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폭염이다. 온열 질환자가 사상 최대라는 뉴스 타이틀을 얼핏 본 것 같다. 감기에 걸렸다. 처음에는 목이 칼칼하니 목소리가 탁한 것 외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그래서 목과 관련된 여러 가지 병들을 떠올렸다. 그래봤자 갑상선암이었지만. 검색해 보니 갑상선암은 증상이 없다고 한다.
다음날, 일어나니 목에 가래가 낀 것처럼 목구멍이 턱 막힌 느낌이었다. 억지로 억지로 에헴 에헴 목구멍에 붙어 있는 무언가를 떠어내어 보니 꾸덕한 버터 같은 가래가 조금 나왔다. 그 외에는 딱히 증상이 없었다.
또 다음날, 샤넬에 가서 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주얼리와 가방들을 착용해 봤다. 더 보고 싶었는데 영화 시간이 되어서 매장을 나왔다. 극장에서는 아랍영화제를 하고 있었는데 <폐허에서 파쿠르>라는 가자 지구 청년의 목숨을 건 파쿠르와 가자 지구 탈출에 대한 다큐를 봤다. 집으로 돌아올 때 자동차의 에어컨 바람이 매우 차갑게 여겨져서 에어컨을 끄고 운전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별로 덥지 않아서 에어컨을 켜지 않고 샤워하고 바로 잤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새벽 2시쯤 오한이 느껴져서 잠에서 깼다. 그때서야 알았다. 이것은 감기, 여름 감기!! 주방으로 가서 상비약이 있는 싱크대를 열어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다시 잤다.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내 몸이 김밥 속 재료라도 된다는 듯이 여름 냉감 이불을 김처럼 둘둘 말고 잤다.
또또 다음날, 콧물이 좀 나왔고, 콧물 때문에 코가 좀 막힌 것 같았다. 봄에 입던 긴 팔 셔츠와 베스트를 입었다. 마스크도 꼈다.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했다. 어제 쇼핑을 도와준 직원에게 연락하고 샤넬에 갔다. 샤넬에서 최신상 25-26-fw 25백을 샀다. 거대한 쇼핑백을 들고 주차장으로 가서 트렁크에 쇼핑백을 넣어두고, 쇼핑백 대신 황정은의 신간 <작은 일기>를 꺼내 들었다. 백화점 3층에 있는 메종 키츠네 카페에서 플랫 화이트를 마시면서 내란 수괴 윤 씨가 탄핵되는 날까지의 일기를 읽고 책을 덮었다.
또또또 다음날, 마스크와 긴 옷 그리고 샤넬 25백으로 중무장을 하고 출근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았다. 몸을 최대한 온수 속에 담그고 반신욕 덮개를 목까지 올리고 욕조에 기대어 앉아 뉴스를 들었다. 내란 수괴 윤 씨가 소송을 한 104명에게 위자료 10만 원씩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위자료 총액이 어제, 그제 내가 샤넬에서 쓴 돈보다 적었다.
몸이 좀 데워졌는지 거실이 덥게 느껴져서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이 거실을 차갑게 만드는 동안 마스크를 쓰고 긴 팔 옷을 입었다. 이름이 참 맘에 드는 스트레스리스 리클라이너에 눕다시피 앉아서 찜 해둔 영화 중에서 뭘 볼지 리모컨 버튼을 이리저리 눌렀다. <시민 덕희>나 <크로스> 같은 가볍고 통쾌한 범죄 영화가 보고 싶은데 웬만한 건 다 봐서 볼 게 없었다. 거실이 춥게 느껴져서 에어컨을 껐다. <시민 덕희>의 장윤주와 <크로스>의 황정민, 둘 다 나오는 <베테랑 2>를 골랐다. 재미없다는 소문이 있어서 기대 없이 봤는데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었다. 졸렸다. 그래서 30분 정도 남겨두고 그냥 잤다. 모델 장윤주 배우(??)의 연기와 배역은 <시민 덕희>가 10배는 더 나았다. 정해인이 악역하기엔 얼굴에 악의가 좀 부족한 듯도 하고. <비상선언>에서 임시완 악역 같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정해인의 얼굴에는 온기가 많은 듯. 임시완은 서늘한 연기엔 참 서늘해 보임.
여름 감기는 처음이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여름 감기에 걸린 기억은 없다. 이 폭염에 긴 옷에 마스크라니. 지금도 에어컨 켜지 않고 있다. 뉴스에서는 전국 대부분이 폭염 경보라고 한다. 내가 사는 동네도 현재 폭염 경보다. 웃기게도 난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처서 즈음의 여름 같다고 생각했다. 요 몇 년 동안에는 처서에도 굉장히 더웠지만 2000년대나 2010년대에도 처서가 지나면 모기입도 삐뚤어진다는 속담처럼 처서즈음부터는 시원했다. 처서 즈음에 나오는 아오리 사과가 나의 가장 중요한 절기 음식인 시절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아오리 사과는 저렴했다. 특히 파장 무렵 시장에 가면 8개에 2000원에 팔기도 했다. 언제던가 마트 과일 코너에서 아오리 사과가 1개에 2000원 하는 걸 보고 기겁을 했던 적이 있다. 물론 좀 더 크고 좀 더 품질이 좋아 보였지만.
소울 푸드가 죄다 싸구려 음식(아오리 사과 포함)이다. 어렸을 때 먹던 음식들이 그러했기 때문인 것 같다. 뜨거운 오뚜기(일본산 고급 고체 커리 말고) 카레가 먹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먹고 싶은 건 죄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던 사소하고 저렴한 음식들이다. 갓 만든 뜨거운 오뚜기 카레(감자, 양파, 당근, 돼지고기, 파프리카)를 에어컨도 없이 긴 팔 옷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퍼 먹었다. 나답지 않게 두 그릇을 먹었다. 최근 몇 년을 통틀어서 이렇게 맛있게 음식을 먹은 기억이 없다. 얼마 전에도 뷰가 좋은 해운대 고오급 호텔 뷔페에 가서 시식 코너에서 조각 음식 먹듯 먹은 나인데 말이다. 사람들이 스테이크, 대게 등등 비싼 음식을 여러 접시 먹을 때 나는 수삼냉채, 생선구이, 샐러드 한 접시 먹고 끝. 디저트로는 파인애플 2조각, 수박 2조각 먹고 끝. 내가 만든 오뚜기 카레가 호텔 뷔페보다 10배는 넘게 맛있었다.
내가 만약 소설가인데, 권여선처럼 음식 에세이를 쓰게 된다면 아마도 여름 감기엔 오뚜기 카레를 처방한다 어쩌고 하는 글을 쓸지도. 권여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존한 한국 소설가임에도 불구하고(원래 제일 좋아하던 작가는 죽었음. 박완서 소설가이다) 최근작(맞나?) <술꾼들의 모국어>는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기존의 음식 에세이 <오늘 뭐 먹지?>와 비슷할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는 술과 안주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얘기가 나온 김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창작자는 가수 오지은 작가(?)인데 오지은의 최신작 <우울증 가이드북>을 사지 않았다. <술꾼들이 모국어>, <우울증 가이드북은> 나에게 있어서 <삐뽀삐뽀 119 소아과>와 다를 바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 여기서 밝혀진 사실 하나: 나에겐 오타쿠의 피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