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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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미있다!

 

앞표지가 주는 음산한 느낌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손에 들고 소녀의 얼굴 생김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녀가 움직일 것 같다.

책 뒤표지에 '상상을 초월하는 사이코 미스터리'라고 소개했는데 이 책에 아주 어울리는 표현이다.

 

3월과 다르게, 부쩍 따듯해진 햇빛을 받고 내 집 앞 공원에는 봄꽃이 만개했다. 공기마저 '지금은 화사한 봄'이라고, 미스터리소설에 몰입이 될만한 계절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오후에 나는 이 책을 폈다. 약속 때문에 시내로 나가기 전에 잠시 짬이 나서 책 앞 부분만 조금 읽어보자고, 시작은 그랬다. 그런데 두 시간 후에 나는 약속에 늦었고 지하철 안에서 지인에게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빨리 결말을 보고 싶어서. 이삼일 동안 천천히 읽자고 생각했던 이 책을, 나는 책이 도착한 그 날 다 읽어버렸다.

 

이 책이 나를 끌어당긴 가장 강력한 힘은 '일상성'이었다. 주인공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의 일상. 그 부분에서 주인공이 겪는 혼란이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된다. 나도 내 옆집에, 윗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 어쩌다 계단에서 마주치면 친절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긴 하지만 그뿐이다. 더 멀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가가지도 않는다. 어느 날, 윗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낯선 남자와 계단에서 마주 섰다. '이 건물에는 여성 혹은 노년의 부부만 사는 줄 알았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공포, 위협 이런 것들이 속에서 올라왔다. 화들짝 놀란 나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는 계단을 내려갔고 나는 나중에 엄마에게 '위층에 살던 부부가 이사가고 어제 누가 새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안심했다. ~ 그랬어?

 

그런데 여기, 바로 이 심리가 참 기묘하다. 나는 왜? 안심을 했는가?

 

저자는 이 미묘한 간극을 파고 든다. '누가 새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이 위층에 젊은 남자가 이사를 왔다는 내용이 될 수는 없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 어디에도, 위층에 내 또래의 젊은 남자가 이사왔다는 정보는 없다. 그런데도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새로 이사를 들어온 사람 = 내가 어제 계단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 라고 연상해버렸다. 그 남자가 위층에 새로 이사를 들어온 남자라는 어떤 정황도 증거도 없는 상태였는데? 이런 잘못된 연상이 그저 이웃간 사소한 오해나 나만 아는 헤프닝으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성급한 연상 혹은 인식의 오류가 미끼가 되어 나는 사건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크리피]가 잘 쓴, 좋은 소설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이 때문이다. 범죄심리학 교수인 주인공의 눈으로 사건을 따라가면서 저자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연상과 인식의 오류를 보여준다. 가끔 인사를 나누는, 세련된 인상의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웃 사람들. 그러나 그들 중 누군가는 희생자가 되고 누군가는 범인이다. 이 책이 집중하는 것은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는 사이코의 심리다. 참혹한 살인사건의 범인들이 대부분 평범한 인상의 사람이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부녀자를 납치하여 살해하는 인물은 얼굴에 흉터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험상궂고 덩치 좋은 남성이 아니라 넘어진 어린아이를 일으켜 주는 친절한 이웃일 수 있다고. 사람은 즉각적이고 시각적인 자극과 관계에 따라 판단하는 존재다. [크리피]는 이러한 사람의 심리적인 특성을 탁월하게 악용하는 살인마를 등장시키는데 내 주위에도 이런 인물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력이 위에 적은 '일상성'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몰입감을 더해주는 것은 주인공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여러 사례를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범죄자들의 심리에 나름대로 정통해 있는 인물임에도 정작 사건의 중심으로 휘말려 들어가자 평범한 사람과 다름없는 선택들을 하게 된다. 스스로가 형편없이 대처했다고 자책할 정도로. 그런데 그런 미숙한 대처들이 오히려 평범한 사람인 '(독자)'와 동일시되어 주인공의 혼란은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된다. 더불어 주인공의 시점에서 사건을 따라가게 되다보니 주인공의 전문성을 십분 살려 사람들의 심리를 읽게 되는데, 심리를 잘 보여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사건이 진행되는 흐름이 아주 꿀잼이다.

 

만약 이 책이 미국이나 유럽에 출간되었다면 독자와 공감대 형성이 어려울수도 있겠다, 생각도 든다.

[크리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동양권 특히 한국이나 일본처럼 가족의 문제에 공권력이 개입하기 어려운 문화적 특성을 띠는 사회의 일면을 아주 잘 보여준다.

저자는 이외에도 가족간 단절이라든가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매스컴 등 현대 사회의 문제들을 다양하게 제기하려고 애를 쓴다.

 

아쉬운 건 결말이다.

결말의 쫀득한 긴장감이 실망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재미는 결말까지 충분하다.

정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결말이 나는데, 이 방향 자체가 아쉽다. 내가 가진 윤리관으로는 조금 동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서, 결말부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 이런 물음들이 떠올랐고 책을 덮고 나서는 '에이... 그래도....' 이런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

하지만, 만약 너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라고 누가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 역시 저자가 쓴 결말과 크게 다른 선택과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국 범죄심리학의 전문가라고 떠들지만 어차피 탁상공론일 뿐, 실제로는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는 매스컴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171쪽 3장 가면

나도 모르게 사진 찍힌 상황을 적당히 바꾸었다. 실제로는 대학 근처의 술집이 아니라 호텔 안의 엘리베이터였다. 더구나 학생들과 같이 있었던 게 아니라 린코와 단둘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백하다. 이럴 때는 솔직히 말해서 오해를 사기보다 적당히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나으리라.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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