 없는 잠이란 내게 사치로구나.'라고 한탄을 하면서도 '사실 영화보다 내 꿈이 더 재미있어!'라고 주장한다.(그래서 내가 잠이 많나 보다.)
어젯밤도 그렇게 잠들었다. '오늘은 무슨 개꿈을 꿀까.' 그리고 그 개꿈은 '개의 힘 꿈'이 되어버렸다. 아니 뭐, 딱히 깊은 수사적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책 내용이 꿈에 나온 것이다.
30년간 멕시코에 뿌려진 피의 전쟁
『개의 힘』은 30년에 걸친 마약 전쟁을 다루고 있다. 멕시코와 미국. 마약 카르텔과 마약 수사 전담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긴 세월에 걸쳐있기에, 많은 이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얽히고 섥히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려간다. 생각보다 많은 등장 인물들과 치밀하게 엮이는 관계가 얼핏 『얼음과 불의 노래』가 떠오르기도 한다. 물론 그건 세븐 킹덤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이건 멕시코와 미국이 배경인 스릴러이지만. 양쪽 다 넓고 큰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까지 다 보여준다는 점이 닮아있다. 물론 개의 힘은 30년이 단 두 권으로 압축되었고, 몇 년 정도는 가뿐하게 뛰어 넘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쟁에 끼어든 사람들의 면면을 대충 훑어 보자면, 마약 전담 수사반의 아트 켈러. 바레라 카르텔의 아단, 라울, 티오. 뉴욕 불량배 칼란. 그리고 고급 매춘부 노라, 어떻게 된 건지 이들과 다 인연을 맺게 된 후안 신부. 여기에 각자의 부하, 암살자, 상관, 아내, 자식...
국경의 왕 아트, 하늘의 군주 아단. 한 때 친구였으나 별명이 보여주듯이 숙적이 되는 관계이다. 땅에 그어진 선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 현실과 법도에 맞게 살고, 그 선에 집착한 나머지 모든 걸 버리게 된 사람이 아트이다. 그에 비해 아단은 높게 비상하는 사람. 모든 법과 규율을 비웃으며 날아오른다. 국경을 지키는 아트를 비웃는 초법적 존재. 건드릴 수 없는 존재. 이들은 복수하고 또 복수한다. 그놈의 복수.
"난 단념하지 않았어."
"단념해야 할 거요. 정의란 건 없거든. 그리고 복수를 진지하게 여기지도 않잖소. 당신은 멕시코인이 아니오. 우리는 진지하게 여기는 게 많지는 않지만, 복수만큼은 진지하게 여기거든."
2권 19쪽
친절하게 등장인물 목록과 지도도 따로 제작해주어서 읽는 데 편했다. 미국이든 멕시코든 워낙 지리를 잘 모르니까 지도가 있는 게 정말 유용했다.
개의 힘, 악.
제목이고 작품 내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개의 힘'이라는 단어는 '악'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온 말이라고 한다. 책 속에서 벌어지는 30년 간의 전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한다. 내가 전혀 모르던 마약의 세계. 그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지. 소설은 프롤로그부터가 굉장히 강렬하다. 그야말로 참사. 남녀노소가 마약 전쟁 아래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피와 시체가 안 나올 수는 없는 법이지만 생각보다 더 잔인했다. 자본이란, 복수란, 마약이란, 그리고, 이데올로기란. 이런 힘을 가진 것이구나. 비교적 평화롭던 초반에 비해 뒤쪽으로 갈 수록 개가 달리는 힘은 박차를 가한다. 나는 초반에 힘을 받는 게 어려웠던 편인데, 막판에 가서는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관성의 법칙? 악은 멈출 수 없고, 개의힘도 멈출 수 없다.
아단은 숫자를 믿고, 과학을 믿고, 물리학을 믿었다. 바로 이 순간, 아단은 악의 본성을 깨달았다. 악은 추진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었다. 물리학의 법칙이다. 잠들어 있는 모은 계속 잠들어 있으려고 하고, 움직이고 있는 몸은 계속 움직이려고 했다.
뭔가가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2권 124쪽
사랑이라는 이름, 선.
그런데 소설이 아무리 악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내면에 있는 악을 그려내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악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아니, 누구나 악을지니고 있기에 모든 사람들이 '사랑'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절대적이고 멈출 수 없었던 악들은 다 그놈의 사랑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가. 자연스레 아트의 편을 들게야 되었지만, 악의 화신이어야 할 사람들의 의외로 인간적인 모습들에 아단도 다른 편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사랑-선과 악의 절대적인 긴장상태. 줄다리기. 사랑을 위해 악을 포기하고, 악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악이 사랑을 망치고, 사랑이 악을 망친다.
그 점에서 난 노라가 좋았다. 악에 기생해 살아가지만 순수했고 선했다. 연약하고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그 누구보다 강했다. 총칼의 논리에 좌지우지되는 물리적인 힘이 아닌 그녀만의 '매력'으로 강했다. 물론 그녀의 외모, 그녀가 받은 훈련이 다 일종의 '힘'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힘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았고, 악의 세계에 살면서도 선을 꿈꿨다. 힘을 폭주시키고 멈출 줄을 몰랐던 남자들에 비해 얼마나 현명한가. 그래서 어젯밤 내 꿈의 주인공이 노라였던가보다.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세월이 흐른 뒤 아트는 가끔 생각했다.
확실히 아트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개의 힘.
아트를 티오에게 소개해 준 사람은 당연히 아단이었다.
1권 55쪽
개꿈이 아닌 현실
이 책이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는 마약을 둔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서로 싸우고, 죽이고, 복수하고, 이용하려 들겠지. 그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하고 잃고 고통 당할 것이다. 그리고 결코 악의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트와 아단이 사라져도 다른 아트와 아단이 그 자리를 메우겠지. '개의 힘'이 내가 꾸는 개꿈처럼 전부 소용 없고 쓸모 없는 공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삼십년의 꿈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그 속에서 깨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