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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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로 다 못한다. 사람의 마음은 말로 다 못한다. 자기의 감정을, 그 생각을,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마치 무지개의 수만가지 빛깔처럼 각양각색으로 움직이고 있는 내 안의 감상과 감각은 말로 다 못한다. 하나의 감상을 표현할 수 있는 몇 가지 적합한 단어는 찾을 수 있겠지만, 이 복잡하고 오묘한 감정의 총체를 고스란히 담아 전할 수 있는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의 한계다.

 

 흔히 우리는 ‘말’로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조금 더 꼼꼼히 이 작용을 살펴보면 말 그 자체가 칼이 되어 날아와 꽂히기 보다는, 말 속에 채 다 담기지 못한 감정이나 말을 벗어나는 생각들이 화살이 되어 찌르는 게 아닌가 한다. 우리의 눈이 빛을 반사하는 물성에만 닿지 않고 그 내면 속으로 가닿아 혼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는 그곳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어떨까? 그의 진짜 마음이 어땠는지, 그의 생각과 감정의 세세한 결들이 어떤 감촉인지, 그가 간직한 추억의 색채와 소리와 선율을 알 수 있다면? 모든 진심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서로의 마음을 몰라서 엇갈려버린 안타까운 순간들을 만회해볼 수 있지 않을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작 [녹나무의 파수꾼]은 ‘이런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면?’하는 상상력으로 빚은 환상소설이다. 녹나무와 가문의 비밀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속에 따듯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마음이 봄햇살처럼 내려와 앉는다.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믐날 밤에 녹나무 안에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염원합니다. 그것을 저희는 예념이라고 합니다. 염원을 맡긴다는 뜻이지요. 예념을 하는 사람은 예념자라고 합니다. 녹나무는 예념자의 그 모든 생각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보름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뿜어냅니다. 그때 녹나무 안에 들어가면 그 염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혈연관계인 사람뿐이지요. ”
373-374쪽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로 유명하지만 그의 소설들을 단순히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등의 이미지로만 연상하기에는 아쉽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작품만 해도 그렇다. 시간을 뛰어넘는 편지의 교신이라는 미스터리 장치를 통하여 히가시노 게이고가 독자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사는 일의 따듯함’이다.
 [녹나무의 파수꾼]도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놀라운 일, 미스터리 혹은 기적이라고 부를 만한 근사한 일은 서로 간에 사소한 따듯함과 신망을 주고받을 때 일어난다. 녹나무는 다만 그 사이에 꽃처럼 피어난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을 받을만한 사람에게 향기로 전해줄 뿐, 녹나무 자체는 기적이 아니다. 염원을 남기고 간 사람의 용기와 그것을 전달 받은 사람의 각오와 애정이 진짜 기적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원래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으면서 이제 나는 이 작가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 작품 [녹나무의 파수꾼]은 너무 너무 좋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불운하게 여기는 스무살 청년의 ‘낭만적인 성장기‘가 이 작품의 전부였다면 이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젊은 층이 삶의 애착을 잃고 가족애는 희미해져가며 온고지신의 의미가 이미 오래전에 퇴색된 현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 작품에 담았다.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레이토에게 우리 시대 10-20대의 얼굴이 비치고, 레이토와 치후네를 비롯하여 서로 연을 끊고 살아가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사회의 가장 최소 단위인 가족이 해체되어 모두가 철저히 개인으로 살아가게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고독한 표정이 읽힌다. 역사와 전통과 계승이라는 든든한 뿌리와 혈맥이 자취를 감추고 현재의 효율성만이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데에 대한 비판은 일본과 한국이 다르지 않음을 이 작품이 보여준다.

