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젊은 여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버렸다. 젊은 여배우의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재혼했다. 아이는 새어머니의 아들과 형제가 되었고 둘은 그렇게 애틋하지도 그러나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다. 그러나 불행한 사고로 한 아이는 죽고 젊은 여배우를 어머니로 둔 아이는 형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유기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는 부모님을 떠난 아이는 번듯한 가문과 배경까지 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남들이 남기고 떠난 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변화는 그가 현재에 충실한, 에너지가 넘치는 소녀와 연인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 자체가 그에게 시작된 변화의 일부였을 것이다.

 

 

[선셋 파크]는 누군가의 생의 일부다. 노골적인 시작도, 아련한 마지막도 없다. 주인공 마일스가 무슨 일을 하는 남자인지에 대해 서술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현재를 포기하고 폐기된 삶을 살기로 결정한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다 어느 순간 막을 내린다. 당장 먹고살 곳이 없어 버려진 집을 무단점거해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딱히 대단한 삶의 희망은 없는 빙과 그 무리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고군분투하지만 분홍빛 미래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삶은 이렇게 구차하고 피곤하게 이어지는 것일 뿐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지만 상투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염세적인 작가의 건조한 소설로 취급하지는 말자. 오히려 과장되지 않은 인물들의 심정과 환경은 내 것처럼 담담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한다. 작은 변화, 각자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애쓰는 인물들의 작은 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희망은 페이지가 아닌 읽는 사람의 심정 속에서 솟아난다.

논리도 증거도 없는 낙관론은 이제 되었다. 다 잘 될거야, 따위의 주문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삶을 방치하거나 유기할 수도 있다. 삶은 구차하고 피곤한 데다 종종 엄청난 공격과 함정을 숨겨두고 있으니까. 그러니 안 넘어지고 배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작은 변화, 누군가로 인해 혹은 나 스스로 발견의 내면의 모습으로 인해 생기는 작은 변화는 버렸던 삶을 다시 짊어지게 한다.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걸어가게 한다. 그것이 삶을 이어지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 마일스가 보여준 작은 변화는 풍요와 낭만으로 도배된 미래 대신 묵직한 현실, 고군분투하면서라도 삶을 이어가기로 작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보여준 과장 없는 이야기의 미덕은 이것이다. 삶을 이어가기로 작정해야만 살아지는 우리들, 소설 밖에서나 소설 안에서나 곤한 인생이라는 공유. 그래서 소설 속에서 나타난 작은 변화들이 분명 내 삶 어딘가에도 있다는 전이. 어차피 삶은 남겨진 것들이 이어져 가는 것이다. 마일스가 채무자들이 남기고 간 집에서 발견한 인형, 사진, 식기, 가구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남겨진 존재들이다. 부모님이 남겼고 어떤 문화, 어떤 환경, 어떤 사건 사고들이 나를 남겼다. 나는 남겨진 것들이 쌓여있는 거대한 유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겨진 존재의 정체성은 여러 개다. 버려진 존재일 수도 있고 계승된 존재일 수도 있다. 에너지가 넘치는 선대의 유전자를 상속 받은 존재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사상의 응집체가 될 수도 있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버려진 존재가 될 것인가, 이어져가는 그 무엇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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