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로버트 J. 소여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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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베스트 도전 만화에 <한글을 그리다>라는 웹툰이 있다. 한글을 가지고 이것저것 형상을 만드는 웹툰이다. 그 만화를 보고 외국인이 가지고 있던 한글 도메인을 사왔다는 사람도 있을만큼 인기가 좋다. 붓으로 쓰는 캘리그라피야 각광받은지 꽤 되었다지만, 이렇게 한글 자체를 그림으로 바꿔버리는 타이포그래피는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멸종』의 표지도 그런 타이포그래피를 이용한 그림이다. <한글을 그리다>처럼 전부 한글만으로 그린 그림은 아니고 부수적인 다리도 달려있지만 이런식으로 문자를 그리는 게 낯설면서 재미있게 다가왔다. 3년 전, 물론 이런 시도를 한 게 처음은 아니겠지만 색다른 건 사실이었다. 그것도 책 표지가 그런 일러스트니까. 





공룡 시대로 시간 여행

멸종은 표지 뿐만이 아니라 내용까지 내가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았다. 일단은 그 소재. '시간 여행!' 워낙 시간여행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라서 시간여행이 나오자마자 집중해서 읽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두 고생물학자 브랜든과 클릭스는 시간여행을 통해 6500만년 전의 지구로 가게 된다. 공룡이 멸종한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타임머신으로 공룡 시대로 간 두 고고학자... 왠지 쥬라기 공원 같을 거같지만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지구의 가벼운 중력, 새로운 별, 이상한 생물 등. 이거 단순한 시간 여행이 아닌데?


 


하드 SF?

로버트 J 소여는 스스로를 하드 SF 작가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하드 SF가 뭐냐면, 소프트 SF가 아닌 SF. 과학적 이론과 가설 등을 좀 더 파고 들어 거기에 기반을 내리고 있는 소설을 말한다. SF에서도 과학 이론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 제각기. 어떤 건 그냥 판타지라고 보일 정도로 가볍기도 하지만 어떤 건 정말 묵직하게 복잡한 과학 이론을 가져오기도 한다. 소프트 SF라면 내가 아는 한에서는 배명훈을 들 수 있겠다. 하드니 소프트니 하는 게 상당히 주관적이기는 하다.  나야 SF 전문가가 아니니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 판타스틱에 올라온 칼럼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로버트 소여는 자칭 하드 SF작가 답게 소설 내에서 탄탄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해나간다. 공룡 멸종에 관련된 수많은 이론을 들이대며 운석 충돌설에 대해 반박하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하드 SF라고 해도 대부분은 허구다. 가설이 가지는 구멍을 파고들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 로버트 J 소여는 정말 멸종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정말 말도 안 될 거같은 이야기를 들이민다. '사실 원래 이랬어'라며. 그런 과학소설다운 엉뚱함이 멸종의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

 

 

판타스틱 칼럼 - 하드 SF란 무엇인가[클릭] 

 

 


 

