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드래곤 라자 10주년 기념 신작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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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림자 자국』을 읽었다. 갓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고 복습한 적이 없다. 그 덕에 내용이 전부 휘발되어 새로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다시 읽은 것도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소한 내용들은 기억이 나는데 어째서 무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던 걸까.



드래곤 라자로부터 천 년


그림자 자국은 『드래곤 라자』의 세계로부터 1000년 후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많은 것이 달라졌고 세상이 바뀌었다. 익숙한 얼굴들 또한 사라졌다. 그림자 자국이 천 년 후의 이야기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눈물을 마시는 새』와 『피를 마시는 새』 사이의 50년도 길지 않은 세월이었고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런데 천  년…. 그 긴 세월 동안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바이서스는 여전히 건재하지만 인간들에게서 마법은 사라졌고 대신 기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익숙한 인물들은 이미 잊혀져 고대의 영웅과 전설으로 취급 받는다. 사실 그림자 자국의 시대상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드래곤 라자의 중세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지만 실상 천 년이나 지났으니 같을리가 없다. 빅토리아 시대? 아니, 1차 세계대전 쯤과 비슷할까. 아무리 상상해도 엘프가 마법을 쓰고 드래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한다. 



복잡하게 꼬인, 반전에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


필력은 이영도 작가의 소설이니까 두말할 것 없다. 단 한 권 안에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감탄할 뿐이다. 특유의 시니컬한 농담이 작품 전체에 베여있다. 화자가 친절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방식이 동화 같긴 한데, 이영도 작가가 들려주는 동화이다보니 동화의 수준을 넘어 독자의 골치를 썩인다.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이야기는 각 파트가 시작할 때 들어있는 가늠그림이 없다면 따라가기조차 벅차다. 


예언가, 왕비, 왕지네, 왕, 왕자…. 등장인물들이다. 이루릴이나 아일페사스같이 전작에 출연했던 인물들과 드래곤들은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새로 등장한 핵심 인물들은 별명이나 직위로 지칭될 뿐이다. 처음에는 이 게 옛날에 일어난 전설처럼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인 줄 알았다. 물론 그런 효과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익명성들은 이야기의 반전을 극대화 시키는 데 일조한다. 


"범인은 영주의 아들입니다."

-p.110 그림자 자국 최고의 명대사


그림자 자국에는 작고 큰 반전들이 많이 있다. 모닝스타로 뒤통수를 맞다는 좀비 은어처럼 몇 번이고 후려갈겨진 느낌이다. '그게 그런 거였어?'를 외치며 읽다가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야기가 복잡하면 지칠법도 한데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이영도 작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자면... 영화 <인셉션>을 보는 것같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것보다 복잡하면서 재미있다.




곳곳에 흩어진 전작의 흔적


그러나 사실 그 모든 이야기보다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천 년 전 정들었던 인물들의 흔적이다. 그림자 지우개를 만들었던 아프나이델, 발탄국의 시조가 된 운차이, 소설을 남긴 제레인트 등의 인물들 말이다. 일 년 내내 친구들을 추모한다는 이루릴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보며, 아일페사스가 만든 체스를 궁금해한다. 드래곤 라자와 퓨처 워커에 푹 빠졌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루릴이 환영을 만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전체 이야기에서 보면 너무 작은 서비스들인데도 눈을 떼지 못한다. 몇 줄 안 되는 글을 몇 번이나 재확인하며 그 사람들이 살다 갔을 인생을 생각해본다. 


'나는 당신들을 추모할 수 있어서 기뻐요. 그건 당신들이 여전히 내 속에 있다는 말이니까.'

이루릴은 눈을 떴습니다. 방금 끌어낸 또 하나의 과거가 그녀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습니다.

허공에 떠 있는 그 환영을 향해 이루릴은 눈인사를 보냈습니다.

'오래간만이에요, 안녕하세요.'

-p.229


신작 내주세요ㅠㅠ


오랜만에 이영도 작가의 소설을 읽었더니 진이 빠진 느낌이다. 본좌는 본좌. 더 이상 바이서스 사람들의 이야기는 볼 수 없겠지. 그림자 자국도 닦달해서 겨우 쓰신 거라고 들었으니까. 사실 폴라리스 랩소디이든 마새 시리즈이든 드라 시리즈이든 아니면 그냥 새로운 세계관이든  새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개정판도 좋지만 그래도 신작이 더 좋다. 단편 말고 장편 말이다. 이건 모든 좀비들의 바람인데 감감무소식이라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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