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성들의 지위 혹은 여성이 받는 사회적 대우가 높아졌다는 게 아니다. 글자 그대로 여성 시각의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최근 한국 포털사이트에서 자주 보게 되는 성논쟁이 난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단 하나의 긍정적 방증, 이만큼 여성들이 자기주장을 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걸 그나마 위로라고 삼는 것이 씁쓸하긴 하다.)

어릴 시절 명절마다 엄마를 비롯한 여성들만 부엌에서 복닥거리며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하루 종일 음식 준비를 하는 것이 이상했다. 남동생과 같이 놀다가도 나만 할머니께 불려 들어가 꼬지를 만들어야 하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들과 이하 남성인 사촌들에게 어떤 불만을 표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엄마에게 칭얼대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왜 동생(남자아이)은 이거 안 하고 나만 해?’ ‘다 배워두면 좋은 거야.’ 여자는 이런 거 할 줄 알아야 하는 거라는 대답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올해 초, 우리집 구정 제사 때는 온 가족이 명절음식 준비를 함께 했다. 단편적이지만 이것이 지난 이십년에 걸친 우리 가족(부모님과 나와 동생)의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명료한 증거가 아닌가 싶다.

 

지난 이십년 동안 분명 한국 사회는 변했다. 아마 그 이전 이십년 아니 백 년 동안에도 한국은 계속 변해왔을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변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직, 변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 이제까지 변화되어 온 것보다 앞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다. 이 점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페미니스트]를 아주 재미있게 읽게 될 것이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는 자신은 엄격한 페미니스트의 기준(솔직히 이건 대체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다.)에서 어긋나지만 그래도 아예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것보다 조금 덜 엄격한 페미니스트 즉 나쁜 페미니스트라도 되는 편이 낫다고 썼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의 자격 여부를 핑크를 싫어하고 출산과 육아를 혐오하는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답다는 기준과 제도가 얼마나 폭력적이었으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말이 안 통하고 예민한 여자들에게 어울릴 법한 단어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사회적인 이슈, 대중 문화(음악과 영화, 방송 프로그램 전반)를 두루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솔직하면서도 예리하다.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소유물로 보는 시선에 기반한 수많은 팝가사들, 강간과 학대를 오직 남성 위주의 흥밋거리로만 전락시키는 영화와 드라마들. 그러나 그런 대중문화를 저자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즐기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나 역시 저자와 같으니까. 여성을 무가치하게 소비하는 한국영화들에 열광하기도 하고 맨정신으로는 욕이 나올 가사를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기도 한다. 저자와 나의 동질감에서 시작된 유대. 그 위에서 우리는 굵직한 사회적인 이슈들(테러사건, 인종차별, 낙태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시선으로 교감한다. 40대 미국 여성과 30대 한국 여성은 분명 피부색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과 현재의 환경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데도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끈끈한 공감대가 생긴다. 여성문제는 그만큼 세계 전반에서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게 많은 숙제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 도서라고 부르고는 싶지 않다. 이 책은 성차별을 비롯한 인종차별, 동성애차별 등 저자가 체험한 혹은 목도한 수많은 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페미니즘과 인종차별 혹은 동성애는 엄연히 다른 논제다. 저자는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여성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차별에 대해 논하고 있을 뿐.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페미니즘 도서라기보다는, 저자가 페미니스트인 책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저자가 머리글에서 쓴 대로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진심이 이 책의 분류가 되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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