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독한 오후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커피를 마시다가 아니면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그런 순간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거기서 내가 그런 말을 했어야, 혹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때 그 순간에 내가 네 손을 말없이 잡았어야, 혹은 놓았어야 했나.

내가 아무 준비 없이 마주한 뒤 순식간에 놓아버려야 했던, 의미 없는 일상이라고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고 여겼던 그런 순간들이 실은 아주 결정적인 한 때 였다는 걸 깨닫고 마음이 내려앉는다.

흘러가도록 무심하게 지켜보았던 순간들이 실은 그렇게 무심하게 굴면 안되는 순간들이었다고, 시간이 말해주는 그런 때마다 후회나 분노 어쩌면 두려움 같은 것들이 선명해진다.

대부분 그런 순간들은 나의 혹은 상대의 진심이 드러나는 때다. 그런 순간을 그 당시에 알아채지 못했던 건 그게 진심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왜냐면 나에게 혹은 상대가 간직했던 진심이 그런 얼굴, 그런 말일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리안 모리아티의 작품이 흡인력을 갖는 건 그런 순간들을 예리하게 포착해 보여주기 때문일터다. 모리아티는 작품 속 등장인물 중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각자의 의식과 감정의 파도를 촘촘하게 늘어뜨리다 서로의 인식 혹은 감정이 맞닦드리는 그 순간을 민첩하게 엮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엮인 그물 속에 독자는 기꺼이 낚이게 되는 것이고.

 

6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이지만 저자는 처음부터 호기심 많은 독자가 덥썩 물 미끼들을 충실하게 던지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3쌍의 부부들이 함께 벌인 바비큐 파티라는 '그 날' 즉 과거와 그 이후 혼란과 후회 그리고 분노 속에서 갈등하는 현재의 시간이 촘촘하게 교차된다.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에서 출발한 나의 궁금증은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서 '도대체 이 사람들, 서로의 진심은 대체 뭐야?'로 전환되었다. 사건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아, 결국 나는 이 책의 마지막까지 쉼없이 읽어갔다. 직업이나 삶의 모습, 형편 등 겉으로는 이상적이고 평온해보이는 호주 중산층의 삶은 매우 피곤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호주 중산층만의 일이랴. 어릴 때부터 삼십대인 지금까지 서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여기는, 그리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보는 클레멘타인과 에리카의 사이는 뭐라고 한 가지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다. 친구일까, 적일까.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감정은 적의인가, 호의인가. 어쩌면 그 둘은 서로를 질투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서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일까. 저자의 성실하고 짜임새 있는 전개와 문장, 묘사 덕분에 저런 의문들은 클레멘타인과 에리카 사이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관계를 바라볼 때마다 바쁘게 떠올랐다. 제일 흥미로운 인물이었던 해리. 그가 그의 이웃에게 가졌던 감정은 분노인가, 질투인가 아니면 그리움, 그것도 아니면 두려움인가.

 

모든 감정은 한 가지 얼굴을 하지 않는다. 애정에는 질투와 두려움, 분노가 그림자처럼 함께 다니고 분노에는 공포와 애착 등의 감정들이 어깨를 같이 한다. 단지 한 가지 감정에 매몰된 내가 혹은 우리들이 그 복잡다양한 얼굴과 표정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사람이란 안팎으로 얼마나 많은 표정과 얼굴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오랜만에 사람이 궁금해지는 마음으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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