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신작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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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림자 자국』을 읽었다. 갓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고 복습한 적이 없다. 그 덕에 내용이 전부 휘발되어 새로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다시 읽은 것도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소한 내용들은 기억이 나는데 어째서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던 걸까.



드래곤 라자로부터 천 년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의 세계로부터 1000년 후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많은 것이 달라졌고 세상이 바뀌었다. 익숙한 얼굴들 또한 사라졌다. 그림자 자국이 천 년 후의 이야기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의 50년도 길지 않은 세월이었고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데 천  년…. 그 긴 세월 동안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이서스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인간들에게서 마법은 사라졌고 대신 기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익숙한 인물들은 이미 잊혀져 고대의 영웅과 전설으로 취급 받는다. 사실 그림자 자국의 시대상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드래곤 라자의 중세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지만 실상 천 년이나 지났으니 같을리가 없다. 빅토리아 시대? 아니, 1차 세계대전 쯤과 비슷할까. 아무리 상상해도 엘프가 마법을 쓰고 드래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한다. 



복잡하게 꼬인,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


필력은 이영도 작가의 소설이니까 두말할 것 없다. 단 한 권 안에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감탄할 뿐이다.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이 작품 전체에 베여있다. 화자가 친절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이 동화 같긴 한데, 이영도 작가가 들려주는 동화이다보니 동화의 수준을 넘어 독자의 골치를 썩인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이야기는 각 파트가 시작할 때 들어있는 가늠그림이 없다면 따라가기조차 벅차다. 


예언가, 왕비, 왕지네, 왕, 왕자…. 등장인물들이다. 이루릴이나 아일페사스같이 전작에 출연했던 인물들과 드래곤들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새로 등장한 핵심 인물들은 별명이나 직위로 지칭될 뿐이다. 처음에는 이 게 옛날에 일어난 전설처럼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인 줄 알았다. 물론 그런 효과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익명성들은 이야기의 반전을 극대화 시키는 데 일조한다.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p.110 그림자 자국 최고의 명대사


그림자 자국에는 작고 큰 반전들이 많이 있다. 모닝스타로 뒤통수를 맞다는 좀비 은어처럼 몇 번이고 후려갈겨진 느낌이다. '그게 그런 거였어?'를 외치며 읽다가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야기가 복잡하면 지칠법도 한데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영도 작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영화 <인셉션>을 보는 것같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것보다 복잡하면서 재미있다.




곳곳에 흩어진 전작의 흔적


그러나 사실 그 모든 이야기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천 년 전 정들었던 인물들의 흔적이다. 그림자 지우개를 만들었던 아프나이델, 발탄국의 시조가 된 운차이, 소설을 남긴 제레인트 등의 인물들 말이다. 일 년 내내 친구들을 추모한다는 이루릴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보며, 아일페사스가 만든 체스를 궁금해한다.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에 푹 빠졌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루릴이 환영을 만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전체 이야기에서 보면 너무 작은 서비스들인데도 눈을 떼지 못한다. 몇 줄 안 되는 글을 몇 번이나 재확인하며 그 사람들이 살다 갔을 인생을 생각해본다. 


'나는 당신들을 추모할 수 있어서 기뻐요. 그건 당신들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는 말이니까.'

이루릴은 눈을 떴습니다. 방금 끌어낸 또 하나의 과거가 그녀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그 환영을 향해 이루릴은 눈인사를 보냈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안녕하세요.'

-p.229


신작 내주세요ㅠㅠ


오랜만에 이영도 작가의 소설을 읽었더니 진이 빠진 느낌이다. 본좌는 본좌. 더 이상 바이서스 사람들의 이야기는 볼 수 없겠지. 그림자 자국도 닦달해서 겨우 쓰신 거라고 들었으니까. 사실 폴라리스 랩소디이든 마새 시리즈이든 드라 시리즈이든 아니면 그냥 새로운 세계관이든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개정판도 좋지만 그래도 신작이 더 좋다. 단편 말고 장편 말이다. 이건 모든 좀비들의 바람인데 감감무소식이라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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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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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는 책을 아무 정보도 없이 고르는 일이 거의 없다. 아주 작더라도 무언가는 알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작가라거나, 소재라거나, 하다못해 무슨 상을 받았다거나 베스트셀러였다거나 장르 정도는. 이 『제인에어 납치사건』은 정말 오랜만에 아무 정보도 없이 제목과 표지만 보고 선택한 책이다. 지난번 캐츠를 보러 부산에 들렀을 때 서면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갔었는데, 거기서 살 책을 고르다가 발견했다. 너무 SF와 판타지만 고르나 싶어 다른 장르를 사야지 싶어 집어들었다. 제인에어 납치사건이라니, 꼭 제인에어를 패러디한 미스터리일 거같은 제목 아닌가? 내 추측은 첫 장을 읽을 때 산산히 깨졌다. 시간여행을 하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읽으며 낙담했다, 난 결국 또 환상소설을 골라버린 모양이다. 나에게는 무슨 환상소설 감지 안테나가 있는 걸까.