가끔씩 나오는 일러스트 보는 맛도 쏠쏠하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선택
타임라인과 변화, 우주와 생명의 기원. 미래와 과거. 그리고 계속되는 선택. 시간여행, 특히 타임 패러독스를 생각하지 않고 미래를 바꾸는 백 투더 퓨처 식의 시간여행에서는 선택이 무척 중요하다. 우유부단했던 브랜든이 선택으로서 인류를 구하고-선택지가 별로 없었다지만- 그럼으로써 가정의 행복을 되찾은 건 시간선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게한 결단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거기에서 아픔을 얻었지만 적어도 브랜든에게는 완벽한 결말 아니었나 싶다. 이 타임라인의 브랜든과 저 타임라인의 브랜든 사이의 차이가 처음에는 나도 혼란스럽게 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뭐 읽다보면 그냥 알게 된다. 소설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다. '행동하지 않는 건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결단이다'. 그래, 우유부단함도 선택이지. 제대로 된 선택을 하려면 행동해야겠지만, 행동하지 않음도 하나의 선택이다. 결국 브랜든은 행동함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러나 바로 지금 이곳에 와 있는 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결단을 내리는 일을 피해왔다. 그러나 결단을 내린다는 행위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이며, 생물관 단지 생물을 흉내 낼 뿐인 헤트 같은 존재들을 구별하는 관건이다.  -p.363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좋았던 멸종
멸종 정말 재미있었다. 표지부터 내용까지, 내지 디자인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모든 SF가 이런 식이라면 난 정말 다 읽을 거 같다. SF가 나랑 맞지 않는 장르는 아닌데 왜 난 잘 안 읽고 있는 거지? 많이 읽어야겠다. 일단 3대 판타지 작가들 작품부터 읽어야할까. 하드 SF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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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3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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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부해안 연대기 3권 『파워』, 개강 후 학교에 들고 가서 읽었다. 졸린 눈, 고픈 배를 참아가며 읽는데 왜 그리 책장이 안 넘어가는지. 오랜만에 간 학교가 너무 낯설어서 그런 것인지, 수면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파워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주인공도 확 바뀌고, 오렉도 안 나왔기 때문이려나. 



가비르의 기억


이번 주인공 가비르도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비르 자신은 그 능력을 '기억'이라고 부른다. 그 능력은 이렇다.


1. 많은 것들을 손쉽게 기억할 수 있다. 시, 책 내용도 그냥 기억한다.

2. 오지 않은 미래를 기억한다. 환시를 본다.


이 두 가지 능력이다. 1번의 능력은 신비스러움이 덜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머리가 좋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좋다. 기억하는 방식도 좀 다르고. 2번 능력의 경우는 상당히 고원지대의 '선물'과 비슷하다. 이렇게 능력을 지닌 사람이 남아있는 부족들이 있으니 고원지대가 그렇고, 가비르가 태어난 늪지 또한 마찬가지다. 늪지에서는 때때로 이렇게 '천리안'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나고는 한단다. 한 부족당 하나의 능력. 보이스에서 언급되었듯이 모든 이주민들이 처음에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문명이 덜 발달하고 척박한 곳일 수록 아직 그 능력-선물-힘이 강하게 남아있는 듯 하다. 근데 솔직히 가비르의 2번 능력이 도움되는 때는 별로 없었다. 보아봐야 의미를 모르면 무슨 소용이랴. 메메르의 예언같다.





자유라는 개념


그러나 가비르가 자라난 곳은 늪지대가 아니다. 도시 연합 중 에트라. 이 도시연합은 고대 그리스를 연상시킨다. 가비르는 에트라의 한 집안의 노예로서 누나와 함께 자라난다. 노예이나 지식인층인 노예, 그러나 생각은 깨지 못하고 주인에 대한 확고한 신뢰만이 있는 그런 노예가 바로 가비르다. 지식인이면서도 자유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것은 그 체제에 순종하게 하고 당위성만을 부여해주는 고전만을 익히기 때문이다. 지식은 지식이되 창조할 수 없이 그저 왼 것을 읊는 것만이 가비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이스에서 메메르가 찾고자 한 자유와 파워에서 가비르가 찾게 된 자유는 그 모습이 조금 다르다. 안술은 점령당했기에 메메르는 이미 자유라는 개념을 알고 있고 주체로서 정신이 정복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비르의 자유는 노예와 주인 간의 계급 갈등 사이에서 있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행복할 수도 있었다. 


