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자는 혼자 살았다.

현관 키테이블 위는 항상 똑같았다. 그녀가 쿠바에 다녀오면서 샀던 탱고를 추는 남녀상, 열쇠들을 넣어두는 손바닥만한 플라스틱함,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 현관 쪽을 향해 있는 모양이나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순서조차 늘 그대로였다.

키테이블만 아니라 실은 그녀의 집 모든 것이 그랬다. 야채칸 제일 아래에 넣어두는 브로콜리마저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야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던 날도 집은 똑같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어두운 현관에 불이 켜졌다. 그녀는 차키를 키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들어가 거실 소파로 가방을 내려놓던 그녀가 돌연 키테이블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듯한 집, 어둠, 정적.

키테이블의 남녀상이 현관이 아닌 거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상인 줄 알았던 그녀의 집은 이상, 무언가 다른 세계가 되어 있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단편이기 때문에 빛을 낸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아주 조용하고 평범하게 걷는다. 인생을 바꾸는 커다란 사고나 엄청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삶이 보통 그런 것처럼. 마치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다른 접시로 옮기듯, 먼로는 어제 내가 보낸 시간의 일부를 깔끔하게 잘라내어 책 속으로 옮겼다. 별일없고 심심하고 그냥 보통 날. 그러나 이 일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날에는 금새 이상한 날이 되어버린다. 먼로 할머니가 쓴 단편의 재미는 이거다. 일상이 이상이 되는 그 미묘한 시차를 절묘하게 잡아냈다.

 

그래서 호흡이 길면 재미가 없어진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상이란 그 찰나의 짧은 호흡 속에서 즐겨야만 제맛 아닌가. 조금은 냉담하게 조금은 건조하게. 추수를 마친 텅빈 들판에서 차분한 가을 바람을 맞는 것처럼 먼로의 소설은 감정의 호흡을 늦추고 나의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다 지루하고 하품이 나려 하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페이지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져 또 다른 일상의 흐름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하루 하루 우리가 똑같은 듯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디어 라이프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분명 먼로 할머니의 노트북 속에는 그녀의 일상에서 잡아챈 수많은 단편들이 설익은 과일처럼 맺혀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녀가 다시 책으로 독자와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이야기들은 달큼한 기운과 생기를 품고 익어가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