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아주 가까운 사이는 본래 아주 사소한 이유로 부서진다.

 

가족이란 세상 어느 누구도 어떤 단체도 줄 수 없는 소속감과 안도감,무한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오해와 어긋남을 시작으로 관계가 부서지는 위험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상실과 불안과 상처는 대부분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먼저 시작된다. 인간이 최초로 관계를 학습하는 공간이기에 가족이란 때로 그 자체가 가혹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에는 너무나 많은 상처들이 곪아 있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1977, 미국 오하이오 주의 작은 마을은 평화로워 보였다. 제임스와 메릴린의 첫째 네스는 하버드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둘째 리디아는 요란한 사춘기도 없이 명랑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사람들의 시선 밖에 머무는 막내 한나 역시 아무 고민이 없는 어린 아이처럼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고요 속에, 평범했던 어느 아침에 둘째 리디아가 사라졌다. 연락도 되지 않고 행적도 묘연해진 둘째 딸을 찾는 동안 부모는 리디아가 창틀에 앉아 전화로 수다를 떨던 아이들에게 리디아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리디아를 낯설어 했다. 그 아이들은 리디아의 친구가 아니라고. 부모가 가장 아끼던 자녀인 리디아가 사라지자 가족의 모든 것이 통째로 멈추었다. 아빠는 출근을 하지 않았고 아이들도 학교를 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도 그들은 그릇을 내려다보며 리디아의 소식을 기다리다 흩어지곤 했다. 그렇게 그들이 마음 졸이며 기다리던 리디아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고 그때부터 제임스, 메릴린, 네스, 한나 그리고 리디아가 이 가정 안에서 각자 보고 듣고 말했던 모든 일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리디아는 왜 죽었나?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주목한 건 이 물음이었다. 사고였을까? 아니면 고의적인 살해? 그것도 아니면 자살?

그러나 이야기가 흘러가는 대로 차근차근 따라가다보면 물음이 바뀐다.

이 가정은 치유받을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노골적인 차별이 당연한 시대였다. 여성은 기술수업이 아닌 가정수업을 들어야했고 아시안은 하버드 교수 임용에서 제외되는 시대가 그 시대였다. 하필 그런 시대에 여성인 메릴린과 중국인 제임스라는, 온 생애 내내 차별에 저항해야 했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가정을 꾸리게 된 건 비극이었나. 두 사람이 그들이 이겨 내야만 하는 차별의 무게 앞에서 도망쳐 서로 다른 길로 갔다면 이 모든 상처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뛰어난 물리학도였던 메릴린이 갑작스런 임신과 출산으로 꿈을 이루지 못한 탓에 평생동안 트라우마를 겪는 일과 리디아에게 강압적으로 훈육하게 되는 일도 없고, 부모가 리디아를 편애한다고 느낀 네스와 한나가 소외감과 박탈감으로 쓰라린 유년기를 보내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라는 가정은 너무나 바보같은 것이라고 평소 늘 생각해왔지만, 리디아가 살아 있을 적의 시간들을 돌이켜 되새기는 이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부질없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작가는 제임스와 메릴린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개개인이 간직한 상처들을 촘촘하게 전개한다. 독자는 이 가족이 겪은 30년의 시간을 따라가 각자가 어떤 관계에서 어떻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관찰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안쓰럽지 않은 사람도 없다. 모든 비극은 누구도 일부러 만들지 않았지만 누구도 책임이 없지 않다. 죽은 리디아 본인 조차도.

 

정말 이 가정에..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 치유의 길은 없나, 싶을 즈음에 작가는 고맙게도 각자의 상처에 빨간 약을 발라준다. 메릴린이 한나를 껴안고 제임스는 가정으로 돌아오고 잭과 네스는, 아마도 화해를 할 것이다. 상처에 바르는 빨간 약은 약 색깔 때문에 얼핏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낫고 있는 것이다. 요란한 빨간 약은, 고요한 내부의 상처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 이야기의 끝으로 갈수록 가족들은 저마다 격앙되고 흥분해서 요란한 일들을 저지르지만 그건 그들의 내면에 깊이 가라앉은 오래된 상처들이 치유되는 과정인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란,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할 수가 없어서 였다.

말로 할 수 없어서, 말로 하지 않아도 말없이 알아주던 것들이었다.

가족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 가족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았지만, 알아주는 일.

 

오늘 나의 가족들은 그리고 나 자신은, 가족들 서로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혹시 내가, 누군가 말하지 않는 일들을 하나도 듣지 못하고 무심히 흘려 보내지 않았을까.

 

 

 

어젯밤에 네가 자러 간 뒤에 점검해봤거든. 23번이 틀렸던데, ?”

메릴린이 말했다.

5년 전에는, 1년 전에는, 심지어 6개월 전만 해도 리디아는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오빠의 눈에서 연민을 봤다. 나도 알아. 나도 알아. 단 한 번의 깜빡임으로도 리디아의 시정을 알아차렸고 위로해줬다. 하지만 그때 오빠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 푹 빠져 있었다. 꽉 쥔 리디아의 손가락도 갑자기 붉어진 리디아의 눈가도 오빠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의 미래를 꿈꾸느라 리디아가 말하지 않는 일들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네스는 리디아의 마음속 소리를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뒤부터 리디아는 친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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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는 여전히 잭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고 리디아는 이제 완전히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나에게 그 순간은 번뜩이는 번갯불처럼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해줬다. 오랫동안 갈망해온 탓에 한나는 그런 일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굶은 강아지가 음식 냄새를 맡으면 갑자기 콧구멍을 실룩거리는 것처럼 말이다. 한나는 잘못 알 수가 없었다. 한나는 그 즉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사랑, 한쪽에서는 계속 상대를 향해 날리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없는 깊은 흠모. 돌려받지 못해도 상관없이 어쨌든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는 조심스럽고 조용한 사랑. 한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사랑이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한나의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밖으로 뻗어나와 숄처럼 잭을 감쌌지만, 잭은 눈치 채지 못했다. 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 멀리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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