'거짓에 대한 믿음은 거짓된 삶이다.'

p.310



오렉의 역할


그러나 가비르는 우연히 현대시인 오렉 카스프로의 시를 접하면서 의식의 저변이 넓어진다. 오렉은 파워에서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보이스에서 초반에 나타나 이야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과는 다르게 파워에서는 그의 글만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끝부분에 가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어긋났지만, 영향만큼은 보이스에 범접한다. 어디서나 오렉의 역할은 자유의 불씨이다.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눈이 새벽을 구하듯

모진 추위의 굴레 속에서 심장이 태양을 갈망하듯

눈멀고 속박당한 영혼이 너를 소리쳐 부르노라

우리의 빛이여, 불이여, 생명이여

자유여!

p.166



가비르의 자유 찾아 삼만리


그러니까 이 책은 가비르가 자유가 무엇인지 배워나가는 내용이다. 노예에서 도망자로, 이방인으로 지내며 사람들을 만나고, 속하기를 원하나 쉽지 않다. 자유를 말하지만 똑같이 사람들을 노예취급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사람도 있다. 죄책감에서, 기억에서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옭아매던 악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 가비르의 진정한 자유 아니었을까 싶다.(여담인데 난 대체 호르가 왜 가비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단순한 선악개념인가?) 


오렉을 다시 보지는 못하겠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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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2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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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부해안 연대기 2권 『보이스』이다. 1권 『기프트』를 읽고 나서 주문했는데, 책 참 빨리 왔다. 한국 택배는 워낙 빠르지.

책은 빨리 왔는데, 책 사이의 시간은 좀 길다. 몇 년 지났을까. 소설에 나온 것에 따르면 최소 17년 이상이다. 산골 출신 오렉이 전 세계에 이름난 시인이 되는 긴 시간. 시간도 지났고, 주인공도 바뀌었다. 책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소녀는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왔을까. 

(아래 내용은 기프트의 미리니름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읽는 자, 메메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위대한 산 술을 바라볼 수 있는 도시 안술. 안술은 알드에게 점령당한 식민지로, 읽고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안술에 있는 비밀서가. 그곳에 드나들 수 있는 소녀가 바로 메메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비밀서가에 출입했던 메메르는 수장의 지도 아래 글을 배우게 된다. 여기서의 문자 금지는 식민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알드의 종교인 아스가 읽고 쓰는 것을 불경시 하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종교과 역사,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안술 사람들의 알드에 대한 저항은 모든 식민국의 독립운동과 같이-그러고보니 어제 삼일절이었구나- 지식의 저항이며, 종교의 저항이고, 역사의 저항이다. 자유를 위한 목소리. 그것이 바로 '읽는 자', 메레르가 책을 통해 듣는 것이다. 



말하는 자, 오렉

그러나 자유는 듣기만 해서는 쟁취할 수 없다. 들었으면 그것을 입 밖으로 내 사람들을 이끌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 목소리가 바로 오렉이다. 파괴의 재능 대신 창조의 재능, 시의 재능을 가졌던 오렉은 그라이와 대륙을 주유하며 무척이나 유명한 시인이 되어 있었다. 문자가 금지된 안술이기에 되려 더 이야기꾼이 대접받고, 알드의 간드에게서 초청도 받는다. 보이스에서의 오렉의 역할은 메메르의 것보다 중요하기도 해서 진짜 주인공은 오렉이라고 보는 게 맞겠다. 어스시 시리즈에서 각 권마다 다른 주인공이지만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인물이 게드이듯, 서부해안 연대기에서는 오렉이 핵심이 된다. 책의 제목인 보이스-목소리는 물론 책의 목소리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시를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고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오렉에게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오렉은 그 재능으로 자유를 선포하였으니. 

"자유란 풀려난 사자요, 떠오르는 태양입니다. 여기나 저기에서 멈출 수는 없소. 해방이 해방되도록 하시오! 자유가 자유롭게 하시오!"
-p.364


