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개의 단편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각 단편에서 각각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사는 지역은 같다. 오이타의 작은 바닷가 마을. <9년 전의 기도>는 세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일 것 같은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저자 오노 마사쓰구는 자신이 오이타 현의 사이키 시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역자는 이 단편들이 연작이라고 했다.)

 

한밤중에 혼자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풍경을 본 사람, 그 소리를 듣고 그 거역할 수 없는 무게에 설득당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은 안다.

짙은 남색 파도가 한없이 한없이 밀려올 때의 암담함, 쓸려 나가는 모래의 소리를 들으며 슬픔인지 허전함인지 그런 것에 빠져 마냥 앉아있게만 되는 것이다. 한낮에 찬란하게 빛나던 바다의 하얀 포말은 수평선 어딘가로 간 곳이 없고, 그저 이대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지 바로 흐르는지도 모르겠는 그런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한밤의 바다에서 혼자 파도를 마주할 때.

 

아들 캐빈의 발작을 겪으며 피곤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이 여자(사나에)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면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무게의 그 느낌을 상기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어떻게 해도 파도는 계속 밀려올 것이다. 이 파도를 멈출 수 있는 스위치 따윈 없다. 밀려 오고 밀려 오고, 계속 밀려 오고. 사람들의 시선과 막막한 앞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아들의 병. 그래서 사나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줄기 어딘가, 끈질기게 사나에가 붙잡고 있던 위로가 있었다. 9년 전, 함께 여행을 갔던 밋짱 언니.

남들과 다른 아들을 키우며 남몰래 많은 눈물을 흘렸던 그 언니(실상은 아주머니)가 교회에 앉아 기도하던 풍경이 사나에의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사나에는 현재와 기억을 오가며 자신의 모습과 밋짱 언니의 처지를 비교하기도, 때로는 자신이 밋짱 언니인 듯 동일시하기도 한다. <9년 전의 기도>9년 전, 사나에가 밋짱 언니 등과 함께 캐나다로 여행을 갔던 시절과 현재 동거인과 헤어지고 아들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을 교차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 된건지, 잘못 짠 니트의 코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듯 사나에는 기억과 현재를 오간다. 향기로운 술처럼 발효된 사랑인줄 알았건만 그녀가 보낸 시간들은 발효가 아닌 '부패'였다. 그녀 스스로 이토록 혹독하게 과거를 평가하는 동안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신경질과 독만 잔뜩 올라가는 딸 옆에서 그녀의 늙은 부모는 무기력하다.

사나에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 섬을 찾아간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가 탈출한 것은 은 끝없이 현실에 갇혀 절망을 반복하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였다. 그리고 그녀의 탈출을 도운 것은 인자와 평안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밋짱 언니. 아니, 밋짱 언니의 모습을 한 '삶의 의지'라고 해야 할까. 아들을 위한 기도였는지 자신을 위한 기도였는지 알 수 없지만, 시간이 멈춘 듯 간절하게 기도하던 밋짱 언니의 모습은 구원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현실의 상처에 버둥거리는 사나에의 중심에 그리고 그런 그녀가 해방과 구원을 찾아가는 이야기의 중심에 기도하는 밋짱언니의 모습을 한 '삶의 의지'가 있다.

저자는 삶의 죽음의 기로에 선 사나에에게 '손을 놓으면 안돼'라는 삶의 의지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교회 안에서 기도하던 밋짱 언니의 등 뒤로 슬픔이 서 있던 것을 느꼈던 사나에는 이제 자신의 등 뒤에도 그 슬픔이 어깨를 어루 만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사나에는 이제 담담히 그 슬픔을 인정하고 아들의 두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슬픔이 그 슬픔의 무게를 미안해하고 인간을 위로하는 이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부분 때문에 이 작품 <9년 전의 기도>는 인간의 의지를 다룬 다른 작품과 차별된다. 파도를 거역하라고, 파도에 맞서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어깨를 주무르며 이제 일어나자고 위로하는 느낌이다.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않고 다만 모두가 자신의 슬픔가 함께 담담하게 살고 있으니 '손을 놓지 말자'고 부드럽게 손을 잡는 저자 오노 마사쓰구의 메시지가 고마울 정도로 멋진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