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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ㅣ 별글클래식 파스텔 에디션 9
알베르 카뮈 지음, 한수민 옮김 / 별글 / 2018년 2월
평점 :
아마도 사람들은, 이런 삶의 모습이 이 도시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요컨대 우리의 모든 동시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아마도 오늘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 그 후에 개인 생활을 누리기 위해 남겨진 자유 시간에는 카페에는 카드놀이를 하거나 수다를 떨며 시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도시와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이따금 일상적이지 않은 것의 낌새를 알아채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이것 때문에 그들의 삶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단지 낌새를 알아챘을 뿐이고, 그것으로 그만큼 이득인 데 그친다. 그와 반대로 오랑은 겉으로 보기에는 낌새가 없는 도시, 다시 말해 전적으로 신식인 도시다. 그러므로 우리 도시의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힐 필요도 없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소위 성행위라고 부르는 유희를 통해 빠르게 서로를 탐닉하거나, 두 사람이 가진 오랜 습관 속에 얽매인다. 흔히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중간 상태는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중간 상태 역시, 특별하지는 않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오랑의 사람들도 늘 시간이 부족하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한다.
13쪽
늘 시간이 부족하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한다.
이 한 문장.
이 한 번의 펀치만으로,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를 시대와 국적을 초월하여 전 인류가 탐독할 수 있는 작품으로 완성했다.
70년 전에도 그랬을까? 지금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때도 그랬을까?
지금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늘 시간이 부족하고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데, 그 시절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늘 시간이 부족했을까? 시간이라는 자원은 어째서 항상 부족한 걸까? 그러고보면 시간이란 참 대단하다. 모든 인류를 빈곤하게 만들어버린다. 누구라도 시간에 가난하게 만들고, 시간에 가난한 나머지 사랑에도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 공평하고 잔인하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사랑하다 모든 세월을 소진해버리는 책임은 시간이 져야할 짐이 아니겠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는 써봐야 하는, 적어도 노력하면서 사랑해야 하는, 늘상 시간이 부족해 세월에 쫓기는 인간이 져야할 짐이겠지.
[페스트]에서 알베르 카뮈는 경고한다. 페스트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불현 듯 다시 덮칠 것이다.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사랑하는 인간들의 뒤통수를 치듯이. 그리고 그때, 우리가 페스트를 벗어날 유일한 힘은 사랑일 것이다. 오랑시에서 파편처럼 살아가던 사람들이 페스트 속에서 서로 엉겨 점이 되고 선이 되고 면이 되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