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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평점 :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꼭 저수지 수면 위로 무언가가 떠오른다. 갑자기 불어난 물, 요동하는 수면, 밑바닥에서 피어오른 흙탕물. 우리가 수면 아래를 보게 되는 것은 꼭 그렇게 비가 오거나 폭풍이 휘몰아친 다음이다.
소설을 쓰는 정수현에게 삶은 저수지였다. 새로운 물이 이전 물을 재촉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도 아니었고 파도가 훅훅 수면을 뒤집는 역동적인 바다는 더더욱 아니었다. 혐오와 분노가 묘한 자괴감 아래 고요히 모습을 감추고 있는 저수지. 삶은 미동 없는 수면 밑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수현의 말은 건조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습했다. 어둡고 찜찜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이렇게도 불편하고 불안할 수도 있구나.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늦은 저녁, 인적 없는 저수지 물가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와 형, 그리고 아내. 차곡차곡 그의 삶 바닥에 죽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수면은 오히려 더욱 적막해져갔다. 저수지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큰 비가 쏟아진 건 그때였다. 이대로 영원히 잔잔할 것 같던 정수현의 삶 밑바닥에서부터 오래 묵은 흙탕물이 피어올라 수면에 닿고 그가 품어온 죄와 분노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저수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물결이 치고 새로운 물줄기가 폭포처럼 들이닥치던 때 수현은 이미 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볼을 맞대고 나직하게 묻던 영재의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 죽였어요? 더 가면 저 앞에 상처가 서 있다는 것을 안다.
너 이제 왔구나, 하고 손 내밀.
멈춰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다.
p102
좋은 남자도, 좋은 사람도 아닌 정수현의 마지막이 참 씁쓸했다. 어쩌면 그가 당연히 치렀어야 할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수현이 내 앞에 있다면 묻고 싶다. 차라리 저수지 한 귀퉁이를 박차고 흘러가 버렸다면 어땠을까? 버려지지 않아 바닥에 감춰뒀던 것들을 다 물 밖으로 드러내고, 흙탕물로 지저분하게 흐를지언정 차라리 개천이 되면 어땠을까? 수현은 건조하게 웃으며 그건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