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큰 희생을 했으니까 감사하라고? 그래, 엄마는 조선인 폭력배와 결혼하지 않았지. 그래서 그 일을 칭찬해 달라는 거야? 엄마는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거잖아. 엄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이기적인 인간이야. 엄마가 그 남자와 자고 싶고, 그 남자의 돈을 받아 멋진 가게를 열고도 그 남자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건 엄마 자신을 위해서 그러는 거야. 나나 오빠들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 하나는 셔츠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엄마는 손가락질 받고 싶지 않은 거야.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거고. 큰 도시에 몸을 숨기려고 훗카이도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이잖아. 엄마는 자기가 희생자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엄마는 두려워서 떠난 거야. 늙어가는 게 두려워서 그 모든 남자들과 바람을 피운 거라고. 엄마는 약하고 불쌍한 여자야. 나한테 희생이니 뭐니 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헛소리는 믿지도 않으니까."

<파친코 / 이민진>


느닷없이 한국 멜로드라마가 보고 싶어서 곳간에 쌓아두었던 것 중에서 이준혁 첫 멜로드라마인 <나의 완벽한 비서>를 봤다. 한국 멜로드라마에서 늘 나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이기적인 부모들인데, 이 드라마에는 한 술 더 떠서 '지나치게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린 딸'이 등장했다. 한부모 워킹 대디인 이준혁의 유치원생 딸은 한국의 부모들이 염원하는 유니콘 자녀 그 자체였다. 멜로드라마가 보고 싶었는데 여성가족부에서 만든 공익 가족 드라마를 봐버렸네. 요즘 부모들이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한다고 할 때의 '그 딸' 역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별이(이준혁 딸). 역겨웠다, 그런 설정이. 7살 딸이 30대 아버지를 이해하고 돌봐준다는 그 설정이. 효녀 심청에 이은 효녀 별이! 


멜로가 아닌 가족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데 약 13시간 정도를 낭비하고 멘탈이 털려버린 나는 넷플릭스가 이어서 추천하는 드라마인 <웰컴투 삼달리>를 연속으로 보게 된다. 이유는 지창욱이 주연이니까. 지창욱이 나오는 멜로에 대한 기대랄까? <도시남녀의 사랑법>을 재미있게 봤기에 그 비슷한 재미를 기대했다. 기대와 달리 이 드라마는 고작 3부 만에 내 멘탈을 오지게 박살 내버렸다.


<웰컴투 삼달리> 역시도 멜로의 탈의 쓴 K-가족 공익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에도 지나치게 일찍 철이 들어버린 9살 딸이 29세 엄마를 돌보고, 이해해주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서는 30, 40대의 철이 안 든 이모들까지 돌보고, 이모들과 조부모 사이의 갈등을 완화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2023년에 제작된 드라마에서 9살로 나오면 2015년 생이라는 건데, 2014년생이 9살에 철이 들 리가 있나? 


이 드라마 최악의 인물은 조삼달의 모, 고미자이다. 나는 고미자가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는 내란수괴가 탈옥했을 때보다 더 큰 분노와 모멸감을 느꼈다. 저런 게 부모라고? 저런 게 엄마라고? 고미자는 딸의 이혼, 딸의 출산과 한부모(배우자 사망) 됨, 딸의 루머로 인한 자신의 체면 손상을 가장 크게 받아들인다. 이혼, 출산+배우자의 사망, 루머로 인한 사업 망함으로 인해서 자녀들이 얼마나 힘들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딸들의 망함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나서 내복만 입고 동네 골목을 달리는 고미자 씨 정말 징그럽다.


고미자 같은 K-엄마가 원하는 딸은 손녀 하율이 일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의 사리를 잘 헤아리는 철든 반려동물,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부모의 대리 자아실현을 해주고, 결혼해서 손주를 낳는 것으로 유전자를 이어주고, 늙고 병들면 간호간병을 해주고, 마지막에는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사후 금고의 역할까지를 바라면서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치원생 딸 별이, <웰컴투 삼달리>의 9살 딸 하율은 어린 딸이 부모를 이해하고 돌본다는 점에서 판박이처럼 똑같다. K-부모와 K-장녀. 왜 아직도 멜로의 탈을 쓴 이런 가족 공익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이며 한국의 딸들은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졸라 가스라이팅 당하는 걸까? 


착한 딸은 왜  이기적인 엄마가 되어버리는 걸까?

자신들의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보살핌을 왜 자식으로부터 받으려고 하는 걸까?

뭐, 그런 심보니까 자식을 낳는 거겠지만.

그렇기에 자식이 인생 망해서 부모를 찾아가면 위로를 해주는 게 아니라 <웰컴투 삼달리>의 K-엄마 고미자처럼 화를 내는 것이다. 


<파친코>의 선자 같은 인간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해버리는 인간들. 그게 상대방에게 치명상이 될지라도 자기 방식의 애정(이라기보단 집착 또는 소유욕) 표현을 해버리는 이기적인 인간들. <파친코>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 유일한 희생자 노아. 선자 같은 부모가 제일 싫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선택들을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고 우겨대는 이기적인 부모들 진짜 싫다. 


멜로의 탈을 쓴 K-가족 드라마를 보고 빡친 나는 K-가족 제도로부터 도피하는 심정으로 미드<애나 만들기>로 커서를 옮겼다. 턱턱 막히던 숨이 이제야 제대로 쉬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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