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내 아버지를 참 미워했었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까지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대화도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의 무뚝뚝한 아저씨였다. 나는 일평생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확신했기에 마음껏 아버지를 미워하고 비난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같은 인생을 살지도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공격적인 무언과 경멸의 눈빛으로 아버지에게 시위했다.

나중에, 나중에. 20대 중반이 넘어서 세상을 몸으로 배우게 되고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측은하고 지질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그때서야 나는 내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는, 철없던 내가 지녔던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나는 내가 걸어온 저 궤적, 아버지를 미워하다 뒤늦게 이해한 후에 철없던 시절을 뉘우치는 저 과정을 낱낱이 그린 타인의 이야기를 읽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할 수는 있겠지만, 이토록 폐부를 찌르고 나조차 잠시 잊었던 내 무형의 감정들을 선명하게 담아낸 이야기가 있을 줄 몰랐다.

 

다니구치 지로가 1994년에 발표한 작품 [아버지]는 소설이나 영화 혹은 드라마가 주는 울림과는 다른, 훨씬 깊고 진득한 여운과 감상을 준다. 사람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담긴 이야기는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혹은 몸짓)과 담담하고 침착한 대사의 조화 위에서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하는 주인공의 결정적인 사건 혹은 미묘한 순간을 붙잡아 그림으로 옮기고 카타르시스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한 대사로 독자와 교감한다.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십수년 만에 고향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와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기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을 찾아가지 않았던 주인공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 땅을 밟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이 그에게 남긴 상처와 허무 그리고 오해를 차근차근 되짚어 가는 회상과 고향이라는 공간이 주는 아련한 정취가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흘러간다.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창조한 작품들의 힘은 세밀한 관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한 묘사다. 그의 묘사는 단순히 시각적인 풍경을 잘 그린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풍경과 대사로 독자의 마음 깊숙이 작품의 분위기를 전이시킨다. 강렬한 자극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음에도 독자는 쉽게 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곤 고독함을 느꼈던 청소년기의 주인공이 홀로 조깅을 하는 아침 풍경, 엄마를 잃는다는 두려움에 내달렸던 거리,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심경 속에 마주한 장례식장 등 주인공의 정서를 함께 따라 마치 나의 기억을 더듬어 가듯, 읽어가듯 작품을 보게 된다.

 

작품의 중간 중간, 나는 참 많이 울었다. 20여 년 전의 작품인데도, 이 작품을 그린 작가는 내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도, 내 일기장의 기록을 그린 것 같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나는 펑펑 울며 페이지를 넘겨갔다. 이토록 깊은 흡인력은 이미 대가 혹은 명장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다니구치 지로의 빼어난 그림과 묵직한 스토리텔링이 결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른 만화만의 강력한 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만화는 독자의 시간을 가뿐하게 사로잡는다. 하지만 독자가 느끼는 감동까지 가볍다고 추측한다면 오해다. 다니구치 지로의 작품 특히 이 작품 [아버지]는 결말에 이르러, 분초에 따라 흘러가는 영상이나 활자에 감상을 고정해둔 글자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감동을 남긴다.

 

아침 안개가 풀잎을 적시듯, 아버지의 마음을 고요히 스며들 듯 느끼게 하는 이 책의 뒷표지에는 박인하 교수의 추천사가 이렇게 실려 있다.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또 아버지가 될 남성들에게 원한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더하고 싶다. ‘또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모든 자녀들, 아버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니가 없어진 후로 로코를 돌본 게 누군지 아나? 니 아부지였다.
와 그랬는지 아나? 니가 언제 돌아오더라도 기뻐할 수 있게 해주려고 했던 기라."

외삼촌의 그 한마디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다. 어두운 창고, 외삼촌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술은 살아있는 기라 항상 신경써서 돌봐줘야 하는기라. 누룩방이나 술독 벽 같은 데도 잘 살펴보고 말이다. 니가 정성을 들여서 말을 걸어주면 술도 화답해서 좋은 술이 되는 기다.
22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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