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보수주의자다.

한 때는 부분적 진보주의자라거나 수정주의자라거나 여러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겠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보수주의자라고 이야기하면 종이가 변색되고 활자가 세로로 떨어지는 옛날 책을 보는 것처럼 나를 아주 기이하고 생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애가 왜 그렇게 꽉 막혔어?’라는 소리 없는 비난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전통이란 보존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이고, 남과 여가 하나가 되어 이루는 가족이란 단위는 절대 흔들려서도 도전 받아서도 안 되는, 사회의 세포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때로 같은 진영의 다른 보수주의자들에게 분노하기도 한다. 전통이란 현재와 닿아 있지 않으면 전통이라고 불릴 수 없다. 현재가 있기에 전통이 있는 것이다. 현재와 이어져 있지 않은 전통은 과거의 잔재일 뿐 그것은 역사도, 가치도 아니다. 과거의 잔재가 현재를 괴롭게 한다면 마땅히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는 게 옳지 않은가?

 

이때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의문들을 만난다. 과연 무엇을 전통이라고 하고 무엇을 청산해야 하는 관습이라고 분류할 것인가? 분류의 기준은 무엇인가? 절대 도전받아서도, 흔들려서도 안 되는 가치가 과연 있는가? 그런 가치는 어떤 것이며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옛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새것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현재의 가치관과 부딪혀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관습은 청산해야 하겠지만, 새로운 질서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폄하하고 인간의 본능인 관계를 방해한다면 그것을 도입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지는 신중하게 생각해볼 문제다.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각 꼭지마다, 페이지마다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다. 저자는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썼고, 보수주의자인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저자가 보수주의에 대하여 쓴 모든 부분에 공감해서가 아니다. 보수주의가 소위 비판받는 단순한 꼴통이 아니라는 것을 세밀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족, 종교, 노동, 정치, 학교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과 구성 단위 그리고 구조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자의 시각으로 꼼꼼히 바라본다. 현상을 분석하고 사건의 발생과 결과를 설명하면서, 진보의 바람에 휩쓸려 자칫 상실하게 되는 중요한 유산들(평화, 자유, 질서, 공공심 등)은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하며 그를 위하여 보수주의가 존재한다고 강변한다.

 

나는 변화를 좋아한다. 하지만 새로움을 쉽게 선택하지는 않는다. 진보적인 것, 발전적인 것을 좋아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기존의 것들 중에 아주 중추적인 부분들,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소중한 부분들이 흔들리고 도전받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다. 변화와 질서의 공존이나 전통과 개혁의 교집합이라는,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영역으로 나는 나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합리적 보수는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 나에게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을 것 같다.

 

덧붙이자면, 이 책의 저자(비록 노동계급일지라도 영국의 백인 남성이다)가 제시한 가치 판단과 행위들이 합리적 보수의 표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저자의 사상 중 이상적인 보수주의라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부분은 분명히 있다.

 

보수주의는 모든 성숙한 사람들이 선뜻 공감할 수 있는 생각, 즉 훌륭한 유산은 쉽사리 파괴되지만 쉽사리 창조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특히 우리에게 공동의 자산으로 주어지는 훌륭한 유산, 즉 평화, 자유, , 공손함, 공공심, 재산 및 가정생활의 보장 등에 적용되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을 누리려면 우리는 타인의 협조에 기댈 수밖에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무엇 하나 누릴 수 없다. 훌륭한 유산을 파괴하는 작업은 빠르고 수월하고 신나지만, 창조하는 작업은 느리고 힘들고 지루하다. 이것은 20세기의 교훈 가운데 하나다.

6쪽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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