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섹시해지는 인문학 지도 - 막힘없는 상식을 위한 14개의 교양 노선도
뤼크 드 브라방데르.안 미콜라이자크 지음,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뇌섹녀니 뇌섹남이니, 이젠 뇌까지 섹시해야 하는 세상이구나.

몸도, 얼굴도 섹시하지 못하면 머리라도 섹시해야 된다는 어떤 강요 같아서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나아가 몸도, 얼굴도 그리고 머리까지 섹시해야 사람 취급 받는 세상이라는 걸 알려주는 지표 같아서 씁쓸하다. 셋 중에 하나도 힘든 사람은 어쩌라는 말? 그래도 몸이건 얼굴이건 섹시해지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비해 뇌가 섹시해지는 데에 드는 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나마 좀 다행이라 해야 하는가?

 (하지만 이건 단순히, 뇌가 섹시하다는 수준에 대한 내 기준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뇌가 섹시해지는 데에 드는 비용은 몸이나 얼굴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섹시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일 수 있다. 내가 모를 뿐이겠지.)

 

'섹시'라는 단어에 사로 잡혀서 헛소리가 좀 길었는데. 이 책은 서양 철학사의 흐름과 계보를 지하철노선처럼 정리한, 참신한 시도를 했다. 두 명의 저자는 서울 지하도처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철학자들과 이론들을 열 네 개의 노선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이 책을 대학에서 교재로 쓰는 그런 서적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막힘없는 상식을 위한 14개의 교양 노선도'다. 상식과 교양이라는 수준에 철학의 계보를 정리했단 뜻이다.

노선명은 꽤 재미나다. 철학, 심리학, 인식론, 윤리학 등등 일반적으로 쉽게 연상 가능한 노선명도 있지만 기술, 미래학, 유머 같이 꽤 흥미로운 노선명도 있다. 두 저자는 지식열차에 독자를 태우고 그들의 경의와 유머를 가듬 담은 14개 호선을 따라 수많은 역을 지난다.

  여기서 역은 철학자다. 플라톤, 마르크스, 헤겔, 데카르트 등 낯익은 역들도 많지만 프레게, 카너먼, 앵포뒥 같이 생소한 역들도 많다. 나의 경우에는 생소한 역이 매우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좀더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대해 얕은 지식이라도 있었다면 이 책이 훨씬 재미있었으리라는 아쉬움에 내내 시달렸다. 저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다루려는 영역 외의 인물인 공자나 채플린 등의 인물까지도 철학계보 전반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위하여 역에 포함시켰다. 노선명 즉 주제에 따라 철학자들을 배열했기에, 이 주제와 저 주제가 접점을 이루거나 혹은 한 철학자가 여러 주제에 정통한 경우가 있기에 지식열차에는 환승역이 꽤 여러군데가 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베이컨 등은 많은 노선이 한 곳에서 만나는 유명한 환승역이고 러셀, 칸트, 헤겔 등의 환승역도 노선의 주요 위치에서 자주 만난다.

 

책 맨 뒤에 전체 노선도를 실어 두었는데, 여기서 두 저자가 이 책을 위하여 들인 노력이 정수를 보는 느낌이었다. 철학사를 이렇게 집대성해보겠다는 집념이 없었다면 이렇게 못했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안타깝지만, 나는 뇌섹해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절학자들이나 이론가, 인물들의 절반 이상은 알아야 책이 재미있게 읽힐 것이다. 책 뒤에 부록처럼 인명 설명꼭지를 실어두긴 했지만 이 책에 낯선 인물들이 하나하나 등장할 때마다 따로 찾아보면서 읽어나가는 건 좀 흥이 깬다.

언젠가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막힘없는 상식과 교양 속에서 행복해하며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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