 

 [녹나무의 파수꾼]은 사상 최초로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에서 함께 출간되었다. 출간 상황만 특별한 게 아니다. 책 앞장에는 은색 글자로 작가의 전언이 인쇄되어 있기도 한다. 책 표지에서부터 영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작은 촉매제로, 곳곳의 작은 녹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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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줄거리 (스포일러가 매우매우매우 강함 주의!)
 레이토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손에 컸다. 레이토의 엄마 미치에는 긴자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다 유부남과 불륜 끝에 레이토를 혼자 낳아 키우다 레이토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유방암으로 세상을 뜬다. 후미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얼마 안 되는 재산으로 근근이 레이토를 키웠다. 생활고 속에서 자란 레이토는 할머니의 고생을 덜어주기 위하여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식품제조회사에 취업했지만 누명을 쓰고 회사 사람들 눈 밖에 난다. 친구가 일하는 유흥업소 웨이터로 일을 옮겼으나 호스티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켜 거기서도 쫓겨난다. 간신히 공작기계 회사로 재취업했지만 거기서도 역시 억울하게 쫓겨난다. 분한 마음에 공장 기계를 훔쳐 팔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한다.
 경찰에 체포된 레이토를 방면해준 것은 레이토의 이모인 야나기사와 치후에였다. 이제까지 이모가 있는 줄도 몰랐던 레이토는 가족관계에 대한 세세한 사연도 듣지 못한 채, 이모가 요구한 방면의 대가로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게 된다.

 

 녹나무는 레이토의 할아버지가 데릴사위로 있었던 ‘야나기사와’ 가문의 지경에 속한 일종의 소원나무다. 그믐날이면 누군가 녹나무에 염원을 전하고(예념) 보름날에는 염원을 남긴 자의 혈족이 녹나무로 찾아와 그 염원을 받는다(수념). 반드시 혈족만이 염원을 받을 수 있는데, 마치 유언장을 보관했다가 그것을 전해주는 듯한 녹나무의 신기한 작용은 벌써 백 년이 넘게 야냐기사와 가문의 파수꾼에 의해 지켜져 왔다. 녹나무 파수꾼이었던 치후에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자 급히 후계자를 찾아 나섰고 그녀의 먼 혈족, 심지어 그간 왕래도 하지 않았던 조카인 레이토가 파수꾼 견습생이 된 것이었다.

 

 녹나무와 염원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 채 일을 시작한 레이토에게 처음에는 모든 것이 기이했다. 살면서 제대로 된 가정교육도 받지 못했고 변변한 기술이나 꿈도 없이 살아왔기에 레이토의 생활 습관 역시 엉망이었다. 치후네 이모는 레이토의 사소한 습관과 태도를 교정하고 고쳐주면서 레이토를 야나기사와 가문에 소개한다. 자신을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사람으로 여기던 레이토의 삶은 녹나무 파수꾼으로 일하면서 그리고 치후네 이모와의 동행과 대화를 통해 숨겨진 가족사를 이해하게 되면서 점차로 근면하고 따듯한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런 레이토 앞에 유미가 나타난다. 유미는 녹나무에 기념을 하러 찾아오는 사지 씨의 딸로,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걸 막기 위해 레이토에게 도움을 구한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간 이후 아버지가 이상해 졌다는 것이다. 레이토와 유미는 사지 씨의 행적을 함께 추적하게 되고 그 끝에 사지 씨와 형 기쿠오의 숨겨진 사연을 알게 된다. 천재 피아니스트로 촉망받던 기쿠오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에 휩싸여 가족도 멀리하다 알콜 중독과 합병증으로 일찍 사망한다. 기쿠오는 사망하기 직전, 녹나무에 찾아와 가족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 속죄를 염원으로 남겼고 동생 사지 도시아키는 형의 염원을 받은 후 비로소 형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사연을 듣게 된 딸 유미는 사지씨와 함께 기쿠오가 귀가 먼 상태에서 어머니를 위하여 지은 피아노곡을 복원하여 연주회를 연다.

 

 녹나무가 전달하는 염원이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는 마음, 그 진실하고 솔직한 고백의 총체임을 깨달은 레이토는 치후에 이모에게도 솔직한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치후에가 앓고 있는 인지장애를 숨기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곁에 있을 것임을 그러니 치후에 이모 역시 옆에서 자기를 계속 가르쳐달라고 이야기하면서, 둘은 비로소 가족이 된다.

