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자들의 황야
하지은 지음 / 드림노블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부극은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잘 알지 못하는 분야다. 좋아한 적도 없을 뿐더러 영화 한두 편을 빼고는 제대로 본 적도 없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학교에서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장르의 전형성을 설명하며 항상 서부극을 예로 들 때 들은 것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서부극은 내 취향이 아니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렇기에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하지은 작가가 서부를 배경으로 글을 쓴다고 했을 때, 걱정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신작이 나와서 읽었을 때, 내가 그걸 좋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기우였다. 『오만한 자들의 황야』(이하 오자황)를 펼치자마자 바로 그 총잡이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소년과 아저씨. 선과 악.


라신은 신앙심 두터운 소년이다. 자신을 희생해 타인을 치료할 수 있는 이상한 능력이 있다. 부모를 모르지만 아버지처럼 따르는 바드레 수사가 있다. 신학교에서 자란만큼 어둠을 모르고 인간의 선을 믿는다. 베르네욜은 라신과는 반대로 그야말로 악이다. 강한 총잡이이면서, 공포의 대명사이며 운명을 믿지 않는다. 라신을 한 번 찾아왔던 라신의 아버지인 테사르와 베르네욜은 과거의 그 사건 이후로 숙적이 되었다. 그들은 강한 원한과 복수, 인연으로 뒤엉켜 있다. 소설은 베르네욜과 라신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조망한다.


"네 말이 맞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시련이 닥쳐왔을 때 계속해서 선함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 또한 아니란다."

"그럼 베르네욜은 약한 사람이겠군요." -p.59



강력한 흡입력, 서정적인 서부극


책을 한 번 펼치면 끝까지 읽게 된다. 이 소설이 완벽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리 팬카페 스탭이라도 그렇게는 말 못하겠다. 아쉬운 점들이 분명 있다. 라신의 능력이 얼마 발휘되지 못했고, 갑자기 무너졌을 때도 뭔가 설명이 덜 된 듯 찝찝하다. 결말도 어딘지 모르게 아깝다. 더 잘 끝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실 이건 하지은 작가의 소설에서 여상 느끼는 아쉬움일 따름이다. 오자황에는 그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흡입력이 존재한다. 단 한 페이지를 읽는 순간,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까지 와있다. 이게 바로 하지은 작가의 가장 큰 강점이다.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오자황의 중심이 되는 과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 다물지 못할 정도의 반전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스토리는 복수와 서부극이라는 소재를 생각해보면 뻔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하지은 작가는 그런 이야기, 서부극을 자기식으로 완벽하게 소화했다. 뻔한 이야기이나 뻔하지 않고, 뒷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진다. 라신은 베르네욜을 언제 만나게 될까.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베르네욜도 회개시킬 수 있을까. 독자들은 이미 파악하고 있는 진상이 인물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언제일까. 

둘 다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방향은 같아도 시선의 끝이 머무는 곳은 서로 달랐다. 
베르네욜은 이제 희미해진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지평선의 빛을, 렘은 그 위로 떠오른 별을 보고 있었다. 
-p.145

문체는 여전히 서정적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캐릭터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손길은 가차없다. 그런데도 피와 총성보다는 베르네욜과 렘이 바라보던 하늘과 땅이 연상된다. 감성적이고 감동적인. 오자황은 신보다는 자기 손 안의 쇳덩이를 믿는 자들의 복수 이야기이다. 그것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는 점은 내가 어째서 이 작가를 좋아하는지 재확인하게 만들었다.


 


소재에 편견은 금물

오자황은 요새 보기 힘든 서부극이라는 소재를 들고와서 요즘의 입맞에 알맞게 바꿔놓았다. 하지은 작가의 스타일이다. 독특한 소재에 약간의 환상소설적 장치, 그러나 진행은 일반소설처럼. 아름답지만 가차없이. 여전하다. 나처럼 서부극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빨려들어 읽을 수 있다. 소재만을 보고 머뭇거리거나 편견을 가지면 안 될 것이다. 일단 펼치고, 그들의 인연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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