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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속이는 말들 - 낡은 말 속에는 잘못된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박홍순 지음 / 웨일북 / 2020년 6월
평점 :
'낡은 말 속에는 잘못된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이 문장에서 하나만 고치고 싶다. 낡은 말이 아니라 어떤 말로. 신조어가 쏟아지는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낡은 말 뿐 아니라 새 말에도 잘못된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 이 잘못된 생각은 인생을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한다. 말은 그래서 위험하다.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 정보의 전달, 감정의 표현 뿐 아니라 타자의 삶을 조작할 수 있는 위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술과 인문학 서적을 주로 출간한 박홍순 저자의 신간 [우리를 속이는 말들]의 머릿말은 '말의 위험성'을 정확히 지적한다.
[미술관 옆 인문학]을 읽었던 기억으로 박홍순 저자가 낯익다. 미술과 사람에 대한 통찰과 해박한 지식이 탁월한 저자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의 신간 [우리를 속이는 말들]을 읽고나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 시대에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그리고 해로운 것을 냉철하게 구별할 줄 아는 시선과 쓴소리도 가차없이 뱉을 수 있는 소신을 함께 가진 저자다.
[우리를 속이는 말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말들이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있는지를 짚어낸다. 우리의 삶을 잘못된 말들이 흔들고 있음과 더불어 이런 강제적인 왜곡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자는 저자의 전언이다.
말을 통해 생각하기에 말은 우리 생각을 조종한다. 사고와 행동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가장 큰 힘을 가진 말은 단연 상식의 이름으로 통용되는 격언과 명언이다.
5쪽 저자의 말 중에서
아무리 개인이 원해도 상식의 규칙에서 벗어나거나 변경하기 어렵다. 말은 생각과의 관계에서 권위적 위치에 있다.
그 결과 생각은 상식의 함정에 빠진다. 생각 왜곡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처음에 상식적이고 규범적인 말이 만들어질 때의 의도와 다르게, 혹은 현재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상황임에도 부당하게 적용되기도 한다. 나아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생각을 왜곡하고 조작할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심없이 무심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생각은 왜곡과 조작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정신은 길을 잃고 무력해진다.
어찌해야 하는가? 짧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속지 말자! 물론 말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덜 속는 것만으로도 삶과 생각이 더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다.
7쪽 저자의 말 중에서
[우리를 속이는 말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통념을 형성한 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인간은 다 이기적이다, 소확행을 즐겨라, 손님은 왕이다, 여성은 모성애가 있다 등등 총 12개의 상식과 유행, 속담 등을 해부했다.
정말 하나 가지고 열을 알 수 있어? 하나 가지고 하나만 알기도 어려운데. 찬물은 위아래가 아니라 필요한 사람이 먼저여야지. 세포가 이기적이라고 해서 세포의 집합체인 인간이 이기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소확행은 기업과 미디어가 조장하는 무한소비풍조이자 조작된 유행이며 대한민국에 현재 왕은 없고 손님은 손님일 뿐이다. 여성은 모성애, 남성은 부성애, 자녀 양육은 부부 공동의 일일뿐 아니라 나아가 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우리를 속이는 말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소확행을 해부한 9번 꼭지였다. 소소한 소비 그러니까 예쁜 쓰레기나 자잘한 것들 소비하면서 위로와 만족감을 느끼는 우리 세대들의 이 '소비 욕구'가 과연 자발적이고 진정한 욕구인지를 되묻는 저자의 시선은 매우 날카롭다. 철학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말을 인용하며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소비 기조가 대량소비 촉진과 욕구불만 해소를 위하여 의도되고 조작된 욕구임을 밝혀낸다. 9번 꼭지는 통으로 이 블로그에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내용이 좋다. 단순히 소확행의 허와 실을 밝혀낼 뿐 아니라 개인이 기업과 미디어에 휘둘리고 있는 현재의 위험성을 잘 설명한다. 강제적인 유행 선도와 그로의 편입은 그저 취향을 저당잡히는 문제가 아니다. 산채로 수족관에 갇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여러 측변을 고려한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적, 비판적 사고는 사라진다. 대부분의 판단과 선택이 소비를 통한 욕구 충족에 수동적으로 자동반응한다는 점에서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한다. 일차원적 사고와 행동이라는 한정된 패턴 안에서 살아간다.
한국의 소비적인 소확행 역시 하나의 바람직한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으면서 일차원적 인간을 양산하는 통로가 될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책 169쪽
한 달 안에도 몇 권씩 출간되는 인문학 서적 속에 이 책이 묻히기에는 너무 아깝다. 정말 아까운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 자신이 세상에 범람하는 온갖 말들에 속지 않도록 말이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상이나 동서양의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이런저런 인문학 책들도 물론 유익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인문학 서적은 이런 책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