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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월이었다.
겨울바람은 스산했고, 누군가를 만나러 떠나기엔 길이 너무 미끄러웠다.
보고 싶은 사람들은 너무 멀리 있었기에 내 기분은 한 없이 가라앉았다.
누군가와 수다를 떨기라도 하면 겨울바람보다 더 스산한 내 마음이 좀 잔잔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펼쳐 든 책이 허수경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허수경은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등의 시집을 낸 진주출신 시인이다. 라디오 프로 원고를 쓰는 일로 진주의 가족을 부양하다가 92년에 저기 멀리 독일에 고고학을 배우러 가서 아직까지 그곳에 있다. 시인과 고고학이라... 얼핏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다보면 그녀에겐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일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은 독일에서 ‘이름 없는 나날’이라 부른 나날을 보내는 동안 먼먼 ‘그들’에게 말을 건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짧은 이야기, 긴 이야기가 있는데 짧은 이야기는 아끼고 아껴 썼지만 오히려 더 강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시와 같은 느낌인 듯 하면서도 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반면 긴 이야기는 긴 이야기대로 잔잔하면서 진한 울림을 준다.
……기숙사 방 안에서 감기라도 앓는 봄날이면, 말에서 놓여난 자유를 아직도 자유답게 누리지 못하고 다시 그 말의 굴레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지켜보면서, 아직 나는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는 고개를 흔든다. 말을 하는 근원을 나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날, 그리고 그 새로운 언어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는 날, 나는 내 코끝으로 스치던 냄새들을 새로운 말로 적을 수 있으리라. 그때면, 나는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으리. 163쪽.
허수경은 아직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한 것일까 그리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언제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을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이 늦어지든 빨라지든 이미 그녀의 말로 나는 위안받고 행복해졌음을 그녀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는 동안 진주의 ‘꽃밥’이 먹고 싶어졌고,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졌고, 그런 것들이 나를 위로 했고, 스산한 마음은 훈훈하고 아늑한 글들로 포근해졌다.
내 안의 오래된 골목길을 오래오래 거닐 수 있었다.
작가는 ‘말의 굴레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보면서 ‘말에서 놓여난 자유를’위해, 먼 이국땅에 있다지만 나는 그녀의 말로, 그 말을 글로 풀어놓은 글로, 위로받고 평안을 얻었기에 감사한다. 그녀의 삶에 축복이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