"네,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과연 어떤 세계인지, 치후네 씨도 아직은 알지 못하잖아요.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예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 씨는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뭐, 그래도 좋잖아요? 나는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 P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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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 - 차별화된 기획을 위한 편집자들의 책 관찰법
박보영.김효선 지음 / 예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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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강점 콘텐츠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강점 콘텐츠는 멀리 있지 않다. 내가 늘 관심있게 생각하고 탐구했던 영역, 너무나 어려워서 자꾸 실패했던 영역, 그래서 시간을 투자하여 연구했고 마침내 이런저런 해법을 찾아냈던 영역, 무엇보다 제삼자 입장에서 나에게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영역을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누가 봐도 당신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군.”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영역 말이다.
122쪽

 

 자기 사업을 해보려는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고민은 ‘나의 강점 콘텐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 아닐까. 고용직으로, 그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만 수행하면 되는 입장이라면 굳이 자신의 강점 콘텐츠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지만, 최근에는 나이 마흔만 넘어도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자기 사업을 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다.

 

 글쓰기 수업에 참여하면서 느낀 건, 굳이 자기 사업을 하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 강점 콘텐츠를 안다는 건 살아가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거다. 하다못해 글 한편을 쓰는 일에도, 자기 강점 콘텐츠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편차가 매우 크다. 자기 강점 콘텐츠는 자존감, 자기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나 자신이 어떤 콘텐츠에 특화되어 있는지, 누가 봐도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자타의 인정을 획득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는 건 내가 나 자신으로 견고하게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의 두 저자인 박보영, 김효선 씨는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책 쓰는 일’을 고민해보라고 하지 않는다.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는 글쓰기 자체에만 집중되어 있는 시점을 상품의 형태인 ‘책’의 위치로 확대하여 책쓰기에 대한 실질적인 가이드를 쓴 책이다. 책을 내고 싶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 빠지기 쉬운 ‘원고’의 함정에서 벗어나 상품으로서, 사람들이 지갑을 열고 구매하게 만드는 좋은 상품으로서의 책을 어떻게 만들지를 조언한다.

 

 책의 가치는 단지 판매 수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책은 자신의 콘텐츠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에, 많은 저자들이 책을 쓰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객관적으로 체계화되었다는데 만족감을 표한다.
125쪽

 

그렇다고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가 책을 파는 데에만 혈안이 된 건 아니다. 책은 우리의 생에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자아 발견의 도구, 자기 정체성의 도구, 위로와 격려의 도구, 자기 경쟁력의 도구 등 책의 역할은 정말 다양하다. 그래서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책은 사람의 존재감, 인생의 의미, 심리 상태와 직결된 특별한 존재다.

 

 책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에서도 지적했듯이 책을 전문성 증명의 도구로, 자기 성취의 도구로 삼아 책을 쓰고 싶어하는 예비저자들이 굉장히 많다. (내 주변만 해도 여럿...) 이런 상황에, 책을 직접 만들고 팔아야 하는 출판사와 편집자들의 입장은 어떨까? 좋은 책을 쓰는 저자들을 찾기 위하여 출판사와 편집자들도 굉장히 성심성의껏 원고들을 살피고 좋은 저자를 찾고 있다고,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의 저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이다. 독자들과 저자, 출판사 모두에게 정말 의미가 있고 유익이 되는 ‘좋은 원고’를 쓰는 것. 이런 원고를 생산하여 책을 내는 것. 그래서 편집자인 저자들은 이 책 [편집자처럼 책을 보고 책을 쓰다]를 냈다. 좋은 원고를 쓰는 저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세상에 전문가는 숱하게 많다. 그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 찾아오게 할

방법이 필요하다. 저자라면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131쪽

 

 책이 너무나 흔한 요즘이지만, 오히려 정말 읽을만한 책은 적어진다. 좋은 책이란 어떤 것인지, 자기 강점 콘텐츠가 확고한 좋은 원고란 무엇일지, 오늘도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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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리커버) - 인간을 완성하는 12가지 요소
제롬 케이건 지음, 김성훈 옮김 / 책세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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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드 몽테뉴는 불과 서른여덟의 나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자기 성으로 들어가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고, 그 에세이는 400년 이상 지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58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가 거짓말쟁이에서 식인 풍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여 쓴 에세이들은 <수상록>이라는 세 권의 수필집으로 남았다. 나는 2013년 3월 어느 추운 토요일에 이 에세이집을 다시 꺼내 읽다가 이번 세기에 대해 나도 그와 비슷한 책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몽테뉴와 비교하면 나이도 많고, 성도 없지만, 최대한 가식적이지 않게, 그리고 애매하지 않게 써볼 생각이다.
책 4쪽 저자의 프롤로그, 가장 첫 문단

