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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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는지, 나는 답을 구하고 있었다. ? 왜 전쟁을 지옥이라 하는가?

전쟁의 실상을 다룬 기록이나 영상들을 수없이 만나면서 나는 늘 궁금했다. 어째서 저것을 지옥이라 부르는가? 내 손으로 살려낸 사람들을 내 손으로 사지로 내몰아야 하는 일이나 선한 눈의 소년이 타인의 목을 무참히 베어내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 우리가 흔히 전장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고 떠올리는 모든 일, 상상을 넘어서는 잔인하고 처절한 일들이 전쟁이 지배하는 영토 내에서 일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들은 지금 우리의 안온한 일상 가운데서도 벌어지니까. 사는 게 전쟁이라던 어른들의 혼잣말을 내 입에 물려 받은 지금은 전쟁이 어디 꼭 멀리서 벌어지는 게 아니구나 하며 산다.

하지만 진짜 전쟁. 생존의 사투를 벌이는 일상을 비유하는 그런 전쟁 말고 피와 뼈와 살점이 문자 그대로 도륙되는 진짜 전쟁이 유독 지옥이라는 단어와 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처에 넘쳐나다 못해 이제는 신물이 나는 고통과 유린과 말살 때문일까?

도리고의 생애를 직조하는 기억을 따라가며, 나는 그 긴 여정에서 어디서든 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바랐다. 밀림의 압도적인 어둠 속에서도 삶은 도리고에게 진홍색 꽃 한 송이를 발견하게 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저자가 어떤 힌트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길고 사실적이고 어쩌다 지루하기도 하고 또 어쩌다는 손에서 뗄 수 없게 만들기도 하는 이 책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남자의 생의 궤적을 그렸다. 이야기는 전쟁의 전과 후라는 평면적이고 단순한, 선의 흐름을 타지 않는다. 불현 듯 날아온 자갈을 맞은 자동차 앞유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은 거미줄처럼 미세하고 절대적인 형태로 완전히 부서지듯, 도리고의 생이 그랬다.

 

전쟁이 인격을 얼마나 철저하게 말살하는지 고발하는 작품은 많다. 그 파괴적인 악랄함을 목도하게 만드는 작품들과 대조하면 이 작품은 무언가 조금 다르다. 도리고의 기억을 오가며 세밀하고 때로는 냉철하게 묘사하며 전개하는 흐름은 전쟁을 내 안으로, 나를 전쟁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나로 하여금 전쟁을 관찰하는 혹은 목도하는 데에서 벗어나 어딘가 기묘한 위치로 들어가게 만든다. 그래서 도리고가 전쟁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 수많은 악인들의 생각의 파편과 그들 기억의 내밀한 조각들이 낱낱이 내 것처럼 다가온다. 고타의 일본에 대한 긍지는 얼마나 대단하고 고결한가. 나카무라가 자신도, 모든 일본인 그리고 일본 자체도 전쟁의 피해자라고 마음 속 깊이 품었던 그 신념은 또 얼마나 견고한가. 그러니 그들 스스로 옳다 여기며 목숨보다 질기게 부여잡았던 그들의 신념, 그들의 목표가 결국 그들의 생애 전체를 전쟁으로,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차피 모든 것이 결국은,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굴러간다.’

 

내 기억에 채 담지도 못하고 흘려보낸 수많은 비극을 모두 거치고 도리고의 임종을 함께 맞을 때에, 나는 발견했다. 도리고가 희망도 기쁨도 이해도 없이, 북 뜯겨져 나간 로맨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앞에서 망연자실한 순간에, 그가 에이미의 소식을 듣고 지옥 속에 살게 될 것이라 예감하는 시간에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지옥,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전쟁은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내 몸이 가는 모든 공간에서 끝이 없는 세계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지옥인 가장 정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든, 포로였든지 영웅이었든지 무의미하다. 전쟁은 화인처럼 지옥의 올무가 되어 남을 뿐이다.

도리고가 그의 임종에서 비로소 동전을 입에 물고 허공으로 변해갈 때, 그 자신이야 싫든 좋든 한 생애가 끝났다. 그리고 카론은 그를 또 다른 시작, 저승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과연 거기서 도리고는 전쟁이라는 지옥의 올무에서, 그 영원히 끝이 없는 원의 세계에서 벗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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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굴러간다.’ - 본문인용, 페이지 15

그것은 끝이 없는 세계였다.’ - 본문인용, 페이지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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