읽기 편했던 보이스

그러나 이상하게도 진짜 오렉의 이야기였던 기프트보다는 메메르의 눈을 통해 보는 보이스가 더 읽기 수월했다. 여성화자이기 때문일까? 오렉은 이성적이었지만, 메메르는 소녀다운 감성을 보여준다. 좀 더 감상적이고 부드럽다. 오렉은 시인이고, 메메르는 독자라는 차이가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기프트는 오렉의 장대한 서사시로 편하게 읽기가 힘들었지만, 메메르는 독자로서 보이스의 이야기해주었다고 할까. 이 모든 이야기를 보고 상황을 읽어서 독자에게 건내는 메메르의 목소리가 더 편안했다. 이야기 흘러가는 것도 좀 더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끝에서 메메르는 오렉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읽는 자와 말하는 자가 함께 다니기 시작했으니, 다음은 보는 자가 있어야겠지? 보고 읽고 말해야 할테니까. 그라이는 이미 언어를 넘어선 소통을 할 줄 아는 자이기에 논외. 파워 빨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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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1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서부해안 연대기는 처음 봤을 때 예쁘다고 감탄했다. 하지만 그래도 르귄 여사 소설인데 너무 영어덜트스럽다 싶기도. 읽어보니까 역시 별로 어울리지는 않더라. 그래도 표지가 예뻐서 계속 바라 보게 된다. 출간되었을 당시는 표지만 보고 넘어갔지만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1권인 『기프트』를 보고 집어들었고, 방금 뒷권인 『보이스』와 『파워』도 주문해버렸다.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을 타고난 소년


기프트 표지의 주인공 소년은 오렉. 서부해안 연대기는 선물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소녀의 이야기이다. 고원지대에는 선물을 가지고 태어나는 혈통이 있다. 오렉은 카프로스만트의 영주 카녹의 아들로 '되돌림'의 혈통을 타고 있다. 되돌림이란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강한 파괴의 능력이다. 기프트에서는 오렉의 어린 시절부터의 성장기를 전반적으로 그리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오렉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부터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오렉의 어머니인 멜은 저지대 사람으로 혈통과는 무관하다. 그 탓인지 오렉의 능력은 발현이 늦다. 그러나 어느날 능력이 나타나지만 오렉은 그 능력을 제어할 수 없어 눈을 봉인함으로써 힘을 막게 된다. 

"무섭지 않아요."
"네 능력을 통제하려면 사용해야만 해." 아버지 카녹은 여전히 내 결심을 약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태도로 말했다.
"사용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능력이 너를 이용할 거다."
-p.120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서부해안 연대기가 영어덜트 꼬리표를 달고 나왔지만, 사실 소재 말고는 그닥 YA같은 느낌이 없었다. 영어덜트 소설은 청소년을 대상으로하고 있으며,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10대의 성장을 다루고 있으며 주로 판타지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서부해안 연대기는 10대 소년소녀가 주인공인 판타지. 소재만으로는 YA소설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YA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가벼움, 10대들의 격양된 감정은 볼 수가 없다. 되려 너무 르귄 스타일. 예상했던 그대로다. 단정하고, 정리되어 있으며, 계산적이고 치밀하다. 감정 표현은 절제되고 이성적이다. 그라이와 오렉의 관계도 소꿉친구의 정 이상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소재는 YA이되, 소설의 깊이와 스타일은 YA라고 치부할 수 없다. 책 뒤쪽에는 르귄 여사와의 인터뷰가 실려있는데(판타스틱 잡지에도 실렸던 것이다. 왜 처음 보는 느낌이지), 거기서 르귄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심미적 요소라고 말한다. 예술작품이 되는 이야기. 서부해안 연대기도 거기에서는 예외가 아니고, 그렇기에 읽다보면 작가가 정말 공들여서 다듬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중성과 예술성이 균형을 이루다가도 예술성 쪽에 좀 더 무게가 기울고, 그래서 그리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편은 아니다. 