 

 

 몽테뉴의 에세와 비슷한 글을 써보겠다는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몽테뉴보다 많이 가진 건 나이요, 적게 가진 건 성(城)? 저자 제롬 케이건은 아예 성이 없다고 하니 적게 가졌다고 하는 건 맞지 않는 말이겠다. 본문을 차근차근 읽으면서 이 프롤로그를 떠올려보니 ‘최대한 가식적이지 않게, 그리고 애매하지 않게 써보겠다’는 저자의 시도는 성공한 듯 하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이 쓴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는 무슨 책이라고 딱히 짚어서 말하기 어려운 책이다. 아마 몽테뉴의 ‘에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독자의 반응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몽테뉴의 에세는 다른 어떤 책과도 비슷하지 않았기에 에세이라는 고유명사가 되고야 말았지.) 언어, 지식, 배경, 사회적 지위, 유전자, 뇌, 가족, 경험, 교육, 예측, 감정, 도덕의 12개 주제에 따라 저자는 그의 생각을 정리해 썼다.

 

 말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안다는 건 무엇인가? 배경은 어떻게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가? 인간은 왜 남과 비교할까? 성격도 타고나는 걸까? 뇌로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가족은 꼭 있어야 할까? 어린 시절 형성된 특성은 평생 갈까? 교육은 왜 필요할까? 예측은 힘을 갖고 있을까? 느낌과 감정은 다른가? 도덕적인 사람은 도덕적으로 행동할까? 


 목차에 나란히 줄지어 앉은 질문들만 읽어도 딱 감이 온다. 이 책 범상치 않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와인 한잔을 곁에 둔, 여유로운 저녁 시간에 읽으라고 권했는데 아마 그럴 수 있는 독자는 몽테뉴의 에세 3권을 모두 다 읽고 소화하여 그걸로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토론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하리라 싶다. 즉, 저자와 식견이 비슷한 수준의 독자 말이다.

 

 저자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지적했듯이 ‘고릴라가 자기 먹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했을 때의 ‘안다’와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의 느낌과 감정의 상태를 안다’고 했을 때의 ‘안다’는 같은 의미가 아니다. 20년차 수목원지기가 소나무를 ‘안다’는 것과 고작해야 등산 몇 번 다녀본 내가 소나무를 ‘안다’는 것 역시 동일한 ‘안다’가 아니다. 이 책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자가 언어, 지식, 유전자, 가족, 경험 등에 대하여 꺼내어 놓는 문장들은 내가 꺼낼 수 있는 것과 다르다.

 

 이 책은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등에 대하여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전체에 대한 통찰을 쓴 에세이다. 이제까지 읽은 에세이가 그냥 커피라면 이 책은 레알 TOP다. 독자에게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와 토론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온 책이다.

 

 

 최근에 폐렴으로 사망한 17세 고교생의 구체적인 사인이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추정되면서 사이토카인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름도 생소한 ‘사이토카인’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5장 유전자와 11장 감정, 두 개의 꼭지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중에 포털 검색어로 사이토카인이 올라와서 굉장히 신기했다. 동시에 이 책이 심리학, 철학, 사회학, 과학 뿐 아니라 의학의 영역과도 걸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가난, 일자리 불안, 만성 신체질환, 사회적 배제 등이 있으면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이 분비된다. 이 단백질은 상처의 치유, 감염과의 싸움을 돕고, 근육이 찢어지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독감에 걸렸을 때 동반되는 피로감이나 불쾌감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을 활성화시킨다. 이런 느낌을 당사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우울해질지가 결정된다. 대부분의 성인은 피곤한 느낌이나 불쾌한 느낌은 자기가 아프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부상을 입었거나 감염의 신호가 있는 경우에 그렇다.
218쪽  5장 유전자 중에서

 

