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교토 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인 24살 '젊은 작가'를 만났다.

1975년 생인 그도, 이제 내일 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아저씨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 채!

(저런 이미지로 남아 있는 것을 히라노 상은 무척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만ㅋ)



사실 히라노 게이치로가 한국에 온다는 생각도 못했을 뿐 더러,한동안 그의 이름 자체를 잊고 있었는데 

우연찮은 기회에 알라딘에서 단독으로 개최하는 본 행사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꽂혀 있는 그의 책들을 찾아 보았으나...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달랑 두 권, <책을 읽는 방법>과 일종의 대담집인 <웹 인간론> 뿐이었다. 


행사 전날일 14일 금요일 밤, 두 책을 다시 들춰보았다. 


<책을 읽는 방법>은 슬로 리딩(Slow Reading)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인데

소설가이기에 앞서 그 역시 한 명의 독자로서 '프로 독서가의 기업 비밀'이라는 부제가 인상 깊었던 책이다.




이번에 다시 들추면서 우연한 발견이라고 해야할까? Serendipity를 찾게 되었다.

89페이지에서 히라노 상은 다시 읽음, 즉 '재독(Re-Reading)'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면서 똑같은 한 권의 책이라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의식에 따라 그 재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책을 오 년 후, 십 년 후에 가끔씩 꺼내 다시 읽어보라... 우리는 자신의 성장의 흔적을 실감할 것이다...책과 그런 관꼐를 만들 수 있다면, 책은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일부가 될 것이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아래에 적어 놓은 메모이다.



"이 책을 5년, 10년 뒤에 다시 읽을 것인가?" (2008.4.6)


... 정확히 5년 2개월 8일 뒤인 2013년 6월 14일, 나는 <책을 읽는 방법>을 다시 읽게 되었다.

5년 전 내가 이 책에 적어 놓은 여러 메모를 보면서, 내가 5년 간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는,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는 안타까움이 드는 순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위를 하고 위안을 삼을 부분도 있다는 점에 어깨를 으쓱하기도 했다.


책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히라노 게이치로와 2008년 책을 통해 만나고 2013년에 다시 만나면서, 

사실은 두 명의 '나'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다리같은 존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전날 밤의 감상은 저물어 갔다.



행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었다. 



히라노 게이치로와 직간접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교류를 맺어 온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고 

한국 땅에서 나름의 팬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다가왔다.

가벼운 소설을 쓰는 일본 작가가 주로 큰 인기를 얻는 반면, 히라노 상의 소설은 분명 그것들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 주제는 "SNS시대의 고전 읽기" 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항 씨의 사회 및 소설가 김언수 씨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약 1시간 반의 시간은

메인 주제와는 조금 벗어난 이야기였다.


우선, SNS 시대를 논하지 않았다.

두번째는, 고전에 대해서 그닥 논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읽기'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명의 작가로서 본인이 소설을 왜, 어떻게, 무슨 계기로 집필하게 되었는가가 중심 화제였다.



개인적으로는 즉시성, 휘발성, 실시간성의 SNS 시대에서는

과연 독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특히 Classic 이라 칭송 받는 고전의 위상이 지속되거나 혹은 재평가되거나 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본 행사에 참가하였는데 그런 부분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다소 아쉬웠다.




일본의 IT 전문가 우메다 모치오와의 대담을 그린 <웹 인간론>은 2006년에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178페이지에서 히라노 상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  '아비투스 Habitus, 습관'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어떤 사회 환경 안에서 예를 들어 상류계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오페라를 몇 번이나 관람하는지...

결국 '계급'이 재생산되는 것은 그런 환경에 얽힌 아비투스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SNS 시대, 독서에 관한 아비투스는 존재하는가?


오늘날 스마트폰 중독에 관한 기사가 매일마다 언론에서 다루어지고

주말에 식당에라도 나가보면, 아이들은 부모 대신 스마트폰과 교감을 나누느라 정신 못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물질적인 재산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며 행동적인 '습관'까지 포함된다고 보면,

오늘날 SNS와 스마트 혁명 시대에서의 가장 큰 '아비투스'는 어쩌면 '책을 안 읽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구텐베르크 이후 가장 큰 사회 변화'라는 인터넷과 SNS에 대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아쉬웠을 따름이다.



롹 스타, 히라노 게이치로


2시간 조금 넘게 열린 대담이 끝난 후, 저자의 싸인회!

기타 연주가 취미였던 것이 와전되어, 한동안 '작가 겸 락커'로 오해받았던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지간한 락커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을 듯.





한명 한명 정성들여 싸인을 해주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아서

나도 나름 그의 책을 싸들고 갔었지만 그냥 빈손으로 돌아왔다.

5년 뒤 혹은 10년 뒤 언젠가 또 기회가 닿으면, 

다시 한번 그의 작품을 Re-Re-Reading 하면서 만날 수 있겠지...생각하면서.




p.s.마지막에 Q&A 시간에 비슷한 질문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소설을 소비만 하는 나로서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는 주제였는데 
문화 평론가라는 자들이 말한다는 "소설 무용론(쓸모없음)"에 관해 히라노 상의 의견을 묻는 질문들이었다. 

그건 마치 신작 발표회 자리에서 영화 감독에게 
'영화가 더 이상 의미 없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 같은 질문 아닌가?

막 신작 소설을 써 낸 소설가(한국에는 9월에 나온다고, 김항 씨가 강조를! ㅋㅋ) 에게 
그런 무의미한 질문이 - 심지어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 어떤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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