서부해안 연대기의 시작

『기프트』는 서부해안 연대기의 1권. 그래서인지 확실히 프롤로그 느낌이다. 소설은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려고 하려는 그 시점에서 끝난다. 보통 판타지가 익숙한 장소를 떠나 여정에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반면, 기프트는 고향을 떠나는 것이 결말이니 이거 정말 전기문에서 몇 페이지로 간추려지는 앞부분만 읽은 기분. 물론 2, 3권이 이어지는 것은 알고, 거기에 오렉이 나올 것도 안다. 오렉과 그라이의 뒷 자취를 다음 권을 통해 확인해야겠다. 비록 그들이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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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블랙 로맨스 클럽
아이작 마리온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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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로맨스. 좀처럼 어울릴 것같지 않은 조합이다. 좀비를 물리치면서 생존자들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이라면 모를까. 남자주인공이 좀비라고 한다. 맙소사. 그게 가능한 건가? 죽고 죽이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라니. 도무지 말일 안 될 것같다. 아무리 사랑은 종족만이 아니라 죽음도 넘는다지만 이건 좀 징그럽다. 그래도 신기한 설정이다. 『웜 바디스』의 첫인상이었다. 


 

 


철학자 좀비 R

여느 좀비물과같이 세상에는 좀비가 늘어가고 있다. 이것이 질병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른다. 그런 좀비들의 세상에 R이라는 좀비가 살고 있다. 소설은 R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는 R은 '나는 죽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다.(p.15)'라는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R은 단순히 사람을 죽여서 먹는 다른 좀비들과 다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한다. R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이름을 잊은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는 R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좀비의 전형에서 꽤나 벗어나있다. 


페리의 기억

좀비들은 사람의 뇌를 맛보면 그 사람의 기억을 맛볼 수 있다. R은 사냥 중에 페리라는 소년의 기억을 보게 된다. R은 페리의 기억에서 본 줄리를 좀비들의 습격에서 구해 숨겨준다. 페리의 기억과 R의 의식. 둘은 무의식 중에 섞이고 다시 나누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R은 페리의 기억을 지속적으로 겪는다. 심지어는 뇌를 먹고 난 이후까지. 이런 이상한 현상이 줄리와의 사랑에 있어 R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R은 좀비를 넘어선 그 어떤 존재로 변해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해. 우리는 우리의 일기조차 읽을 수 없다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있는 곳에 우리가 존재하지.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음에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야."
"정말로 우리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가?"
"잘 모르겠어."
"우리는 죽은 자야. 우리가 정말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만약에 우리가 그럭저럭 나빠지기를 원한다면."
-p.146


 



사랑은 만병통치약

웜 바디스는 결국 '삶과 죽음을 넘은 사랑'이야기이다. 이야기가 그리 치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웜 바디스의 이야기는 로맨스답게 흘러 가고, 그 장르의 속성을 잘 지킨다. 뒤쪽에 드러난 좀비의 시작에 대한 설명이 좀 흐지부지된 감이 없잖아 있다. 미리니름이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야겠지만 약간 써보자면, 그로써 일반적인 좀비물을 넘은 특이한 정체성을 확립했으며 그것 또한 꽤나 '로맨스'스럽다. 게다가 철학자 좀비가 전하는 이야기다운 결말이라고 할까. 설정에서 현실성을 버린 대신 주제를 형이상학적인 궤도 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랑은 어디서나 이야기하듯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R과 줄리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로 사랑을 믿고 사람을 믿으면, 생을 회복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이름을 잃은 것이 비극이라고 이야기하던 R이 변화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사랑을 통한 치유의 한 예시가 된다.

"음... 까다로운 부분인 것 같은데. 과거는 역사로 만들어지고... 미래는 그냥 희망인 것 같아."
"아니면 두려움."
"아니야." 그녀는 머리를 단호하게 흔들고 내 머리카락에 낙엽을 꽂는다. "희망이야."
-p. 186


영화화 진행 중

 


웜 바디스는 로맨스로서의 재미에 충실하면서 좀비물의 재미도 잘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출간도 되기 전에 영화사에서 판권을 사가 현재 영화화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영화 트와일라잇의 제작사에서 만들고 있으며 올해나 내년 쯤에 개봉한다. 북트레일러도 직접 제작했다는 훈남 작가 아이작 마리온은 도무지 말이 안 될 것 같던 좀비 로맨스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 좀비 남자주인공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니. 이것 참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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