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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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말'에 대한 소설이다.

 

 실체가 없는 것의 형태를 드러내는 말, 모호한 인상을 명확하게 구현하는 말. 

혼란의 바다를 헤치고 사람과 사람을 만나고 소통하게 하는 말의 본질을 꿰뚫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말의 천가지 얼굴에 민감하게 포착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국어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전의 이름은 무려 대도해(大渡海).

사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책의 제목이 주던 의문은 풀린다. 수천만개 그 이상의 말의 바다에서 꼭 사전화가 필요한 즉,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단어를 추려내 명확한 의미를 서술해 담은 사전은 그 자체로 혼란의 바다 위를 건너게 하는 배다.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당연히 등장인물들은 지루하고 다분히 편집적이다.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고양되다와 고무되다의 차이를 잘 모른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사랑을 남녀간의 애정이라고 서술해도 그만, 상대에 대해 느끼는 연모의 마음이라고 서술해도 그만이다. 어차피 사랑은 그냥 사랑이니까.

 그런데 사전편집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냥 그런 것이 아니게 된다. 한 그루 나무에 수십 만개 나뭇잎이 달려 있어도 꼼꼼히 뜯어보면 제각각 생김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사실 말이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란 없이 제각각 저마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와 의미에 매달려 책을 제작하려는 이들이다보니 당연히 감각도 성향도 남다를 수 밖에.

 

 그러나 그렇게 남다르고 묘하게 이상한 사람들이라고만 이들을 말할 수는 없다.

이들은 말 그대로 배를 엮는 사람들이다.

동성에 대한 애정으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춘기 청소년이 사전을 폈을 때 구원을 발견할 수도 있게 하는 사람들.

생전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순진한 청년이 사전을 폈을 때 '이것이 연애로군'이라며 어지러운 마음을 달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사람들.

황혼에 접어든 어느 부인이 사전을 폈을 때 여전히 거기 있지만 모습을 달리한 말을 발견하고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를 잇는 다리 위에 서서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래, 그런 사람들이 이들이다.

 

 무엇보다도.

열정을 상실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정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사전은 일반 서적과 같지 않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2-3년 남짓이면 출간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배를 엮다]의 사전편집부는 채집과 수록, 교정 등의 지난하고 고단한 과정에만 14-5년을 들였다. 어느 한 때가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만들 수 있는 책이다. 사전을 제작하는 것이 내 길이라는 광적인 신념과 몰입이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일본의 독자를 열광케 한 것은 이것 아닐까.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특이하고 지루한 사람들이지만 기어코 <대도해>를 만들어낸 이들의 열정에 독자는 열정으로 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요상한 열정으로 치자면 끝판왕급인 인물 마지메는 '무적의 마지메'로 통한다.

유들유들하고 대충 나쁘지만 않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딱 그렇게만 살던 니시오카는 이 마지메 앞에서 남모르게 고전한다.

대체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게 저토록 사전 제작에 파고들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건지 혼자 속으로 앓며 고민한다.

영 볼품없게 생긴 마지메를 반반한 인물의 자신이 질투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인정도 한다. 그리곤 마침내 이렇게 되고 만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전을 완성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걸어 사전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회사 동료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서포트 할 수 있는가,' 이다.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할 것.

니시오카는 지금까지 겸연쩍어서 피해 왔던 일을 그렇게 하자라고 마음먹고 나니 의외로 후련하고 가슴이 설렜다.]

페이지 179-180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 내 마음을 움켜쥔 부분은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의 히어로로 각성하게 되는 부분도 아니고  <대도해>가 출간되는 부분도 아니었다. 여기였다. 인생을 대충 살던 니시오카가, 열정이란 귀찮고 창피하고 모양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열정으로 응할 것이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게 된 장면이었다. 그건 작가의 말처럼 후련하고 설레는 순간이었다.

 

 

 열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가슴에 씨를 품고 있다 봄볕에 싹이 터지듯 어느 날 터져오르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뜨거운 것만도 아니다. 오래오래 그 일에 매달리게 해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게 만드는 것, 십년의 세월도 '아 벌써 이렇게 지났나?'하고 덤덤하게 느끼게 하는 것도 열정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나 엮어야 할 배가 필요하다. 배가 필요해 엮을수도 있지만 일부러 엮을 배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배를 엮어 완성하는 일이다.

 

 한동안 일에 지쳐있었다.

왜 이 일을 내가 시작하게 되었을까, 싶었다. 니시오카 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뭐 대충 하면 되지 않겠어, 싶었다. 그러다 나는 하루 만에 배를 엮어 완성해야겠다는 일념을 다시 충전했다. 이 책 때문이다.

누군가의 열정에는 열정으로 응하라고, 열정적인 사람을 창피하게 생각지 말고 본인이 그렇지 않다면 열정적인 사람과 함께 하라고.

나는 지쳐 손에서 놓았던 공구를 다시 들고 배를 엮으러 달려 들었다.

배를 엮자. 완성하자. 지금 필요한 건 이런 마음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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