 


 


이상한 세계

제인에어 납치사건은 1980년대의 영국이 배경이란다. '란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도무지 시대를 종잡는 게 어렵기때문이다. 처음에는 시간여행이 언급되기에 미래가 배경인가 싶었는데 일상 생활은 지금이랑 비슷, 아니 지금보다 옛날같고. 근데 괴상한 발명품들은 지금을 더 앞질렀으니까. 이 세계는 시간여행이 가능하고,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가 있으며, 허구와 현실의 경계도 단단하지 않다. 즉 현실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평행우주적인 세계라고 생각하면 편하겠다. 시간여행의 영향도 꽤 커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바뀌기도 한다. 문학 작품 속으로도 들어가볼 수 있다.

"마음 속에 감춰두게나, 서즈데이. 하지만 나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네. 실재와 허구 사이의 방어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한 거야. 얼어붙은 호수와 비슷한 면이 있지.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너서 건널 수 있지만, 어느날 저녁 약한 지점이 드러나고 누군가가 거기로 떨어지는 것이지. 다음날아침쯤이면 그 구멍은 얼어있을 거야. 디킨스의 『돔비와 아들』읽어봤나?"-p.312

이 세계가 우리와 다른 점 중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술에 열광적이라는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 스포츠보다 미술과 문학이 더 대중적이다. 수많은 영문학 작품의 인용은 물론이고, 길 가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나를 토론 하는 사람들도 부기지수이다. 훌리건들처럼 각 문학작품의 팬들이 싸우기도 한다. 특수경찰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특수작전망에는 문학을 전담하는 부서도 있다. 바로 그 문학을 전담하는 SO-27의 런던 셰익스피어를 담당하고 있던 서즈데이 넥스트가 바로 주인공이다.


제인 에어

아마 누구나 생각해볼 것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그 장면을 직접 보고 싶다고. 책 속의 인물들이 나온다거나 책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들은 꽤 있는 편이다.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국 드라마 <오만과 편견 다시 쓰기(Lost in Austin)> 역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하나. 그래서 로체스터가 어린 서즈데이의 눈 앞에 직접 나타났을 때 그런 내용을 기대한 게 사실이다. 물론 다아시만큼 잘생기진 않았지만 로체스터도 나쁘지는 않잖아? 그러나 그건 나의 하잘 것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로체스터의 진정한 사랑은 제인 에어니까!

제인 에어가 전반적으로 계속 언급이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제인 에어의 결말에 관한 언급이다. 계속 의문이 들었다. 소설 전반부에서 제인 에어의 결말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서즈데이 또한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온다. 그 결말이 제인이 리버스 씨와 함께 인도로 간다는 거였다. 저건 뭔가 확실히 아닌데 제인에어의 결말이 어쨌는지의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긴가민가하며 의심했다. 결국 알고보니 의도적으로 제인에어의 결말을 바꾼 것이었다. 

 



아케론 하데스

이 소설이 제인에어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스릴러에 가깝다. 배경은 SF라도. 최악의 범죄자 아케론 하데스의 뒤를 좇는 것이다. 아케론 하데스는 순수학 악의 존재로 서즈데이가 일상을 벗어나 위험한 활동을 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마이크로프트가 만든 '산문의 문'를 훔쳐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협박한다. 기나긴 서즈데이와 아케론의 추격전에서 사실 로체스터나 제인 에어가 나오는 부분은 많지 않다. 제인 에어 나오기를 기다리기보다 그냥 서즈데이의 생활과 이 세상 굴러가는 일을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게 편하다. 아케론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서즈데이가 그를 찾아내는지가 중심이야기이지 제인 에어는 절대 중심이 아니니까. 서즈데이를 따라 가다보면 제인 에어의 결말은 제자리를 찾아있고 해피 엔딩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번역체 때문인지 긴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번역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탓인지 집중하기가 편치 않다. 직역체가 많다고 해야할까. 그 탓인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매력적이여야할 주인공 서즈데이의 매력이 반감되고 평면화 되었다. 아케론의 행동도 무섭지 않고. 이상하다. 『매치드』랑 『어글리』 번역자랑 같은 사람 같은데 거기서는 느끼지 못한 걸 느꼈다. 원래 내용이 이건 좀 심각하고 다른 둘은 하이틴 소설이라서일까, 아니면 번역자가 발전을 했던 걸까? 양 쪽 다 영향이 있겠지만 후자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이건 2003년에 나온 것이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원작이 산만한 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번역, 문체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면 제인 에어나 영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거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수없이 인용되는 영문학 고전들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기는 하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굳이 제인 에어가 아니라 시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빌빌 꼬이고 변형되는 역사에 관심을 느낄 수도 있겠다. 무엇에 초점을 맞추든 흥미로운 세계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나저나 제인 에어를 읽어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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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들의 황야
하지은 지음 / 드림노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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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극은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잘 알지 못하는 분야다. 좋아한 적도 없을 뿐더러 영화 한두 편을 빼고는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장르의 전형성을 설명하며 항상 서부극을 예로 들 때 들은 것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서부극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하지은 작가가 서부를 배경으로 글을 쓴다고 했을 때,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신작이 나와서 읽었을 때,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우였다. 『오만한 자들의 황야』(이하 오자황)를 펼치자마자 바로 그 총잡이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소년과 아저씨. 선과 악.


