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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이야기를 하는 화자에게나 그 곁의 청자에게나 모두에게 그런 일이다.
이야기는 화자에게서 흘러나와서 청자에게 고여있다가 다시 청자로부터 스며나와 흘러간다. 그 순간에 청자는 화자로 탈바꿈한다.
한낮의 햇빛이 타오를 동안 조용히 숨어있던 달은 어두워진 하늘에 고요히 나선다. 해가 자기의 이야기를 쉴 동안 달은 해로부터 받았던 이야기들을 뜨겁지 않지만 반짝이는 빛으로 풀어내 흘려준다. 한낮에는 해가, 한밤에는 달이 번갈아 들려주는 빛나는 이야기들은 지구를 살게 한다. 어둔 우주에서 유일한 생기를 자랑하는 지구의 눈동자는 해와 달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도 모두 그런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하지 말기를. 나의 이야기는 이미 지나가 두번 다시 본래 그 때를 되살려 낼 수 없는 아련한 기억이자 회상할수록 점점 다른 빛으로 변해가는 묘한 생명체다. '오늘 아침, 정말 오랜만에 아빠와 밥을 먹었어. 아빠는 꼭 아침먹고 나가라며 잠들기 전부터 다짐하셨었거든. 엄마가 어젯밤에 해 놓은 삼계탕이었는데 내 그릇에만 닭다리가 수북이 담겨 있더라. 나는 그냥 맛있게 먹었어. 정말 맛있게.'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다는 평범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들려주고 싶어 기억에서 꺼내오는 순간 그 빛을 바꾸는 것이 이야기다. 닭고기의 맛이 아빠의 자취로 치환되어 괜시리 애틋한 부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이야기다.
그래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다.
화자에게나 그 곁의 청자에게나 모두에게 그런 일이다. 이야기가 상대에게 가 닿을 때 그에게 또 다른 빛을 전하게 되는 일이 축복이고 그에게 담겨있던 이야기가 더이상 나의 이야기가 아닌 상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어 다른 곳으로 하릴없이 흘러가게 되는 것도 축복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신경숙의 이야기들이 묵직한 힘으로 가슴을 감싸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을 가장 진솔하게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사소한 일들이 이야기가 되어 흘러갈 때, 나비 날개짓이 태풍이 되는 듯한 파동으로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오늘 낮에 왔다간 우체국 기사님 이야기가 그렇고, 불현듯 읽은 브레히트의 시에서 벼락같은 어머니의 귀가를 떠올리는 이야기가 그렇다.
별일없이 흘러간 시간들이 이야기가 되어 몸체를 드러낼 때 그리고 그 몸체가 애정과 연민, 낙관이라는 프레임을 통과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반짝반짝 빛난다.
신경숙이 저자의 말에서 쓴 '이 이야기들이 당신을 한번쯤 환하게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그래서 참 미덥다.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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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모든 것은 이야기와 또 다른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나를 발견해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다.
아무리 써도 아무리 들려줘도 이야기는 언제나 퐁퐁 솟아난다.
그러나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아무리 그 안을 차고 넘치게 채우고 있어도 길어내지 않으면 어차피 우물 속의물일 뿐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