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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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삶을 빚는다.

조금 더, [책벌레와 메모광]에 어울리게 이야기해보자면. 글 읽기는 기억을 만들고 메모는 기억을 지킨다. 이렇게 보존된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정제되면 또 다른 책이 되어 후대로 전해진다. ‘글자가 탄생하고 이 세상에 나타난 이래,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누군가는 끝없이 읽고 미친 듯이 메모하여 기억을 남겨왔다. 그런 기억들은 길이 되어 저 시대에서 이 시대로 흘렀다.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와 미래를 향해 조물조물 나아간다.

 

내가 먹은 것이 곧 나라는 유명한 말을 책 읽기에 빗대어 보면, 내가 읽은 것이 곧 내가 된다. 눈으로 먹은 것(간서(看書)), 소리를 내어 읽기 즉 입으로 먹은 것(낭독(朗讀)), 내 소리를 들은 귀가 먹은 것(독서(讀書)), 손으로 따라 써서 손에 먹인 것(초서(抄書)). 이렇게 열심히 씹어 먹은 글자들이 결국 마음에 깊이 인 박혀 생각을 다스리고 기운을 채워 곧 나 자신이 되는 이치다. 이치가 이러하니 한낱 벌레가 책속에서 신선(神仙)’이라는 글자만 골라 파먹고 환골탈태의 명약으로 변신한다는 맥망의 이야기가 얼토당토하지 않다. 글을 먹는 일에 끊임이 없으면 미물도 명약으로 변한다는데, 책벌레가 된 사람인들 오죽할까. 먹어치우듯 책을 삼키는 책벌레로 살다보면 나라고 변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자. 글을 먹는 일이 단번에 밥을 주진 않는다. 이 땅에 먼저 살다간 책벌레의 대부분은 그들 자신을 활활 부수어 다른 이에게 명약이 되었을지언정, 부귀영화를 누리지는 못했다.

 

실은 책 제목이 참 부담스러웠다. 누군가 밟아 이겨도 찍 소리 못할 미물인 벌레에 누구나 기피하는 미친 이, ‘을 한 자리에 모았으니 손이 쉽게 갈 리가 있나. 무엇보다 이미 제목에서부터 나와는 연이 없어 보였다. 나는 책벌레도, 메모광도 아니었으니. 그렇지만 결국 맺어야 할 인연은 어떻게든 맺히는가. 결국 나는 이 책의 첫 장을 넘기게 되었고 하루 동안에 다 먹어버렸다.

책을 베껴 쓰는 걸로 입에 풀칠했던 그들, 혹독한 허기를 책 읽기로 달랬던 기이한 사람들, 찰나를 비상하다 사라져버리는 단상을 붙잡기 위해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굵기로 각주를 남겼던 이들. 가히 책벌레에 메모광이라는 이름이 붙어야만 하는 이 사람들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책을 보존하기 위해 고됨을 마다않고 날이 좋을 때면 책을 햇볕에 널어 말리고 때로는 책이라는 귀한 자산을 사회와 공유하기를 아낌없이 하였다. 벌레, 졸음, 쾌락, 가난, 체면, 욕심, 시간 어쩌면 인간의 운명. 이들은 책 읽기를 방해하는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온갖 지혜와 꾀를 총동원하여 맞선 투사들이었다. 신선이라는 글자를 찾아 쉼 없이 기어가는 벌레처럼, 이들의 읽기와 쓰기는 한결 같았고 맹렬했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지은이 정민 교수 자체가 책벌레에 메모광이라, 현대 책벌레의 삶을 보여주는 소소한 일상이 이야기 마디마다 들어차 재미에 한몫 했다. 식당에 가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그 잠깐 사이에 메모에 빠져 음식이 저자를 기다려야 했던 일이라든가, 지하철 안에서 짬짬이 읽고 정리한 내용들이 벌써 여러 권 책으로까지 펴낸 일들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지은이 그리고 모든 책벌레 조상들이 책 읽기에 그 자체 외에 다른 부가가치를 더하지 않아서 좋다. 책 읽기는 책 읽기일 뿐이다. 책벌레라고 하여 반드시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거나 유능한 기업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는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향기로운 삶을 빚는 과정이라는 것이, 동서고금 모든 책벌레들의 전언이다.

 

나의 오늘은 [책벌레와 메모광]을 읽어 저자의 기억을, 저자가 쫓아간 책벌레와 메모광들의 기억을 따라 갔다. 어제는 다른 책을 읽어 그 책을 지은이의 기억을 따라갔고 내일은 또 다른 책을 읽어 그 지은이의 기억을 따라 걸을 것이다. 누군가가 남긴 기억은 책 읽기와 쓰기로 빚은 그이의 삶이다. 그들이 남긴 책, 적은 메모를 따라가는 것은 그들이 낸 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따라 걷다보면 길이 넓어진다. 길이 넓어지면 사람이 모여든다. 혼자 걷던 길에 동료가 생긴다. 더 많은 사람이 책벌레가 되어 조용한 시골길이 수만 명이 뛰는 대로가 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선대의 빛나는 유산 위에서 이매망량이라는 음험한 도깨비가 틈탈 수 없는 정과 신이 빛나는 시대를 열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막연하지만 꿈꾸듯 아름다운 바람과 더불어 나는 내가 맥망보다는 조금 더 나은 열정으로 기어가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나 역시 뒤에 길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책벌레들이 남긴 기억이 이 책을 지은 저자에게 길이 되었듯이, 저자가 차곡차곡 모으고 정리한 기억들이 나에게 길이 되었듯이. 지금은 길 위를 걸어가는 내가, 훗날 길을 찾는 또 다른 누군가의 발걸음을 맞이하는 오솔길이나마 남길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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