라신은 신앙심 두터운 소년이다.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치료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부모를 모르지만 아버지처럼 따르는 바드레 수사가 있다. 신학교에서 자란만큼 어둠을 모르고 인간의 선을 믿는다. 베르네욜은 라신과는 반대로 그야말로 악이다. 강한 총잡이이면서, 공포의 대명사이며 운명을 믿지 않는다. 라신을 한 번 찾아왔던 라신의 아버지인 테사르와 베르네욜은 과거의 그 사건 이후로 숙적이 되었다. 그들은 강한 원한과 복수, 인연으로 뒤엉켜 있다. 소설은 베르네욜과 라신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조망한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시련이 닥쳐왔을 때 계속해서 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 또한 아니란다."

"그럼 베르네욜은 약한 사람이겠군요." -p.59



강력한 흡입력, 서정적인 서부극


책을 한 번 펼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이 소설이 완벽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리 팬카페 스탭이라도 그렇게는 말 못하겠다. 아쉬운 점들이 분명 있다. 라신의 능력이 얼마 발휘되지 못했고, 갑자기 무너졌을 때도 뭔가 설명이 덜 된 듯 찝찝하다.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아깝다. 더 잘 끝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 이건 하지은 작가의 소설에서 여상 느끼는 아쉬움일 따름이다. 오자황에는 그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흡입력이 존재한다. 단 한 페이지를 읽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까지 와있다. 이게 바로 하지은 작가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오자황의 중심이 되는 과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 다물지 못할 정도의 반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리는 복수와 서부극이라는 소재를 생각해보면 뻔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하지은 작가는 그런 이야기, 서부극을 자기식으로 완벽하게 소화했다. 뻔한 이야기이나 뻔하지 않고, 뒷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진다. 라신은 베르네욜을 언제 만나게 될까.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베르네욜도 회개시킬 수 있을까. 독자들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진상이 인물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언제일까. 

둘 다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방향은 같아도 시선의 끝이 머무는 곳은 서로 달랐다. 
베르네욜은 이제 희미해진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지평선의 빛을, 렘은 그 위로 떠오른 별을 보고 있었다. 
-p.145

문체는 여전히 서정적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캐릭터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손길은 가차없다. 그런데도 피와 총성보다는 베르네욜과 렘이 바라보던 하늘과 땅이 연상된다.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오자황은 신보다는 자기 손 안의 쇳덩이를 믿는 자들의 복수 이야기이다. 그것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는 점은 내가 어째서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재확인하게 만들었다.


 


소재에 편견은 금물

오자황은 요새 보기 힘든 서부극이라는 소재를 들고와서 요즘의 입맞에 알맞게 바꿔놓았다. 하지은 작가의 스타일이다. 독특한 소재에 약간의 환상소설적 장치, 그러나 진행은 일반소설처럼. 아름답지만 가차없이. 여전하다. 나처럼 서부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빨려들어 읽을 수 있다. 소재만을 보고 머뭇거리거나 편견을 가지면 안 될 것이다. 일단 펼치고, 그들의 인연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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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랜섬 릭스 지음, 이진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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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러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은 그 제목에 걸맞게 이상한 표지를 가지고 있다. 음산해보이는 사진이다. 왕관을 쓴 소녀가 굳은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공중에 둥둥 떠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서평단 신청을 할 때도 이 표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꼭 읽고 싶었다. 