 5장에서 지속적인 가난, 학대, 잦은 질병은 사이토카인이라는 단백질의 생산을 자극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이토카인은 질병과 함께 찾아오는 피로감이나 무관심함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을 활성화한다. 이런 느낌을 감지했지만, 자신이 아프다고는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해석을 찾아내려 한다. 자기가 우울증에 빠져 있다고 결론내리는 것도 한 가지 흔한 해석이다. 사이토카인 단백질은 우울한 기분을 직접 야기하지 않는다. 이 단백질이 만들어낸 느낌이 우울증으로 해석됐을 뿐이다. 
416쪽 11장 감정 중에서

 

 진정될 줄 모르는 코로나19 사태(전 세계가 다 영향권이라 한 국가, 한 도시에서 잡는다고 안심할 수 없는 전염병) 속에서 ‘사이토카인 폭풍’에 대한 염려까지, 엎친데 덮친 느낌이라 마음이 더 불안해지는 시기다. 다만, 무분별한 즉 근거 없는, 추상적인, 모호한 염려는 없던 병도 만들 수가 있으니 이런 때에는 감정과 느낌을 단속하는 일도 무척이나 중요해 보인다.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를 읽고 나서 무엇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가 참으로 조심스럽고 겸손해졌는데, 이와 동시에 애매하지 않게, 피상적이지 않게 알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생각을 정리해나갈 것인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한 번에 다 읽으려 하지 말고 저자와 독서토론하듯이, 주의깊게 읽게되는 좋은 책이다.

 

유전자는 뇌의 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일란성 쌍둥이라도 똑같은 경험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생각이 행동과 감정에 핵심적인 기여를 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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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식당
미원x이밥차 지음 / 이밥차(그리고책)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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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년 전에는 오븐이나 냉장고 같은 대형 가전을 사면 꼭 레시피북이 곁들어 왔다. 고추장 사면 맛보기용 쌈장이 딸려 오듯이. 어릴 때는 그런 레시피북을 살펴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를 찾아보는 게 재미였다. 베이킹도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였다. 엄마손 안 거치고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맛있는 걸 찾아보다가 내 눈에 딱 걸렸던 것.
 
 요즘에는 가전을 살 때 사은품으로 오는 레시피북이 의미가 있을까. 인터넷에만 검색어를 넣어봐도 수만가지 레시피가 뜬다. 그래서 어떤 분은 레시피북 자체의 의미가 없지 않냐고도 하신다. 레시피나 요리 동영상을 켜둔 스마트폰이나 패드를 가지고 조리를 해도 충분하니까. 그런데 요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레시피북은 의미 있다. 나만 해도, 인터넷에 그렇게 많은 베이킹 레시피가 있어도 책으로 가지고 있는 레시피북이 적지 않다. 이따금 이 책, 저 책 펴 놓고 레시피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요리하는 마음’의 이런 특이점을 <미원>도 알았나보다. 미원을 활용한 다양한 요리법을 수록한 레시피북 <미원식당> 이 나왔다. 일상에 꼭 필요한 쉬운 요리 만들기에 주력하는 <이밥차>와 <미원>이 손잡고 함께 책 <미원식당>을 냈다.

 솔직히 미원이 이렇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조미료인줄 처음 알았다. 한때 MSG가 몸에 안 좋다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미원은 사실 사탕수수를 발효하여 만든, 몸에 해가 없는 조미료다.

 

 <미원식당>은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다양한 메뉴를 실었는데, 최근의 트렌드에 맞게 조금씩 변형한 레시피들이 인상적이다. <미원식당>이라는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모든 레시피에 조금씩 들어간 미원이 화룡점정을 담당하고 있다.

 항상 계량스푼으로만 계량을 하는데에 익숙해서, 밥숟가락 계량이 오히려 낯설었는데 <미원식당>에서 너무 잘 설명해주어서 알았다. 친절한 설명 너무 좋음. 레시피마다 오른쪽 페이지 하단에 요리팁이 두세줄 씩 들어가 있는데, 나처럼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내용도 꽤 쏠쏠한 노하우가 된다.

