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앤 허니 - 여자가 살지 못하는 곳에선 아무도 살지 못한다
루피 카우르 지음, 황소연 옮김 / 천문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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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은 부끄러운 일인가.

이 문장은 내가 월경을 시작하던 그 해로부터 오늘날까지 내내 홀로 고민해 온 문제이다.

과연 월경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성들 사이에서조차 월경을 입에 올릴 때 목소리를 낮추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직원 하나는 어제 나에게 생리대가 있냐고 물었다. 옆에 온 줄도 모르도록 살며시 다가온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생리대 한 장을 건내며 생각했다. 왜 우리는 생리대의 소지 여부를 이토록 은밀하게 확인해야 할까? ‘혹시 양말이나 스타킹 남는 거 있어?’였다면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어도 개의치 않을 텐데 말이다.

 

나는 내 몸의 월경에 대해 숨겨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월경을 시작하면서도 그랬고 청소년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손톱이 자라는 것처럼, 살이 쪘다 혹은 빠졌다 하는 것처럼 월경 역시도 내 몸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변화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월경에 대한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지는 않는다. 내 입에 올리는 게 부끄러워서? 아니, 상대가 민망해 하니까. 대변, 소변, 방귀 등의 생리 현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은유나 비유를 사용하는 것도 같은 차원이지 않을까? 그래서 오줌 싸러 갔다 올게화장실 갔다 올게로 대신하지 않나. ‘나 자신의 인식이 어떠한가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상대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차원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대화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면 나 역시 불편해져 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또 여기서 의문이 든다. 재채기를 하거나 자는 것도 모두 생리 현상이고 이런 현상들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은 공공연하게 하는데도 어째서 월경은 노골적인 표현이 민망한 생리 현상으로 인식될까? 이런 탓에 월경에 대한 저 논제는 여전히 내 안에서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물음표를 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여성주의는 정말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데이트 비용 부담 비율이나 여성취업률 같은 수치를 근거로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시집 [밀크앤허니]를 쓴 루피 카우르는 너무나 용감하게도 월경은 부끄러운 일인가의 논제를 공론화했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월경혈 사진을 올렸다가 두 차례나 삭제 당하자 인스타그램에 항의하고 다시 사진을 게시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내 월경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불경한 짓이었겠지

내 몸의 실제 생리 현상이

너무 실감나게 다가왔을 테니까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걸

파는 건 괜찮지만

여자의 두 다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함구하란 말인가

 

이 몸을 오락거리로 삼을 때는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본질은

추하다고 하는 세상

- [밀크앤허니] ‘그런 치유중에 수록

 

월경을 생리 현상에 속하는 범주로 보고, 생리 현상을 드러내는 일을 피하는 차원에서 월경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을 피하는 것은 점잖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내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리 현상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떠들고 다니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점잖기 위하여 표현을 달리 하는 일과 불경하기 때문에 외면하는 것은 아주 성격이 다른 일이다. 루피 카우르가 인스타에 올린 월경혈 사진이 두 번이나 강제로 삭제 조치 당한 것은 상품으로서의 여성성은 수용할 수 있어도 본질적인 여성성은 외면하는 현재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오락거리로 삼을 때는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 본질은 추하다고 하는 세상이라는 말은 여성에 대한 (여전히) 이중적인 잣대를 잘 꼬집고 있다.

 

시집 [밀크앤허니]는 인도 펀자브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란 여성 예술가 루피 카우르가 쓴 시를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루피 카우르가 여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겪은 폭력과 그 폭력이 남긴 상처 그리고 그 상처들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느꼈던 단상들이 담겨있다. 루피 카우르는 이 책을 자가출판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집이 입소문을 타면서 출간 2년 만에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한다. 초라하게 시작한 이 시집의 엄청난 판매고는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루피 카우르와 공감했다는 걸 방증한다. 사랑이라는 허울을 쓴 아버지 혹은 연인의 폭력, 아버지의 폭력과 통제 아래 무력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 세상의 모든 여성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 그리고 여성다운 여성이자 사람다운 사람으로서 살기 위한 태도 등 이 작은 시집 속에는 지구촌에 현존하는 여성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글귀들이 실려 있다.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시가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게시되는 짧은 글귀와 쉬운 단어로 썼기 때문에, 루피 카우르의 시는 그래서 더 쉽게 독자와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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