 



사진들이 보여주는 이야기


작가인 랜섬 릭스는 영상학부를 졸업해 단편 영화 입상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릭스는 시각적인 이미지들을 적절히 활용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보통 소설의 보조역할로 머무는 삽화를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화자는 이야기 속에서 사진들을 보여주며 자신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주장한다. 책에는 많은 사진들이 들어있는데, 열 명의 수집가가 소장한 이미지들을 빌렸다. 이 사진들은 그 어떤 편집도 가해지지 않은 오래된 진본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사진에서 뽑아내 자아낸 이야기들인 셈이다. 사진들은 정말로 기묘하다. 하나하나가 강렬하고, 제각각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진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정말 이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게 한다.


 

 


우연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가 내게 보여준 사진들은 이 집에 살던 아이들이라고 했던 그 사진들은 실제로 이 집 아이들을 찍은  사진들이란 얘기였다. 그렇다면 여덟 살 꼬마였단 나조차 믿을 수 없었던 이 사진들이 진짜였단 말인가? -p.143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제이콥이 어릴 때, 제이콥의 할아버지인 에이브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폴란드에서 태어났던 에이브는 전쟁을 피해 웨일즈 지방에 있던 고아원으로 피신했다. 그 곳은 페러그린(송골매)가 지키는 곳으로 이상한 아이들이 살던 곳이다. 제이콥은 할아버지에게서 하늘을 떠다니거나, 무척 힘이 세거나, 벌을 몸 속에서 키우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느 순간 제이콥은 그 이야기를 할아버지의 동화로 치부하게 되었다. 에이브가 괴물의 이야기를 하고 두려움에 떨 때에도 단순한 치매로 여긴다. 그러나 에이브가 숲 속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곳에서 제이콥은 괴물을 본다. 제이콥에게 남은 것은 할아버지의 유언이었다. 그리고 제이콥은 페러그린의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찾아 웨일즈로 가게 된다. 


"그럼 할아버지도…… 그러니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냐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너와 똑같았단다, 제이콥." 그리고 돌아서서 계단으로 향했다. -p.198



제이콥이 겪는 이야기


사진들의 분위기가 어둡다 보니, 조금 무서운 이야기를 기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표지부터가 무서우니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고 안개 낀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이야기는 생각보다 어둡지도 무섭지도 않다. 그저 모험 판타지의 느낌이 강하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의문사와 유언을 찾아가는 부분에서는 미스터리같고, 여러가지 초능력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이능력 소설이다. 괴담같은데 이상하게 때로는 동화같다. 거기에 타임 루프, 시간 여행, 총과 싸움, 로맨스, 괴물, 세상의 사활을 건 실험 등 각종 소재가 등장한다. 종합 선물 세트라고 해야할까?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든, 이상한 소설이다.



앞으로 나올 이야기


소설이 1권 내에서 끝나지 않는다니! 이건 좀 슬프다. 아마존에서 검색해봐도 2권은 해외에서도 안 나온 모양이다. 얼마나 기다려야 이 이상한 이야기를 더 맛 볼 수 있는 걸까? 다음 권도 이렇게 이상한 사진들이 듬뿍듬뿍 들어있었으면 좋겠다. 영화화도 된다던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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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드 매치드 시리즈 1
앨리 콘디 지음, 송경아 옮김 / 솟을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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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드』를 처음 봤을 때, 표지가 나를 확 잡아 끌었다. 처음 인식한 것은 은은한 녹색. 소설 표지로 쉽게 볼 수 있는 색깔은 아니다. 그 뒤에 보인 것은 그 녹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 그런데 그 소녀는 구슬 안에 갇혀 있다. 
매치드는 '모든 것이 통제된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들을 무척 좋아하는 터라 기대를 잔뜩 안고 책을 펼쳤다. 확실히, 금새 빨려들어갔다. 


17살 생일, 카시아는 녹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매칭 파티에 참석한다. 매칭 파티는 자신의 미래 배우자를 알 수 있는 중요한 통과 의례이다. 카시아의 매칭 상대로 지정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커온 잘생기고 똑똑한 젠더. 그런데 카시아가 받은 마이크로 카드에는 젠더가 아닌 다른 소년의 얼굴이 뜬다. 카이 마켐. 그 또한 카시아의 친구이나,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탈자이다. 