 

 

 <미원식당>에 실린 레시피들을 살펴보다가 급땡겨서 만든 치즈감자전. 너무 맛이 좋다보니 뱀가루가 아니냐는 낭설에 휩싸이기도 했다던 <미원>의 매력은 여기서도 발휘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도, 3명 이상의 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에도 어울릴 레시피북 <미원식당>. 한식, 정식 요리, 분식, 간식까지 다양한 레시피가 있어서 이것저것 활용하기에도 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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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 100번 넘어져도 101번 일으켜 세워준 김미경의 말
김미경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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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다루는 방법을 알면 삶이 위험하지 않고
벗을 대하는 방법을 알면 삶이 풍요로워 진다.

 

우리는 종종 나 자신을, 내 가족을, 내 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혹은 방법을 오해해서 어려움을 겪는다.
동기부여 강사로 유명한 김미경은 신간 [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에 마음, 일상, 관계, 꿈을 살리는 '한마디'들을 엮어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13개국에서 강연을 하며 최근에는 MKTV로 더욱 유명해진 저자는 이 책에 영상 콘텐츠 운영을 하면서 24시간 실시간으로 구독자들을 만나게 된 새로운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 순간 깨달았죠. 영상 콘텐츠는 댓글을 포함해야 비로소 완전체가 된다는 걸 말이에요.
그전까지만 해도 영상을 만들어 올리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댓글은 영상에 대한 피드백 정도로만 여겼죠. 그런데 해외 투어 이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시작은 영상이었지만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이 저를 미국으로 이끌었고, 13개 도시에서 현지 교민들과 웃고 울고 마음을 나누면서 비로소 제가 올린 영상이 완성됐음을 느꼈거든요. 제가 올린 영상이 절반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팬들이 달아준 댓글로 채운 거예요.
프롤로그 12쪽

 

[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는 김미경 저자가 유투브 채널을 통하여 했던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함께 모아 완성한 책이다. 각 꼭지마다 해당 내용의 영상 콘텐츠와 연결되는 큐알코드가 실려 있고 독자들의 진솔한 후기도 같이 있다.

 

요즘 신간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 하나가, 제대로 만든 책일수록 (원고든 디자인이든 마무리든) 책 뒤로 갈수록 더 재미있고 유익해진다는 점이다. 처음 1챕터만 읽을 만하고 중반부를 넘어 뒤로 갈수록 영 재미가 없어지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이 책 [이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는 뒤로 갈수록 더 책에 빠져들게 만든다. 재미있고 신선하다. 강연자로서, 노력하는 인간으로서의 저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특히 파트3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이 부분은 ‘관계’를 살리는 한마디가 주제다. 최근에 어디서 읽었는지, 들었는지 기억이 가물하지만 관계는 식물을 기르는 화분과 같다고 했다. 시들거나 병들지 않도록 적당히 물을 주고 가꾸어주면 오래가지만 때를 놓쳐서 다 시들어버린 다음에는 아무리 물을 주거나 양분을 주어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관계는 살아있는 식물과 같다는 사실은 관계의 대상이 누구이건 같다. 반려식물 기르기가 유행하면서 홈가드닝 기술이 뜨듯이, 관계도 오래가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엄마와 딸의 관계, 맞벌이하는 부부 관계, 거절하기엔 너무 친한 사람과의 관계, 직장 절친 관계, 오래된 지인 관계 등 누구라도 한번쯤 들어보고 싶을 ‘관계의 기술’에 대한 조언이 파트3에 밀집되어 있다. 파트3이 인상적인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벗을 대하는 법 뿐 아니라 적을 다루는 법까지 조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못된 동료를 대하는 것과 못된 상사를 처리하는 방법이 다르고 은근히 싫은 사람과 대놓고 싫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다르다. 이런 관계의 디테일을 처리하는 능력이야말로 관계의 고수가 되기 위한 노하우겠지.

 

 마음, 일상, 관계 그리고 꿈. 살아가면서 단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소중한 요소들이다. 이 요소들이 온전히 합쳐져서 ‘나’를 만들어주니까. 그래서 이 요소들을 살린 한마디들이 모여서 ‘나’를 살린 한마디가 된다. 삶의 디테일을 다듬는, 그래서 삶의 커다란 맥락을 가다듬고 싶은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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