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문재인 변호사님이 부산MBC에서 대화로 통한 콘서트를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보니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님, 영화배우 문성근, 내가 꿈꾸는 나라의 김기식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님, 그리고 그날의 주인공 문재인 변호사님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자리의 진행과 기획, 연출을 맡은 성공회대 탁현민 교수님이 있더군요. 축하공연을 하러 멀리 서울에서 오신 루타틱 보컬분, 일단은 준석이들 분들도 수고를 많이 했고요.


저는 이날의 북콘서트를 보면서 느낀 점은 이날의 대화를 보기 전에 이미 문재인 변호사님의 “운명”이란 서적을 보았고, 그리고 이 책 이외에도 다른 서적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최근에 “존 롤즈”라는 작고한 미국철학자의 <정의론>을 읽어 보았는데, 북콘서트를 보면서 <정의론>이란 서적이 많이 생각나더군요.


왜냐하면 <정의론>이란 도서는 이른바 공리주의(功利主義)에 대해 적은 책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기술하였으며, 개인의 자유보장과 그리고 최소수혜자의 기본적인 보장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인간상을 대해 적었는데, 어제 북콘서트에서 엄청나게 생각나더군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인 편안함과 안락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어느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사회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경로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조차 박탈당하고도 가만히 앉아 봐야하는 세상 속에서 이것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인간을 더욱 소외시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아갈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을 지니고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태어난 곳이 지역에 따르거나 혹은 부모님의 경제적·사회적인 영향에 따라 그 후예들도 같이 변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차별을 둘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문화적인 불평등이 나쁘다는 것은 <정의론>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경제적·사회적인 위치에서 불평등은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어느 사회적 약자의 정치적·문화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행위는 정의(正義)로운 행동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단지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고, 또한 단지 그 이유로 생존의 필수조건과 교육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과연 세상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실 사람은 “배부르면 배불리 먹고, 추우면 따뜻함을 찾고 싶고, 피로하면 쉬고 싶어 한다.” 말처럼 인간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이미 그 모든 것을 갖추어서 만족해야 하나 그 만족을 지나쳐서 타인의 생존까지 위협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사실 끝이 없나 봅니다. 동물은 욕구로 사용하고 인간은 욕망으로 사용하는데, 욕구는 1번 만족하면 이후 거기서 멈추고 마나, 욕망은 한번 만족하면 더 큰 무엇인가가 만족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만족을 위한 욕망수준이 증가하면 할수록 분명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어긋난 욕망으로 통해 누군가 희생된다면 분명히 그것은 정의가 아닌 부정의한 사회인 겁니다.


그런 부분이 확실히 부각되는지 한진중공업 사태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한진중공업 조선소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매일같이 노동자의 시위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TV 뉴스와 각종 매체에서는 노사협의가 이래저래 되었다고 하나 사실 매일 지나가며 보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거짓이란 것을 알죠.


한진중공업 앞에서 그리고 영도에서 중구로 넘어가는 부산대교 위에서 또한 부산지방노동청 앞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허위로 알려지는지 잘 보여주는 일일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별 것 없습니다. 그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계수단을 이어가려고 할 뿐입니다.


그런데 생계수단을 파괴하고, 그들을 절망으로 만드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당장 내일 아침 식사를 걱정해야하고, 아이들 학교수업비 마련에 노심초사하는 나라이라면 그것은 분명 잘 못된 사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이념과 정치적 노선을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인권(人權)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가(國歌)는 무엇일까요?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국민은 국가가 있어야지 살아갈 수 있기에 국가에 대한 의무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그 국민들이 국가에게 소외당하고 차별을 당한다면 그것은 분명 이상한 사회임은 분명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조선시대의 정치에서 모든 국가의 근본은 백성(百姓)으로 보았습니다.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괴롭히는 정치가와 수령만큼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국가를 다스릴 계책은 농민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논에서 꼴을 베고 글자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또한 다산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가면서 이계심이란 사람이 조목 10가지 들고 와서 예전에 통치하던 수령의 부정과 백성들의 원성을 토로했습니다.


그때 다산 정약용은 이계심이란 사람을 오라로 묶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실 이계심은 관청에 있는 원님에게 항의한 대역죄에 걸려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앙정부기관에서도 잡아서 조치해야할 역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산은 그의 말을 들어주고 잘못된 관의 행정과 부패를 척결하여 백성의 원성을 환호성을 바꾸었습니다. 오히려 이계심이란 사람에게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합니다.


과연 정치란 무엇일까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지 못합니다. 누구는 강하나 누구는 약합니다. 약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불평등을 불평등으로 보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조금씩 개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막힌다면 세상은 희망이 있겠습니까? 물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그 있는 사람과 비교하여 상당히 많을 겁니다.


전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난쟁이와 대화할 때는 그 대화하는 사람도 난쟁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난쟁이를 진정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난쟁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렇게 바른 사람이 아니기에 눈에 잘 띄지 않기 보다는 보려고 하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그러나 난쟁이가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 사회가 희망이 넘치기 위해서는 난쟁이들도 더 이상 난쟁이가 아닌 나라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아닙니다.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난쟁이가 꿈과 희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갈 있는 것 역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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