 



유토피아같은 초록빛 사회


소설은 디스토피아가 배경인 것치고는 따뜻하고 감각적이다. 또한 다채롭다. 소설 내에서는 색이 계속 나온다.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알약. 초록색 실크 드레스. 하얀 미루나무 씨앗들. 붉은 석양. 계속 변하는 카이의 눈 색. 이런 색들이 소설을 아름답게 치장한다. 이번 권, 매치드에서 보여지는 소사이어티는 녹색이다. 카시아가 갇혀있는 저 유리구슬과도 같이 너무나 아름답다. 하늘 위로 떠오르는 비눗방울처럼, 그 표면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그 속에서는 행복이 가득하다. 열일곱살 되는 생일날 녹색 드레스를 입고 기대에 부풀어 매칭 파티에 참석했던 카시아가 그 소사이어티 속의 행복을 완벽히 보여주고 있다. 완벽한 가족, 꼭 맞는 사랑, 건강한 삶, 위엄있는 죽음과 보장된 삶. 어찌보면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이다. 소사이어티와 오피셜들이 통제하는 의도를 확실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기에 정말로 이 체제를, 비눗방울을 터트려야하는 것인지 계속 의문이 든다.


 

'편안한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라'

나는 이해 못하는 말들과 이해할 수 있는 말들 사이를 계속 읽어 나갔다. 

왜 이 시가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는지 알 것 같았다. -p. 107

 


그러나 어떤 사회 체계도 즐거움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가 시를 통해 카시아의 눈을 열었다. 완벽한 듯 보였던 이 세계는 조금씩 그 이면을 드러낸다. 시민들의 삶은 다른 지역과의 전쟁, 일탈자들의 고통들 위에 세워져 있다. 모든 것은 데이터가 되어 관리되고, 창조는 없이 파괴와 분류만이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시스템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똑같지 않았던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과거는 너무 쉽게, 빨리 지워져 그 이전의 삶들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 이 유토피아는 사실 디스토피아이니 여기서 벗어나라고 말한들, 누가 그걸 깨트리려 할까. 그러나 카시아는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초록색 알약을 먹지 않는 카시아는 이 편한한 세상을 벗어나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디스토피아보다는 로맨스


역시 사랑은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의 시발점이 되는 법이다. 고전인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랬고, 매치드와 같은 영어덜트 소설인 스콧 웨스터필드의 『어글리 시리즈』에서도 그랬다. 어찌되었거나 이 소설은 로맨스이다. 예쁜 소녀와 멋진 소년. 그리고 소녀를 돕는 서브남자주인공까지. 로맨스 소설이 갖출 요소는 다 가지고 있다. 카시아와 카이는 오피셜들의 눈을 피해 작은 비밀들을 만들고, 사랑을 키워간다. 소사이어티조차 파악하지 못한 비밀들을 통해 작은 반항들을 한다. 잊혀진 창조의 기쁨을 누리고 배운다. 카이가 바깥 지역에서 온 소년이기 때문에, 소사이어티 뒤의 어둠을 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카시아 또한 이면을 보는 법을 배워간다. 


"왜 여기는 녹색과 갈색과 파란색이 이렇게 많아?"

그가 내게 물었다.

"아마 그 색이 성장의 색이고, 우리 지방 중에 많은 땅이 농경지대라서 그렇겠지. 

그렇잖아. 파란색은 물 색깔이고, 갈색은 가을과 수확의 색이고, 녹색은 봄의 색이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붉은색은 봄의 첫 번째 색이야. 재생의 진짜 색. 시작의 색."

-p 323



매치드는 디스토피아보다는 '로맨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실 매치드 안에서의 소사이어티는 그저 사랑의 계기이면서 장애물 정도로 비친다. 매치드에서 그려지는 소사이어티의 생활은 상세하나,  『1984』의 두려움과 고통도, 『어글리』에서 느낀 파격과 거부감도 느끼기는 어려웠다. 그 사회가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되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에서 이상적인 미래로 그려지던 사회가 떠오를 정도였다.(엄청 다르기는 하다). 카시아와 카이의 연애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고민도 갈등도 있었지만 10대들의 연애에서 나올법한 당연한 모습들이었다. 위험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아니, 적어도 카시아는 위협하지 않았다. 진짜 고난은 이 뒷 권부터. 소사이어티의 진짜 모습도 이 뒷 권부터 볼 수 있을 듯 하다.



다음 권은 무슨 색일까


매치드에서는 소사이어티 안에서의 삶과 두 사람의 사랑이 커가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볼 수 있었다. 견고해보이는 소사이어티 속의 행복한 나날들. 평화와 안정, 성장을 뜻하는 녹색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은 자랐으나, 또한 소사이어티가 단풍나무들이 베었듯이 무너졌다. 카시아는 이제 피상적으로 알던 아픔과 상실 고통을 직접 대면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찾아나서야할 것이다. 이번 권에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소사이어티 밖의 아픔들이 어떤 색깔으로 다가올지 다음 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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